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화. 천진황
“협력하려거든 믿음이 갈만한 무언가를 내놓게.”
목진은 점차 살기를 거두고 첨대유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말했다.
“자네가 예상했던 대로 전진을 뚫는다고 계승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내가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야말로 사망의 유적지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네.”
첨대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목진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몸에 사기가 깃든 것은 사령군 뿐만 아니라 천진황도 마찬가지라네. 천진황께서는 역외 사족과 싸우다 사기가 체내에 스며들었네. 하여 지금 가장 위험한 존재는 바로 천진황이라네.”
첨대유리는 이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천진황께서는 체내에 사기가 깃들어 아직 육신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지금쯤 저쪽 깊숙한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우리가 전진을 뚫고 오히려 사지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목진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첨대유리의 말대로 천진황의 몸에 사기가 깃들어 의식이 없다면 그들은 절대 그 상대가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첨대유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당연히 승산이 있어 여기까지 온 것이네.”
첨대유리는 목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천진황께서 체내에 사기가 깃든 뒤 바로 전진을 쳐 그와 체내에 깃든 사령을 사망의 유적지의 깊숙한 곳에 봉인했기 때문에 사령은 그의 몸을 움직여 대천세계를 휘젓고 다니지 못했던 것이네. 하여 우리가 사망의 유적지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 천진황께서 남기신 전진을 일깨워 그 체내의 사령을 제압하면 이성을 되찾은 천진황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면 그 손에서 계승을 받을 수 있겠지.”
첨대유리의 말에 목진은 생각이 많아졌다. 첨대유리가 이번만큼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인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접촉을 통해 목진은 여인이 여우처럼 교활하다는 것을 제대로 느꼈다.
“그럼 전진은 어떻게 일깨워야 하는가?”
목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가장 중요한 점을 끄집어냈다.
“내가 우연히 고적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이 마침 천진황께서 남긴 물건으로 그 속에 전진을 활성화하는 방법이 적혀있었네. 하여 전진을 활성화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네.”
첨대유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그럼 내가 계승을 얻고 싶으면 반드시 당신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네.”
목진이 피식 웃으며 묻자 첨대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내가 방법을 말해줄 거란 기대는 하지 말게. 자네가 날 죽인다고 해도 절대 가르쳐주지 않을 걸세. 그러니까 당신한테는 나와 협력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고 그래야 우리 모두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네.”
이에 목진은 첨대유리를 한참 쏘아봤는데 그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 자네 말대로 하겠네. 대신,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자넬 죽일 것이네. 그따위 실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거란 망상은 하지 말게. 유리군이 없는 자넬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말을 마친 목진의 눈에서 음산한 기운이 풍겼다.
첨대유리도 목진의 살기를 눈치챘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해봅시다.”
이에 목진도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다시 협력 관계가 되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은 얼마 없었다.
* * *
암홍색 공간은 사지처럼 생기가 전혀 없었는데 이는 오래전부터 그래온 것처럼 느껴졌다.
슉!
그때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 멀리 하늘에서 두 갈래 빛줄기가 빠르게 날아와 정적을 깼다.
그들은 다름 아닌 목진과 첨대유리로 잠시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괴이한 사망의 유적지에서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천진황의 계승을 받을 확률이 늘어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목진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은 채 조용히 첨대유리의 뒤를 따랐다. 목진은 첨대유리와 잠시 협력하기로 했지만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1각 정도를 달려서야 서서히 속도를 늦췄는데 첨대유리의 안색은 어느새 잔뜩 어두워졌다.
이에 목진도 따라 속도를 늦추고 앞쪽을 바라봤는데 암홍색이었던 천지가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꼭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감옥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편, 어두운 공간에 어렴풋이 보이는 석좌에 누군가 앉아있었는데 그가 형성한 강력한 위압감이 공간 전체에 퍼졌다.
목진과 첨대유리는 자연스레 멈춰 서서 잔뜩 경계한 채, 어둠의 구역 속 석좌에 앉아있는 누군가를 쳐다봤다.
“천만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사람이 왔구나.”
어둠의 구역에서 오래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미세한 기류의 파동과 함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얼굴에 움푹 파인 눈은 목진과 첨대유리를 보더니 반짝 빛났다.
“난 천진황이란다. 너희 둘이 내가 남긴 사령전진을 뚫은 걸 보면 전의에 관한 천부적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그러나 나의 의지가 곧 사라지니 계승은 인연이 닿는 사람에게 줄 것이다.”
상대편에 있는 그의 힘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힘겹게 손을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서 이리 오거라.”
그런데 목진과 첨대유리는 이상하리만큼 나서고 싶지 않아 제자리에 서서 천진황이라 칭하는 사람을 쳐다봤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상대방은 흠칫하더니 몸을 점차 움츠렸다. 그는 의식이 곧 사라질 사람 같았다.
