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첨대유리(詹臺琉璃)
“등급이 더 높은 유적지라…… 혹시 그 소문 들었나?”
조용히 서 있던 홍애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가?”
열산왕 등은 흠칫하더니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설마 최근 들어 소문이 파다한 사망의 유적지를 말하는 건가?”
“사망의 유적지라…….”
목진은 그들이 말하는 사망의 유적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누군가 운락 전장의 서북쪽에서 유적지를 발견했는데 그곳에 들어간 사람 중 살아 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 다들 그곳을 사망의 유적지라고 부른대.”
구유가 바로 설명해 주었다.
“해당 유적지에 관한 소문이 퍼지자 일류 세력과 정예 세력들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다들 사망의 유적지가 1급 유적지일 거라 짐작하고 있어.”
“1급 유적지라니!”
목진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급 유적지는 지지존의 밀장이 있는 유적지 다음으로 등급이 높은 유적지로 영라반의 힘으로도 단 한 군데도 찾아내지 못한 곳이었다.
“소문으로는 그런데 1급 유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네. 허나 운락 전장에서 모든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않겠나?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어 아무도 그곳에서 뭘 얻을 수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열산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목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곳에 전진사가 별세한 흔적이 있다고 들었네.”
전진사란 말에 목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진사는 대천세계에서 보기 아주 드문 존재라 목진도 진정한 전진사가 되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전의를 장악하는 법을 알면서도 최저급 상태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고 스스로 방법을 찾으며 수련해야만 했다.
“누군가 그곳에서 엄청난 수의 전사 해골을 발견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사망의 유적지는 전진사가 남긴 곳일 가능성이 아주 커.”
구유는 목진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바로 말했다.
이에 목진은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사망의 유적지에 가고 싶었지만 엄청난 위험이 뒤따를 거라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구유궁 사람들만 있었다면 바로 출발했을 것이다. 전진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말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열산왕 등까지 있어 목진은 이들이 근거조차 없는 소문만으로 그를 따라나설지 확신이 없었다.
사망 유적지를 직접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 소문이 난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고 싶으면 최대한 빨리 결정해야 할 거야. 천현전과 신각의 전의 천재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어. 그들도 전진사에 관한 정보에 움직인 것이 분명해.”
구유의 말에 목진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현재, 우리한테는 전의의 령이 네 개나 있으니 사망의 유적지가 얼마나 위험하든 적어도 죽지 않을 자신은 있네.”
열산왕 등은 목진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우리도 1급 유적지의 위력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네.”
목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구유궁만 사망의 유적지에 간다고 했으면 상당히 위험했을 텐데 열산왕 등이 있으면 훨씬 안전해질 것이다. 이는 목진이 저들을 도와 가짜 전의의 령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열산왕 등은 절대 목진과 함께 사망의 유적지에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열산왕 등도 동의했으니 목진 등의 다음 목표는 사망의 유적지였다. 결정을 내린 목진은 주먹을 꽉 쥔 채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망의 유적지가 있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전진사가 별세했을지도 모르는 사망의 유적지에 대한 기대가 상당했다.
사망의 유적지는 운락 전장의 서북쪽에 있는 곳으로 목진 등이 있는 곳과 어느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 다들 결정을 내리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목진 등은 영라반으로 유적지를 적잖게 발견했고 그중에는 2급 유적지도 있었지만 전부 포기하고 최종 목적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목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망의 유적지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 깃든 전진사에 관한 정보였다.
현재, 대천세계에서 전진사의 수는 영진사보다 훨씬 적어 그에 관한 정보는 상당히 희박했다. 그러니 전진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절대 이 기회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천현전과 신각의 전의 천재도 목진과 똑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지 않다면 절대 부리나케 사망의 유적지로 달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목진은 그가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더 많은 사람이 알기 전에 사망의 유적지에 가려고 애를 썼다.
그가 서북 구역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튿날 황혼 무렵이었다.
* * *
서북 구역은 다른 곳보다 훨씬 음침했지만, 그 어느 곳보다 사람이 많았고 사방에서 이곳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사망의 유적지 때문에 온 듯했다. 사망의 유적지가 흉지란 것을 알면서도 1급 유적지란 소리에 이성을 잃은 것이다.
운락 전장에서 1급 유적지는 지지존의 밀장이 있는 곳 다음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지지존 이하의 강자 중 그 속에 남겨진 신술, 천재지보, 신기 등 보물이 탐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이에 목진 등은 유난히 떠들썩한 서북 구역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곳이 이렇게까지 인기가 많을 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형세가 안 좋아도 목진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예 부대 넷과 6품 지존 네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는 전원이 출전한 일류 세력과 엇비슷했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맞설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목진은 멀리 유적지가 있는 곳을 물끄러미 바라봤는데 어두컴컴한 것이 숨이 턱 막혔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이만 갑시다. 이런 대사에 대라천역이 빠지면 될까? 우리도 얼른 가서 얼마나 많은 강자가 사망 유적지 때문에 왔는지 확인해봅시다.”
목진이 먼저 떠나자 구유, 열산왕 등과 정예 군대들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대라천역 사람들이군.”
