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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509화 (508/1,000)

509화. 봉왕제(封王祭)

이렇게 유천도가 떠나자 숨 막히던 영력 위압감은 완전히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다라는 미간을 찌푸린 채 유천도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상황이 많이 안 좋아?”

목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유천도의 말은 전부 믿을 게 못 되지만 아무리 대라천역 같은 세력이라도 잔혹한 대수렵전에서 사라질 위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용봉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대수렵전의 흐름이 바뀔 정도는 아니야.”

만다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용봉천에서 아무리 큰일이 벌어져도 대수렵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귀찮아질 것만은 분명해. 대수렵전을 치를 때마다 정예 세력이 합병되거나 사라지기도 하니까 말이야.”

만다라는 무덤덤하게 웃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대라천역도 고분고분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우리를 건드리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게 해줄 거야.”

이에 목진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대천세계의 잔인한 일면이 느껴졌다. 대라천역처럼 강한 세력이라도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많았다.

그때 채소가 다가와 가볍게 인사하자 만다라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쌀쌀맞던 만다라는 염제의 딸한테는 제법 친절했다.

“나도 이제 떠나야겠어.”

채소가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즐거웠어.”

목진은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 꽤 마음에 드는 친구를 사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이렇게 떠나보내려니 조금 아쉬웠다.

“이번에 정말 고마웠어.”

목진은 용봉천에서나 밖에서나 발 벗고 나서서 도와준 채소가 정말 고마웠다.

“내 신분을 알았으니 다시 너를 무한의 화역으로 청하면 대답이 바뀔까?”

채소가 가볍게 손을 저으며 말하자 만다라는 목진을 힐끗거리기만 했다.

목진도 흠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문득 상지대륙에서 마주쳤던 임정이 떠올랐다. 무경의 공주인 임정은 채소 못지않은 신분으로 똑같이 목진을 무경에 오라고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그건 이번에도 변함이 없었다.

목진은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채소는 변함없는 대답에 목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래. 난 우리의 다음번 만남이 기대돼. 그때 넌 얼마나 성장했을까?”

말을 마친 채소는 손을 휙 젓더니 한 줄기 빛이 되어 빠르게 사라졌고 목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주먹을 쥐었다. 다음번에 채소를 만나면 더는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지 않았다.

목진의 진정한 수련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채소가 떠나고서야 점차 눈길을 거뒀고 일이 마무리되자 잔뜩 놀란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머지않은 미래에 용봉천과 이곳 용봉 산맥에서 벌어진 일은 북계에 엄청난 여파를 가져다줄 것이고 무명인사 목진은 곧 북계 젊은이 중 가장 이목을 끄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한편, 목진은 호호탕탕 떠나가는 사람들은 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봉천 대결이 드디어 끝났다.

“감히 무한의 화역의 요청을 마다해?”

만다라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목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는 목진이 채소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 조금 놀라웠다. 무한의 화역은 대라천역 따위가 비길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곳이었다.

“내가 대라천역에 오기 전, 무경의 요청도 거절했다고 하면 아마 까무러치겠지?”

목진이 배시시 웃으며 한 말에 만다라는 입이 떡 벌어졌다.

보통 3급 지존경에 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저 웃어넘겼겠지만 목진의 말에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무한의 화역이든, 무경이든 아무나 받는 곳이 아닌데 목진은 3급 지존경 밖에 안 되는 실력으로 양측의 요청을 받았다니 아무리 만다라라도 믿기 어려웠다.

“무한의 화역과 무경은 대천세계에서 엄청난 존재라 그 힘을 빌려 수련하면 훨씬 수월해지겠지. 그런데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목진은 잔뜩 놀란 만다라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만다라는 잠시 조용해지더니 흐뭇한 표정으로 목진을 쳐다보았다. 안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천부적 재능이 뛰어나도 절대 절세의 강자가 될 수 없었다. 대신, 목진처럼 더 위험할지는 몰라도 혼자서 끝까지 싸워나가려는 사람이야말로 수련에서 엄청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난 이제야 네가 대일불멸신의 주인이 된 이유를 알 것 같아.”

만다라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한 말에 목진은 히쭉 웃었다. 만다라의 칭찬에 그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네가 이번에야말로 대라천역의 체면을 제대로 세웠어. 구유궁 사람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바로 대라천역으로 돌아갈까?”

만다라는 미소를 짓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돌아가면 봉왕제를 개최할 건데, 난 네가 우리 대라천역의 10번째 왕이 되어줬으면 해.”

이에 목진은 깜짝 놀랐다. 대라천역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더없이 대단해 보였던 왕들과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비록 왕좌에 미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해 동안 이룬 성과를 나타내는 거라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난 아직 3급 지존이라 왕이 되는 일에 반대가 많을 거야.”

목진은 그렇다고 왕이 되란 만다라의 말에 이성의 끈을 내려놓을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오히려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목진의 냉정함을 익히 알고 있던 만다라는 그의 반응에 그리 놀라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대라천역에서 왕의 책봉은 엄청 중요한 일이야. 대라천역은 땅이 크고 넓어 휘하에 세력이 가득한데 성주만 해도 천 명 가까이 돼. 그중, 대부분은 대라천역에 큰 공을 세운 사람들로 새로운 왕은 대부분 이들 중에서 정하곤 하지. 그래서 10번째 왕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럼 내가 물러날게.”

