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2화. 갈취
첨대유리의 한기 어린 목소리에 목진은 저도 모르게 웃음부터 났다. 목진은 첨대유리가 이번 일로 천악주 등의 마음을 산 것에 반감은커녕, 오히려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 눈치와 판단력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적이 안 되도록 하는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목진이 아무리 첨대유리를 좋게 봤다고 해도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 천악주 등이 오히려 첨대유리를 의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각이 성의를 보여주면 저들을 풀어주겠네.”
목진은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어느덧 전장에서 나와 목진한테 다가간 구유, 열산왕 등은 목진이 장악한 상대방의 군사들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들한테도 군사들을 인질로 삼는 일은 거의 처음 보는 일이었다.
“도대체 뭘 원하는 건가?”
첨대유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군대 하나당 운락 원단 5만 방울을 원하네. 현재, 내 수중에 군대가 세 무리나 있으니 운락 원단을 15만 방울 주면 전부 풀어주겠네.”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신각 사람은 화가 나 씩씩거리며 이를 갈았다.
반면, 멀리 떨어진 채 상황을 살피던 천현전 사람들은 목진의 처사에 무척 통쾌해했다.
“목진, 꿈 깨게. 운락 원단 15만 방울이라니, 미친 것인가?”
방의가 결국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천악주 등도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목진을 쏘아봤다. 보아하니 그들도 적잖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럼 거래는 무효가 된 건가?”
말을 마친 목진이 바로 정색하며 주먹을 꽉 쥐자 신각의 군대를 가뒀던 전의 광막이 추락했는데 산 한 채의 무게가 깃든 전의 광막이 녀석들을 으깨어버릴 것만 같았다.
목진의 공격에 신각의 군사들은 애써 반항하려 했지만 전의를 조율할 수 있는 통령이 없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녀석들은 어느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한테 닥칠 비참한 운명을 마주할 준비를 했다.
이에 천악주 등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자원을 들여가며 키운 군대를 전부 잃고 싶지 않았다.
“멈추게!”
첨대유리는 일단 목진을 멈춰 세우고 천악주 등을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할지 다들 생각이 있으리라 믿네. 만약 싸우려 한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이에 천악주 등은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목진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수중에 장악한 신각 군사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절대 목진의 공격보다 빠를 리 없어 군사들을 구해내기란 불가능했다.
“운락 원단으로 군사들부터 구해냅시다. 운락 원단은 없으면 다시 모으면 되지만 군대가 없으면 우리가 여태껏 쏟아부은 시간과 자원은 순간 물거품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네.”
염랑주가 이를 갈며 말하자 천악주와 천웅주는 주먹을 꽉 쥐며 고민하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도 휘하의 군대를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들 역시 군사들을 배양하기 위해 너무 많은 자원과 정력을 쏟아부었다.
“안 되네!”
방의가 버럭 화를 내며 외쳤다.
“우리가 얻은 운락 원단은 7만 방울밖에 안 되는데 이걸 전부 내놓으면 여태껏 뭘 한 건가? 객주한테는 뭐라고 말할 건가!”
“자네만 아니었어도 우리 군대는 목진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네. 그러니 객주한테 사죄해야 할 사람은 자네고 우리는 아무런 잘못도 없네!”
천악주의 말에 방의는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목진, 우리한테 운락 원단 15만 방울은 없네. 대신, 군대당 2만 방울로 쳐서 운락 원단을 6만 방울 정도는 줄 수 있네. 괜찮으면 사람을 풀어주고 안 되면 나와 제대로 싸워보지. 대라천역에서 우리를 전부 쓰러뜨릴 수 있을지 한번 봅시다!”
“운락 원단 6만 방울이라…….”
첨대유리의 말에 목진은 씨익 웃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첨대 낭자는 통쾌하군. 그럼 당신을 친구로 여기고 운락 원단 6만 방울로 사람들을 풀어주겠네.”
