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세력들의 동향
위험천만한 전장인 운락 전장에서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그건 이곳 하늘이 난폭한 영력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밝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환경이 어떻든 피 튀기는 전쟁은 쉼 없이 일어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래된 전장에 몰려든 세력은 점차 많아졌고 다들 숨은 유적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유적지를 발견하면 다른 세력들에서 몰려들어 그곳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만들었다.
유적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치열한 싸움은 피할 수 없었고 대결을 통해 수많은 강자가 죽어 나갔다. 운락 전장의 분위는 점점 살벌해졌다.
그러나 이미 싸움은 시작되었으니 운락 전장에 들어왔다면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벌여 승리해야만 다시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 *
대라천역 왕들과 신각의 대전 소식은 며칠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날, 목진이 구유위를 거느리고 천악군을 천 리나 뒤쫓았으니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대라천역과 신각은 북계의 정예 세력이라 자그마한 움직임만으로도 이목을 끌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운락 전장에는 엄청난 파동이 일었다.
특히 목진이 직접 방의와 싸워 무승부를 이룬 뒤, 다시 구유위의 전의의 힘을 빌려 녀석을 쓰러트린 일과 천악주 서패의 발목을 잡은 일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내 혀를 내둘렀다.
용봉천의 일로 북계에 이름을 알린 목진이었지만 다들 그가 용봉록 3위에 오른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목진이 용봉록에 오른 것은 염제의 딸 때문이라 생각했고 다들 소년의 실력을 의심했는데 지금은 그 의심이 완벽히 사라졌다.
몇 달 전, 용봉천에서 목진은 전력을 다해야 겨우 유명 황자를 막아낼 정도의 실력을 지녔었는데 넉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용봉록의 패주인 방의와 싸워 무승부를 이뤘다. 그의 엄청난 성장 속도에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데 사람들을 놀라게 할 소식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목진이 구유위의 전의로 전의의 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 힘을 빌리면 방의는 물론이고 천악주 서패 같은 노참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더는 목진을 어린 소년으로 취급하지 않았고 그는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리고 더는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 * *
쿵!
난폭한 영력이 이곳 천지에서 폭발하더니 영력의 회오리를 이뤄 상대편 강자 한 명을 산산조각냈다.
유명 황자는 무덤덤하게 주먹을 거둔 뒤 내려앉았는데, 누군가 다가와 속삭였다.
“목진이란 말인가…….”
유명 황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그를 상대하며 겨우 살아남았던 소년이 몇 개월 사이에 실력이 부쩍 늘어 방의와의 대결을 무승부로 끝냈다는 사실에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손을 거두고 천천히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내가 직접 방의를 때려잡으려고 했는데 자네가 무승부로 그와의 대결을 마쳤다니 자네부터 없애야겠군.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자넬 도울 수 없을 걸세.”
* * *
오래된 유적지의 위쪽 하늘에 웅장한 전의가 들끓었고 규모가 상당한 부대가 허공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쪽에 누군가 뒷짐을 쥔 채 서서 완전히 제압된 상대편을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다들 죽어.”
살기 가득한 녀석의 고함에 전의의 바다는 한데 모여 거대한 선홍색 이무기를 만들었다.
이 또한 전의의 령이었다.
퍽!
웅장한 전의로 이뤄진 거대한 이무기의 커다란 꼬리가 순식간에 공간을 가르며 상대편의 앞쪽에 나타나 공격을 개시했는데 처량한 비명과 함께 사람들은 피범벅이 되어 추락했다.
이에 녀석은 호탕하게 웃더니 뒤에 서 있는 사람한테 고개를 돌렸다.
“소전주님, 말씀하신 그 소년의 이름이 목진이라죠? 그는 이곳 운락 전장에서 당당히 유명해졌답니다.”
녀석이 소전주라 부르는 이는 바로 천현전의 유염으로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유염의 부친이 심혈을 기울여 다시 육신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유염은 목진 때문에 육신을 잃고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녀석, 전의를 다스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의의 령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니…….”
유염이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고 녀석은 미소를 지으며 입맛을 다시더니 눈이 한껏 충혈되었다.
“소전주님, 저와 거래를 합시다. 내가 목진을 당신한테 굽신거리게 할 테니 날 천현전의 수석 통령의 자리에 올려주세요.”
이에 유염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 * *
평원은 어느새 시체가 가득 쌓인 아수라장이 되어 피바다를 이뤘고 그 전장의 한 산봉우리에서는 검은색 장발을 드리운 소녀가 조용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웅장한 전의를 뽐내는 부대가 다가오더니 경외에 찬 눈빛으로 소녀를 쳐다봤다. 그 속에서 누군가 다가오자 소녀는 서서히 눈을 떴다.
“모 통령, 방아께서 소식을 전해왔어요.”
소녀 뒤에 서 있는 누군가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통령께서 나서서 대라천역의 목진을 상대하라 하시네요. 목진도 전의의 령을 만들어냈다고 들었는데 통령께서 나서시면 여동생을 위해 구천속혼초(九天續魂草)를 얻어주겠다고 하셨어요.”
구천속혼초란 말에 소녀는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 * *
드넓은 운락 전장에서는 늘 잔혹한 전쟁이 일어났고 약육강식의 생존 법칙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편, 신각의 부대를 쓰러뜨린 목진은 영라반으로 열산왕 등과 함께 움직이며 유적지 찾기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은 운락 원단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 지지존의 밀장을 확보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목진은 영라반과 4왕의 도움으로 나흘 동안 엄청난 수확을 이뤘다.
