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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508화 (507/1,000)

508화. 제염

허공에 서 있는 소녀의 광기 어린 말에 사람들은 입이 떡 벌어졌다. 다들 채소가 만독 사존처럼 엄청난 강자를 앞에 두고 이렇게 태연한 것이 이해가 안 됐다.

채소는 정녕 지지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른단 말인가!

만독 사존마저 그 모습에 놀랐는데 괴이한 표정을 지으며 소녀를 노려봤다.

“감히 그따위 말을 내뱉다니. 스읍, 꽤 흥미로운걸? 널 얻고 싶은 의욕만 차오르는구나.”

말을 마친 만독 사존이 공간을 가르며 귀신처럼 나타나 창백한 손으로 채소의 팔목을 잡았다.

만독 사존의 공격에 채소의 주위 공간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체내의 영력마저 봉인되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목진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바로 나서려 했는데 채소가 갑자기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멈춰 섰다.

채소한테 지금 상황을 대비할 비장의 무기가 있단 말인가?

그때 채소는 자신을 잡으려는 만독 사존을 노려보더니 수많은 화염을 새긴 빨간색 옥패를 꺼내 부쉈다.

활활!

잇따라 화염이 활활 타올라 채소를 감싸자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채소를 감싼 화염은 현란한 색을 띤 신기한 화염으로 한 가지 속성의 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물 흐르듯 채소를 휘감은 화염은 물과 불이 어우러진 듯했고 지극히 순수한 빛을 띤 화염에 세상 만물을 없앨 정도의 무서운 파동이 깃들었다.

목진은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진 화염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유염이 수련한 만염법신도 비슷한 능력을 지녔는데 채소가 휘감은 화염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저건…….”

만다라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채소 주위에 휘감은 아름답고도 순수한 화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녀마저도 그 속에서 상당히 위험한 파동이 느껴졌다.

그때 채소를 공격하려던 만독 사존은 바로 철수했다. 지지존인 그는 채소가 휘감은 화염에서 상당히 무서운 파동을 느낀 것이다.

채소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주위를 휘감았던 지극히 순수한 화염이 공간을 가르며 순식간에 상대방의 주위에 나타나 그를 가뒀다.

사람들은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채소가 소환한 화염은 공간과 거리를 무시하고 바로 만독 사존의 주위에 나타났다. 그 속도를 따를 자가 거의 없었다.

“야!”

만독 사존이 잔뜩 화가 난 채 옷깃을 휘날리자 은하수처럼 웅장한 영력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 방울만으로도 천지를 부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영력의 바다는 현란한 화염에 닿자 바로 사라졌다.

“이럴 수가!”

만독 사존은 너무 놀란 나머지 지지존으로서의 위엄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실력이 한참 못 미치는 소녀한테 이토록 무서운 수법이 있다는 것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쿵!

만독 사존은 더는 소녀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 손을 모아 결인하자 체내에서 선홍색 안개를 내뿜어 주위에 보호막을 형성했다.

천지의 영력은 선홍색 안개에 닿자마자 부식되어 없어졌고 공간마저 녹아내렸다. 이는 만독 사존의 필살기인 신독으로 제아무리 지지존이라고 해도 절대 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잇따라 혈무는 혈룡을 이뤄 포효하며 현란한 화염에 맞섰는데 화염에 닿자마자 처량하게 울부짖으며 증발해 없어졌다.

현란한 화염은 만독 사존의 본체를 향해 돌진했다.

만독 사존은 그제야 심각해졌다. 무서운 화염에 닿으면 엄청난 부상을 당할 것을 직감했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현란한 화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녀석은 그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을 모양이었다.

“젠장!”

만독 사존이 눈가를 파르르 떨다가 이를 악물고 인법을 바꾸자 육신이 폭발해 사방에 피를 튀겼고 오색 찬연한 뱀의 꼬리만 두고 본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수만 장 밖 공간이 찢어지더니 만독 사존이 윗몸만 남은 채 피를 뚝뚝 흘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껏 초라해진 만독 사존의 모습에 만다라와 유천도마저 안색이 잔뜩 어두워졌다. 만독 사존은 비록 지지존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엄연히 지지존으로 채소를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지금은 실력 차이가 엄청난 소녀한테 꼬리를 잘려 육신이 반 토막밖에 안 남은 지경이 되었다!

“소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목진을 포함해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채소를 쳐다봤다. 목진은 채소의 출신이 남다를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너, 넌 도대체 누구냐?”

수만 장 밖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만독 사존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채소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는 당장에라도 채소를 죽이고 싶었지만 불가능하단 걸 잘 알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전의 화염은 절대 채소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 주인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로 만독 사존이 꺼리는 대상이었다.

옥패 하나만으로 그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다니, 본인은 도대체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

설마 천지존…….

만독 사존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날 갖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채소는 피식 웃으며 만독 사존을 노려보더니 손을 가볍게 들자 현란한 화염이 돌아와 머리 위에 모여 화염의 무늬를 이뤘다. 그러자 단로 하나와 그 위에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모양을 했다.

뒷짐을 쥔 채 검은색 장발을 휘날리며 서 있는 사람은 검은색 척자를 등에 메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천지를 발아래에 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는 천지를 능가하는 위엄이었다.

대부분은 화염 무늬가 낯설었지만 만독 사존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무한의 화역 출신인가? 염제와는 무슨 관계인가?”

채소가 대천세계에서 그토록 유명한 무한의 화역 출신이란 걸 알아챈 만독 사존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목소리마저 파르르 떨렸다.

“그런 거였군…….”

만다라는 이내 정색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채소를 바라봤다.