목진은 운락 원단의 수를 너무 많이 불러 이를 전부 받아낼 거라 여기지 않았다. 6만 방울도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또한, 이것으로 방의는 첨대유리한테 빚을 졌으니 천악주 등은 그녀에게 더 고마워할 것이다.
“난 자네처럼 탐욕스러운 친구를 둔 적 없네.”
목진의 뜻을 바로 알아챈 첨대유리는 바로 눈을 깜빡이며 피식 웃었다. 소녀의 뛰어난 연기력에 목진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첨대유리가 천악주 등을 바라보자 저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기이한 파동을 내뿜는 옥병을 각자 한 병씩 내놓았다.
이는 이들이 얻은 운락 원단 전부였다.
잇따라 첨대유리가 옥병들을 건네자 목진은 이를 구유한테 넘겨 확인한 뒤에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네.”
이에 첨대유리는 무뚝뚝하게 앉아있기만 했고 천악주 등은 당장 목진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제 사람들을 풀어주겠나?”
첨대유리의 한기 가득한 말에 목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각 군사들을 묶어뒀던 전의의 광막을 거뒀다. 녀석들은 난민처럼 진형조차 신경 쓰지 않고 황급히 도망갔다.
그들은 천악주 등이 지극히 아끼는 전사들이지만 목진한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첨대유리 같은 전의의 천재가 장악하지 않는 이상, 그냥 일반 군대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첨대유리가 이미 목진과 몰래 손을 잡은 이상, 군사들을 풀어줬다가 되려 해를 입을 거란 우려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편, 신각의 군대는 이번 일로 큰 타격을 입어 들끓었던 전의가 확 사그라졌고 이에 천악주 등은 너무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각의 군대를 풀어준 목진은 다시 멀리 떨어진 유염 등한테 눈길을 돌렸다. 신각의 비참한 처지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목진이 똑같은 수법으로 천현전을 상대할까 봐 두려웠다.
목진은 천현전의 군대는 물론, 전의 천재까지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 소전주, 천현전 사람들은 우리가 사망의 유적지에서 무사히 나간 뒤에 돌려줘도 되겠나?”
목진이 상냥하게 웃으며 건네 말에 유염은 멈칫하더니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이 신각에 대한 태도에 잔뜩 겁먹었던 유염은 소년이 천현전을 후대하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진은 유염을 몰아붙이지 않으려고 이리 한 것이었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너무 몰아붙였다가 유염이 소천과 천현부를 버리고 신각과 손을 잡으면 큰일이었다.
하여 목진은 일부러 신각과 천현전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 것이다. 이리하면 유염은 목숨을 걸고 덤비지 않을 것이고, 신각은 천현전에서 아무런 손해도 없이 풀려난 것이 언짢아 협력하려는 생각이 줄어들 거라 최상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구유와 열산왕 등은 목진이 신각과 천현전 사이를 손쉽게 갈라놓은 것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진은 정말 대단했고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하하,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겠네.”
목진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구유 등과 함께 떠났고 천현전과 신각 사람들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러한 결과에 이내 감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멸의 위기에 처했던 대라천역이 목진의 등장으로 대역전을 할 줄 몰랐다.
일부 강자들은 이번 대수렵전을 계기로 목진이 북계를 뒤흔들 엄청난 인재로 거듭날 거라고 생각했다.
* * *
사망의 유적지 밖에는 여전히 세력들이 적잖게 머물러있었고 아직도 이곳으로 향하는 세력도 있었다. 다들 1급 유적지에서 뭐라도 얻을 수 있나 궁금해서 온 모양이었다.
슉!
다들 사망의 유적지에 들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격렬한 파동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규모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저건 대라천역 사람들이네. 보아하니 사망의 유적지의 보물은 저들이 차지했겠군.”
사망의 유적지 밖에 있던 사람들은 질투로 가득 찬 눈으로 대라천역 사람들을 쳐다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다들 대라천역이 확보한 운락 원단을 빼앗고 싶었지만 엄청난 실력에 감히 덤비지 못했다.