그러나 목진과 첨대유리는 끄떡 않고 자리에 서 있었다.
상대방이 더는 움직이지 않자 그 구역은 괴상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1각…… 2각이 지나자 첨대유리는 점차 미간을 찌푸리며 목진을 쳐다봤는데 소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고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잠시 후, 어둠의 구역 속 석좌에 앉은 채 맥없이 눈을 감았던 상대방은 사기가 깃든 눈을 번쩍 뜨더니 목진과 첨대유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녀석들, 잘도 참네!”
목진과 첨대유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짓이 없어 이따위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목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고 첨대유리는 피식거리며 그를 흘겨봤다. 목진은 무려 천진황의 체내에 스며든 사령을 장난이나 치는 애 취급하였다.
“풉.”
이에 사기가 가득 깃든 눈으로 목진을 노려보던 ‘천진황’은 얼굴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4급 지존경 따위가 감히 내 앞에서 우쭐대는 것이냐!”
“정말 그렇게 대단하다면 이미 나를 죽였겠지. 왜 지금까지 나와 말을 섞고 있을까?”
목진이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천진황’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법 신중한 녀석이 왔군. 그런데 이를 어쩌나? 천만년을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너흰 그렇지 않을걸? 날 죽여야 너희가 천진황의 계승을 얻을 수 있으니 말이야.”
“자네가 말했던 천진황이 남긴 전진은 어디 있는가?”
목진은 녀석의 말을 무시한 채 첨대유리한테 질문을 던졌다.
진정한 천진황은 사령한테 몸을 빼앗겼고, 천만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어둠의 구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사령을 죽이려면 천진황이 남긴 전진을 뚫어야만 가능했다.
이에 첨대유리는 주위를 쓰윽 훑었는데 점차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이 구역에서 전진의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설마 녀석이 전진을 파괴한 건가?”
잠시 사색에 잠겼던 첨대유리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진이 파괴되었다면 사령은 그녀와 목진을 속일 것이 아니라 바로 나서서 두 사람을 죽였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어두운 구역을 향해 손을 휘둘렀는데 순간, 영력 돌풍이 휘몰아쳐 그 아래쪽을 감쌌던 흑기가 사라졌다.
목진과 첨대유리는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둠의 구역 아래쪽에는 만 명 정도 되는 군사들이 있었는데 온몸에 검은색 석반이 분포된 이들은 조각상같이 조용히 서 있었지만 내뿜는 살기는 천만년이 지난 지금도 상당히 강력했다.
“엄청난 군대로군!”
첨대가 이내 감탄하며 말했다.
“저들은 절대 조각상이 아니네.”
목진은 한껏 진지해진 채 말했다. 그는 조각상같이 서 있는 군사들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었다.
“저들은 천진황이 직접 거느렸던 군대로 휘하의 최강 부대일 것이네. 천진황의 몸에 사령이 깃들자 자신을 석화하면서까지 영력을 모아 전진을 이뤄 사령을 죽이려 했을 것이네.”
“그들이 일전의 사령전진에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네. 그러지 않았다면 전진의 위력이 줄어들었다고 한들 우리는 절대 뚫고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네.”
첨대유리가 감탄하며 말했다. 목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각상들을 살폈는데 그들은 머리에서 회색광선을 내뿜더니 어둠의 구역을 지나 천친황이 앉아있는 석좌 아래에 모이는 것을 발견했다.
사령은 회색 광선 때문에 여태껏 어둠의 구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었다.
숨겨뒀던 조각상 군사들을 발견한 것을 알아챈 사령은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고 음산한 눈으로 한기를 내뿜었다.
“너희 따위가 그 녀석이 남긴 전진을 소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사령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전성기 때였으면 목진과 첨대유리 따위를 바로 없앴을 거라 상대로조차 취급하지 않았다.
“첨대 낭자, 이제부터는 당신만 믿겠네.”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첨대유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주먹을 꽉 쥐었는데 보잘것없는 석인이 수중에 나타났다. 손바닥만 한 석인은 표면에 특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목진도 잘 아는 전문이었다.
첨대유리가 석인을 꺼내자 어둠의 구역 아래쪽에 서 있던 조각상에서 파동이 느껴졌다.
“목왕, 이 석인으로 조각상 부대를 소환할 수 있네. 대신, 엄청난 영력이 필요해 나 혼자서는 절대 못 하니 도와주면 고맙겠네.”
첨대유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 역시 목진 못지않게 신중했다. 첨대유리는 영력 소모가 엄청나 목진과 천진황의 계승을 다툴 수 없게 될까 봐 일부러 목진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사령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는 목진은 크게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려 오래된 석인에 불어넣었는데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석인에 새겨진 전문은 조금씩 밝아졌고, 어둠의 구역 아래쪽에 서 있던 군사들은 꼭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석좌에 앉아있던 사령은 드디어 안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