목진 등의 움직임에 사람들은 놀랐지만 감히 막아서지 못하고 길을 터줬다.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수군대기 시작했다.
“앞장선 사람이 혹시 요즘 운락 전장에서 이름을 날린 목진인가? 저 사람도 여기 왔을 줄은 몰랐군.”
“사망의 유적지에 전진사에 관한 소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전의에 대한 장악력이 남다른 목진이 그 기회를 포기할 리 없지.”
“허허, 천현전과 신각의 전의 천재는 이미 도착했네. 그들은 여태껏 목진을 찾아다녔다고 들었는데 스스로 찾아오다니…….”
“강자들의 싸움은 수도 없이 봤지만 전의 천재들의 대결은 처음이지 않나? 곧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겠군.”
“사망의 유적지에 제대로 왔군.”
* * *
서북 지역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빛을 모조리 집어삼킨 듯 어두웠고 괜히 섬뜩했다. 그곳은 바로 사망의 유적지였는데 떠들썩한 외곽과 달리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만 들렸다.
실력이 막강한 세력들은 이미 사망의 유적지에 가장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였고, 실력이 조금 약한 세력들은 조금 뒤로 물러나 있었는데 감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운락 전장에서는 실력이 강할수록 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
사람들은 부단히 주위를 훑으며 다른 세력의 실력을 가늠하며 경쟁 상대의 수를 예측했는데 그들의 눈길이 가장 많이 머문 곳이 바로 최전방의 여러 산봉우리를 차지한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북계의 유명한 정예 세력들로 규모가 상당하고 실력이 막강했는데 가장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자못 이목을 끌었다.
그 수는 몇 안 되었지만 하나같이 놀라운 영력 파동을 내뿜어 강력한 영력 위압감을 형성하였기에, 멀리서도 그 엄청난 실력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의자에 앉아있는 백의의 여인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새하얀 피부에 장발을 축 드리운 채 앉아있는 여인은 뾰족한 얼굴에 정교한 모양새를 한 미인이었고 여리여리한 몸을 지녀 사내의 보호 본능을 일깨웠지만 아무도 감히 그녀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신각에서 꼭꼭 숨긴 전의 천재인 첨대유리였다.
대부분은 신각 젊은이 중 으뜸이 방의라고 생각하는데 첨대유리의 발전 가능성이야말로 실로 엄청났다.
그녀의 재능은 방의보다 못 하지만 전의에 한해서는 녀석을 훨씬 뛰어넘었다. 신각 각주는 첨대유리가 반드시 진정한 전진사가 될 거라고 말했는데, 그녀의 지위를 익히 알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신각에서 숨겨둔 전의 천재는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한 채 무덤덤하게 앉아서 어둠에 둘러싸인 사망의 유적지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진과 구면이었다.
바로 방의, 서패, 염랑주, 찬웅주 무리였다.
그때 누군가 갑자기 올라오더니 방의한테 속삭였는데 녀석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진 채 입을 열었다.
“대라천역 사람들이 왔는데 그중에 목진도 있네.”
목진이란 말에 서패 등은 안색이 순간 어두워졌는데 정작 여인은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 대인, 지금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유적지네. 그리고 우리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서 저들을 상대할 걸세.”
이에 방의는 멀리 떨어진 산봉우리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슉!
잠시 후, 뒤쪽 하늘에서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와 다들 고개를 돌려보니 규모가 상당한 무리가 도착해 화들짝 놀랐다.
“저들은 대라천역 사람들이네!”
목진은 구유, 열산왕 등과 함께 사람들의 주시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진은 주위를 쓰윽 훑으며 강력한 영력 파동을 확인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실력이 강한 세력이 제법 온 모양이었다.
“저쪽으로 갑시다.”
그러다 목진은 가장 앞쪽에 있는 최상의 위치를 발견하였다. 그곳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지만 아무도 두렵지 않았다.
이에 열산왕 등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군사들을 이끌고 그곳에 있는 빈 산봉우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여러분, 이곳은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열산왕 등이 바로 정색하여 뒤돌아보니 멀리 떨어진 한 산봉우리에서 웅장한 영력 파동이 느껴졌고 강대한 영력 위압감을 형성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천현전 사람들이었다.
맨 앞에 있던 사람은 검은색 도포를 입은 혈안의 사내로 흑발을 풀어헤친 채 히쭉 웃으며 무덤덤하게 서 있는 목진을 쳐다봤다.
“천현전의 소천(蕭天)이네.”
녀석은 입맛을 다시고 목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자네 머리를 딸까 하는데…….”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내의 말에 주위는 순간 조용해졌고 사람들은 대라천역 앞쪽에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늘씬한 소년한테 눈길을 돌렸다.
목진이란 이름은 최근 자주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방의와의 대결로 소년은 북계 젊은이들 마음속에 우뚝선 실력자로 아무도 더는 그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남자는 목진 못지않은 실력자로 천현전의 전의 천재인 소천이었다.
소천은 비록 4품 지존경에 이르러 북계 젊은이 중 최정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의 천재란 점만으로 아무도 감히 무시하지 못했다.
소천 같은 전의의 천재는 일단 정예 부대만 장악하면 상당히 무서운 힘을 갖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