“무한의 화역 사람이었군. 그럼 일전의 화염은 말로만 듣던 제염이겠군.”

“제염이라…….”

“제염은 무한의 화역 창시자인 염제의 화염으로 천지의 다양한 화염을 제련해서 만든 거라고 들었어. 이는 화염의 제왕으로 대천세계에서 그 위력을 따라갈 화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만다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저 아이가 제염을 지니고 있다니, 염제와 상당히 가까운 모양이야. 허허, 만독 사존이 이번에 잘못 걸려들었어.”

정작 채소는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씨익 웃으며 화들짝 놀란 만독 사존을 쳐다봤다.

“나를 데려가려면 내 아버지인 염제한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을까?”

소녀의 말에 만독 사존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채소의 한기 어린 말에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순식간에 그 구역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채소가 무한의 화역 주인인 염제의 딸이라니!

꿀꺽.

사람들은 이내 침을 삼켰다. 무한의 화역은 대천세계의 진정한 정예 세력으로 북계는 물론이고 천라대륙에서 이를 건드릴 세력은 없을 것이다.

또한, 무한의 화역의 창시자인 염제는 대천세계의 진정한 거장이었다. 무한의 화역은 그와 실력이 비슷한 다른 세력과 비교하면 존재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염제 때문에 감히 무한의 화역을 건드리지 못했는데 그는 대천세계의 천지존 중에서 최정예에 꼽힐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채소의 아버지가 전설 속 염제란 소리에 잔뜩 놀라더니 안색이 한껏 어두워진 만독 사존한테 눈길을 돌렸다.

만독 사존은 북계의 한쪽을 책임지는 패주로 지지존에 이르러 감히 그를 건드릴 사람은 없었지만 염제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람들은 그에게 동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위엄을 떨치려다 염제의 딸을 건드리게 될 줄이야…….

그러다 무한의 화역에서 문제라도 삼으면 사신전은 바로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만독 사존의 창백한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렸고 경직된 얼굴을 한 채 머리 위에 화염 무늬를 그린 채소를 바라봤다. 지지존이 되면 천지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더 잘 알았다. 이는 그야말로 지고무상이었다.

“방금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필요하면 아버지를 모셔올까?”

채소가 차가운 표정을 한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만독 사존은 온몸을 파르르 떨더니 애써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네. 난 절대 그대를 어찌할 생각이 없었어.”

만독 사존은 채소의 출신에 잔뜩 놀라 굽신거리기 바빴다. 그의 실력은 북계에서도 최정예가 아닌데 강자로 가득 찬 무한의 화역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한테 꼬리가 잘렸는데 이대로 가만둘 거야?”

이에 만독 사존은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그는 꼬리가 잘려 엄청 화가 났지만 채소를 죽일 수는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그 소식이 무한의 화역에 닿으면 그쪽에서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내 실력이 거기까진가 보지, 그럼 이만.”

만독 사존은 체면이 구겨질 대로 구겨져 더 이상 이곳에 남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채소가 정말 화라도 나면 염제를 모셔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무한의 화역과 북계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염제가 일단 딸의 부름에 감응하면 바로 공간을 가르고 올 수도 있었다.

만독 사존은 반절밖에 남지 않은 몸을 이끌고 사람들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이보다 초라할 수 없었다.

적혈의 복수보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또한, 적혈이 죽지 않았다고 해도 만독 사존은 당장 그를 죽이고 싶었다. 감히 염제의 딸을 건드리다니, 그런 녀석은 남겨봐야 더 큰 화를 부를 것이 뻔했다.

사람들은 황급히 도망가는 만독 사존의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지지존이 이런 낭패를 볼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한 것이다.

“대단한 무한의 화역에, 대단한 염제일세.”

목진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더니 바로 숙연해졌다. 목진한테는 지지존도 엄청난 존재인데 무한의 화역을 상대로는 꼼짝 못 했으니 무한의 화역이나 염제 같은 진정한 강자가 대천세계에서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깨닫는 기회였다.

“염제가 대단한 인물이긴 하지.”

만다라마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부심이 강한 그녀마저 염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천세계에 천재는 많지만 염제를 뛰어넘을 자는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때 다른 한편에 서 있던 유천도도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만독 사존과 협력해 만다라의 손에서 목진을 얻어내려 했는데 갑자기 염제의 딸이 나타나 만독 사존을 내쫓을 줄 몰랐다. 그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상황에 어쩔 바를 몰랐다.

“유천도, 당신의 협력자가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 같군.”

만다라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유천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유천도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보아하니 목진이 염제의 딸과 관계가 각별한 것 같은데 뜻을 굽히려 하지 않다가 오히려 엄청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비록 천현전의 실력이 사신전보다 뛰어나고 그 또한 만독 사존보다 강하지만 무한의 화역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천도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대라 역주, 너무 우쭐대지는 말게. 대라천역에서 이번 용봉천 대결을 통해 거의 모든 세력과 적이 되었다고 들었네. 유명궁과 신각에서 절대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니 이번 대수렵전을 치르고 나면 대라천역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겠군.”

유천도가 한기 어린 눈빛으로 만다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라천역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니까 얼마든지 덤비라고 해.”

만다라도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다 만약 대라천역이 사라지면 천현전도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야.”

“과연 그럴까? 대라천역이 이번 대수렵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어디 지켜보지.”

말을 마친 유천도는 옷깃을 휘날리며 목진을 노려봤는데 예리하기 그지없는 눈빛에 소년은 피부가 찌릿했다.

그런데 목진은 살기 가득한 유천도의 눈빛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상대방은 목진을 건드릴 수 없자 콧방귀를 뀌더니 바로 천현전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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