나흘 사이, 이들은 유적지를 서른 군데도 넘게 발견했는데 그중, 등급이 3급에 못 미치는 곳 십수 군데, 3급 유적지 십수 군데에 2급 유적지마저 한 군데 찾아내 만 알 정도의 운락 원단을 얻었다.
이에 각 세력에 주어지는 운락 원단의 수는 2천 개가 넘어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열산왕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무턱대고 운락 전장을 수색했다면 그는 절대 나흘 만에 2천 알의 운락 원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목진도 그 성과에 만족했다. 이들이 유적지를 발견할 때마다 다른 세력의 눈에 띄곤 했는데 대부분은 그들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 먼저 포기하곤 했다. 6품 지존이 5명이나 있고 정예 부대가 다섯 개나 있으니 7품 지존이 와도 피하기 바빴을 것이다.
또한, 유적지 내부는 무척 위험천만했다. 이들이 찾아낸 유일한 2급 유적지를 놓고 보더라도 특수한 방법으로 육신을 보존한 원고의 강자가 10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에 6품 지존경 정도의 실력자가 4명이나 있었다.
그곳에서 운락 원단을 취하느라 목진 등은 일정한 대가를 치렀으나 열산왕 등과 함께 움직여 무사히 빠져나왔다. 구유와 단둘이서 뛰어들었다면 그 대가는 엄청났을 것이다.
* * *
어느 오래된 유적지 밖에 규모가 상당한 부대가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목진 등이 운락 원단을 취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진은 고봉에 홀로 앉아 눈을 감고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구유위와 함께 자리에 앉아있는 다섯 개의 부대를 쳐다봤다.
저들이 이룬 웅장한 전의는 서로 어울리지 않은 채 각자 한쪽 하늘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구유위의 전의를 장악하는 동시에 다른 군대의 전의를 장악할 수 있을까?’
대라천역 군대들은 산기슭에서 휴식하고 있었고 그 위쪽 하늘에 각자 다른 다섯 갈래의 웅장한 전의가 요동쳤는데 이는 싸울 때보다 훨씬 온순해 보였다.
그러나 목진은 이 온순함이 잠시뿐이란 것을 잘 알았다. 전의는 전사들의 영력과 의지의 결합으로 싸움에 대한 욕망이 불타오를 때, 의지의 변화에 따라 공격성을 띠게 된다.
목진은 완벽히 갈라진 다섯 갈래의 웅장한 전의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졌다. 실력이 부쩍 오른 목진은 구유위의 전의를 완벽히 장악했지만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더는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군대는 단기간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사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어울려야 했고 영력과 의지의 완벽한 접점을 찾아야 전의를 융합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이 이룬 전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못한다.
실력이 출중한 강자 천 명과 전의의 융합을 이룬 천 명의 부대가 싸우면 후자가 압승할 것이다. 이에 목진은 구유위에 만족하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전진사의 힘은 부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방대한 정예 부대가 없는 전진사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전진사의 힘은 부대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지금, 목진한테 제법 괜찮은 기회가 찾아왔다. 열산전의 열산군, 혈응전의 혈응위, 영검산의 영검시(靈劍侍)와 홍애동의 홍군(洪軍)이 당장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만약 목진이 이들과 공명을 이룰 수 있다면 그 전의를 장악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다.
그때가 되면 목진의 힘은 엄청난 경지에 이를 것이다. 현재, 그는 구유위의 전의만으로 서패와 같은 6품 지존을 상대할 수 있었는데 다른 네 부대의 전의까지 장악하면 7품 지존이라도 전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목진은 지금의 실력으로는 저들의 웅장한 전의를 전부 장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진사가 되지 않은 이상, 웅장한 전의를 받아들이려다 의지가 와르르 무너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건 억지로 한다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완벽히 장악하지 못해도 공명을 이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잠재력을 엿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진사와의 거리도 조금이나마 좁힐 수도 모른다.
이에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두 눈을 감고 마음으로 어두운 밤을 누비며 웅장한 전의를 느꼈는데 산봉우리 주위에 있는 다섯 갈래의 웅장한 전의의 바다에서 전의의 포효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목진한테 상당히 우호적인 느낌을 주는 구유위의 전의가 있는가 하면 각자 일정한 자리를 차지한 채 존재하는 다른 네 갈래의 전의도 있었다.
목진은 네 갈래의 웅장한 전의에 다가가 잠시 고민하다가 접촉을 시도했으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정없이 튕겨 나갔다. 그는 웅장한 전의의 무의식적인 반항과 공격에 마음이 파르르 떨렸다.
첫 번째 접촉은 실패로 끝났다.
전의는 낯선 의지의 접근을 배척했는데 다행히 목진이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조용히 끝났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미친 듯이 네 갈래 전의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의 전의는 너무 민감했다.
그러나 전의에 대해 잘 아는 목진은 무턱대고 접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을 다스리고 인상을 풀었다.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힌 목진은 다시 마음을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일부러 접근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임의로 확산시켜 물결처럼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며 다가갔다.
위잉.
그들의 전의에 닿은 순간, 목진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는데 뇌리에 도살하는 장면이 그려졌고 그들의 포효 소리가 들렸다. 난폭한 전의는 그의 의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전의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난 목진은 바로 마음을 굳히고 전의의 충격을 받아들였다. 한참 지나자 난폭했던 전의는 완전히 조용해졌고 목진의 의지는 자유로운 물고기처럼 웅장한 전의의 바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