한편, 목진은 대라천역 무리의 최전방에 서서 사망의 유적지 외부를 쓰윽 훑더니 뒤따르는 천현전과 신각 사람들을 힐끗 쳐다봤다.
“사람들을 풀어줄 거야?”
구유가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저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유염은 폭주할지도 몰라.”
목진은 가볍게 웃으며 옷깃을 휘날렸는데 웅장한 전의가 휘몰아쳐 현천부를 사정없이 내던졌다.
슈슉!
전의가 폭발하자 처량한 비명이 들리더니 현천부 전사들이 맥없이 추락했다.
잇따라 목진이 다시 옷깃을 휘날리자 웅장한 전의가 혼절한 소천을 둘러싸고 빠르게 서북쪽으로 향했고 전의가 완전히 사라지자 소천은 이미 수백 리 밖에 버려져 있었다.
“이만 갑시다!”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목진은 바로 대라천역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곳을 떠났고 그 뒤로 천현전과 신각 사람들이 사망의 유적지에서 나왔다. 유염은 애처롭게 울부짖는 현천부와 멀리 버려진 소천을 확인하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당장 현천부와 소천을 구하라!”
유염이 이를 갈며 말했다. 목진의 교활한 수법에 놀란 천현전은 사람을 구하기에도 바빠 대라천역을 쫓아갈 여력이 없었다.
한편, 신각 사람들도 잔뜩 풀이 죽었고 방의, 천악주 등의 안색도 여간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대라천역은 사망의 유적지의 최대 수익자가 되었고 이번 일이 알려지면 신각은 대수렵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저들을 이대로 풀어줄 수는 없네! 우리 지원군이 곧 도착할 테니 일단 저들의 앞길을 막으면 분명 빼앗겼던 운락 원단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네!”
그런데 천악주 등은 방의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고 첨대유리한테 눈길을 돌렸다. 그들은 첨대유리의 말을 따르려는 것 같았다.
이에 첨대유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지원군이 곧 도착하는 게 사실이긴 하지만 저들이 지원군이 없단 보장이 있나? 또한, 내가 다쳐 유리군의 전의를 모조리 끌어올릴 수 없고 군사들도 막 목진의 손에서 풀려나 사기가 저하된 터라 전의를 끌어모으기 힘들 텐데 무슨 수로 저들의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천악주 등은 첨대유리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첨대유리의 말대로 신각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천현전도 제 코가 석 자라 협력한다고 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럼 이대로 저들을 풀어준단 말인가?”
방의가 씩씩거리며 물었다.
“너무 급할 건 없네. 대수렵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번 일은 그냥 실수였을 뿐이네. 그리고 우리가 사망의 유적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지 않나? 적어도 나도 계승을 얻었으니 말이야.”
첨대유리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면 진정한 전진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 그때가 되면 내가 나서서 목진을 상대할 것이네.”
첨대유리의 말에 천악주 등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정녕 전진사가 될 수 있겠는가?”
대천세계에는 전진사가 워낙 적은 대신 그 위력이 엄청나 첨대유리가 정말 전진사가 될 수만 있다면 신각은 전략적 무기를 확보한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위엄은 신각 각주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허허, 첨대 통령은 역시 대단하군. 북계의 첫 번째 전진사가 신각 사람이라니, 첨대 통령은 이번 대수렵전을 통해 이름을 널리 알릴 것이네.”
천악주 등은 전보다 훨씬 정성을 담아 아부를 떨었다.
첨대유리가 전진사가 되면 신각에서의 지위가 확 오를 것이고 그때가 되면 방의마저 그녀한테 꼼짝 못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는 그녀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옆에 서 있던 방의도 흠칫하더니 첨대유리에 대한 언짢은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는 여태껏 영력 실력이 첨대유리보다 뛰어나다는 점만으로 으쓱했는데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신각에서는 첨대유리가 군사를 더 잘 장악하도록 방대한 자원으로 겨우 4급 지존경으로 만들었는데 마침내 그 결실을 보았으니, 정말 전진사가 된다면 첨대유리의 지위는 부쩍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