목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10번째 왕이 되든 말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가 왕이 되면 구유궁이 보다 유명해지는 것 외에 별다른 점은 없었다.

“안 돼.”

만다라가 무덤덤하게 한 말에 목진은 머쓱하게 콧등을 쓸어내렸다. 그는 대라천역의 주인인 만다라의 말을 거슬러 그녀가 화라도 난 줄 알았다.

“네가 없었다면 10번째 왕은 아마 이 두 사람 중 하나가 됐을 거야.”

만다라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중 한 사람은 대라천역 휘하에서 가장 큰 도성인 천라성의 성주, 진종(秦钟)이야.”

“천라성의 진종이라…….”

목진은 구유한테서 익히 들어 진종이란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의 명성은 9왕에 못지 않았지만, 여태껏 5급 지존경에 이르지 못해 왕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음귀종(陰鬼宗)의 종주, 구태음(邱太陰)이야.”

“흠, 구태음이라…….”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생각했다. 구태음은 대라천역의 지역을 넓힌 공신으로 상당히 유명했다.

“이들 중 누굴 선택하든 나보다는 나은 것 같아.”

목진은 대라천역에 온 지 한 해밖에 안 됐지만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만다라가 언급한 두 사람과 비교하면 아직 경험이 턱없이 부족해 그가 왕의 자리를 꿰차면 반대가 많을 것이다.

“진종은 충심이 가득한 사람이라 그를 왕으로 책봉하는 것에 나 또한 동의해.”

만다라는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런데 구태음은 아니야. 그의 야심은 능력과 비례해서 몰래 천현전과 내통하고 있다고 들었어.”

목진은 흠칫 놀랐다. 이는 목진의 신분으로는 절대 접할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정보가 정확한지 몰라. 내가 앞뒤 따지지 않고 대라천역에 공이 큰 구태음을 내치면 민심을 잃을 거야. 다른 때 같으면 천천히 그의 뒤를 캐면 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혹시…… 대수렵전 때문에 그래?”

목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만다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렵전을 시작하기 전에 10번째 왕을 반드시 정해야 해. 그런데 난 의심이 가는 사람을 그 자리에 올릴 수 없어. 대수렵전처럼 규모가 큰 전쟁에서 조금만 실수해도 치명타가 될 거야. 그러니 배신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그럼…….”

“봉왕제 때, 구태음은 분명 왕의 책봉에 대해 언급할 거야. 그럼 난 진종한테 녀석을 제재하라고 할 건데 그가 실패하면…….”

만다라는 황금색 눈동자를 굴리며 목진을 쳐다봤다.

“네가 나서 10번째 왕의 자리에 올랐으면 해!”

이에 목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왜 네가 나한테 왕의 자리를 권유하나 했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군.”

목진은 비록 구태음을 만난 적은 없지만 대라천역에서 그처럼 명망이 높아지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태음은 유명 황자 못지않은 실력자라 목진은 싸움이 벌어지면 녀석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 네가 임무를 무사히 완성하면 소원을 들어줄게. 그게 무엇이든 전부 들어줄 거야.”

만다라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자 목진은 재차 확인하며 물었다.

“정말이야?”

만다라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는데 목진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고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그런데 목진은 바로 옥책을 꺼내 만다라한테 건넸다.

“내가 무사히 임무를 완성하면 여기 적힌 물건들을 구해줘.”

이에 만다라가 어리둥절해 옥책을 건네받아 그 내용을 확인하더니 순간 멈칫했다.

원고구두사(遠古九頭蛇)의 정혈 열 방울.

탄천작(吞天雀)의 정혈 열 방울.

허공수의 정혈 열 방울.

* * *

옥책에는 열 마리 가까이 되는 신수의 정혈이 적혀있었는데 대천세계에서 꽤 유명한 녀석들로 정혈도 상당히 희귀하고 비쌌다.

“이렇게 많은 신수의 정혈은 얻어서 뭐 하게?”

만다라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아무리 대라천역의 자원이 풍부한들 이처럼 많은 신수의 정혈을 바로 얻기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 쓸모가 있지.”

목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 이는 용봉진경을 수련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그 또한 열 가지나 되는 신수들의 정혈이 필요하단 사실에 어쩔 바를 몰랐다. 그의 능력으로 정혈을 전부 수집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는데 만다라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어때, 해낼 수 있겠어?”

목진이 배시시 웃자 순간 표정이 굳어진 만다라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어?”

목진은 만다라가 봉왕제를 언급했을 때부터 이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난처한 표정도 어느 정도 연기였다.

이에 목진은 머쓱하게 고개를 긁적였다.

“네가 10번째 왕만 돼준다면 옥책에 적힌 물건들은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어. 이건 대라천역에서는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북계 전체를 뒤지면 분명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야.”

만다라는 이내 콧방귀를 뀌더니 음산한 눈빛으로 소년을 쏘아봤다.

“대신 실패하면 내 탓은 하지 마.”

말을 마친 만다라는 바로 한 줄기 빛이 되어 사라졌다.

목진은 소녀의 마지막 한 마디에 소름이 쫙 돋았다. 용봉천 대결이 끝나자마자 봉왕제라니…….

“진종 성주가 구태음을 제지할 수 있길 바랄 뿐이군.”

목진은 입을 삐쭉 내밀며 중얼거리다가 만다라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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