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주재-577화 (576/1,000)

577화. 드디어 나타난 천취황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격렬하게 진동하는 해골 산맥의 위쪽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낸 연로한 사내를 쳐다봤다. 그는 대라천역 3황 중 하나인 천취황이었다.

운락 전장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최정예 강자들이 이곳에서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걸까?

목진, 수라왕, 구유 등은 갑자기 나타난 천취황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취황이 있는 한 유명궁은 감히 그들에게 덤비지 못할 것이다.

“노인네가 참 지칠 줄도 모르는군.”

명화 노인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하자 천취황은 가볍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오늘 일은 이대로 마무리 지읍시다.”

“이대로 마무리 짓다니?”

명화 노인은 음산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대라천역에서 유명궁의 유일한 전진사를 죽여놓고 쉽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나?”

“그 아이는 자네가 죽이지 않았나? 대신 운락 원단 40만 알은 받지 않겠네.”

천취황은 아무렇지 않게 운락 원단 40만 알이 걸린 내기를 없던 일로 했다. 지지존의 밀장을 발견한 지금, 명화 노인한테서 운락 원단을 받아내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명화 노인은 살기를 품은 채 목진을 노려봤다.

이에 목진은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순간 독사 같은 명화 노인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8급 지존이 기어코 목진을 죽이려 하면 아무리 천취왕이라도 쉽게 목진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천취황이 아무렇지 않게 7급 지존인 천사왕을 제압한 것만 봐도 8급 지존과 7급 지존의 차이는 엄청났다.

“허허, 명화, 되지도 않는 생각은 접게. 자네가 나서면 난 바로 천사왕을 죽일 것이네.”

명화 노인이 나서려 하자 천취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유명궁에 득이 될 건 전혀 없네.”

천취황의 말에 명화 노인은 목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결국 포기했다. 천취황 말대로 제아무리 잽싸게 목진을 죽인다고 해도 유명궁 역시 한 명의 7급 지존을 잃을 것이다.

그건 임명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해였다.

“오늘은 대라천역이 승리한 것으로 하지. 대신, 너무 좋아하지는 말게. 궁주께서 오늘 일을 아시면 결코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명화 노인은 씨익 웃으며 바로 유명궁 무리로 돌아갔고 천취황도 빙하왕과 함께 대라천역 무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8급 지존급 정예 강자라 꼼수 따위는 부리지 않았다. 그들이 마음먹고 나서면 휘하의 강자들도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취황 대인!”

왕들은 천취황을 보고 바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전진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 대라천역에도 드디어 전진사가 생겼구나.”

천취황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운락 원단 수집 상황은 어떠하냐?”

천취황은 바로 제일 중요한 문제를 꺼내 물었다.

“현재, 대라천역은 운락 원단을 43만 알을 확보하였습니다.”

“43만이나 된단 말이냐?”

수라왕의 말에 천취황은 흠칫하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법이구나. 지난번보다 훨씬 많이 수집했구나. 이번에 발견한 지지존 밀장이 조금 특이하여 운락 원단의 양이 부족할까 봐 걱정하였는데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구나.”

“목왕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많은 양의 운락 원단을 수집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때 열산왕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그는 목진의 공적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43만 알 중 대부분은 목왕 등이 획득한 거예요.”

수라왕도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있는 그대로 말했다.

이에 천취황은 조금 놀란 듯 목진을 힐끗 쳐다봤다. 그는 수라왕, 열산왕 같은 사람들마저 나서서 칭찬할 만큼 목진이 대수렵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을 줄은 몰랐다.

“열산왕이 말한 것처럼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왕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혼자서는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목진은 열산왕의 말에 조금 놀랐지만 우쭐거리지 않고 겸손하게 말했다.

“허허, 역주와 구유가 사람을 제대로 봤구나.”

천취황은 목진의 겸손한 태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목진한테 얼굴을 붉히지 않은 것은 구유와 역주 때문이었는데 지금에서야 소년의 매력과 능력을 알 것 같았다.

목진은 얼마 안 되는 시간에 대라천역의 가장 평범한 통령에서 이 자리까지 왔으니, 그 엄청난 진보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목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편, 구유는 목진이 대라천역 사람들의 인정을 받자 미소를 지었다.

“천취황님, 역주께서 지지존의 밀장을 찾으셨다고 했나요?”

구유의 말에 다른 왕들도 바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지금까지 지지존 밀장을 열기 위해 고생한 것인데 정작 지지존 밀장을 찾는 건 실력이 안 돼 역주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

“찾긴 찾았는데 문제가…….”

천취황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문제라니요?”

목진 등이 흠칫하여 물었다.

“운락 전장의 깊숙한 곳에 상당히 난폭한 영력 돌풍이 휘몰아쳐 제아무리 지지존이라도 항상 긴장하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단다. 하여 조심스럽게 탐색한 결과, 몇 차례의 실패를 거쳐 드디어 지지존의 밀장을 발견했는데 그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하더구나.”

천취황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지지존 밀장의 규모가 너무 커 다른 정예 세력들도 이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게 문제다.”

천취황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고 목진 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지존 여러 명이 지지존 밀장 주위를 맴돌며 눈치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러다 저들이 싸우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하늘이 무너질 것이다. 목진과 임명의 대결은 지지존들의 싸움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어떡할까요?”

“일단 운락 전장의 깊숙한 곳으로 가야지. 우린 절대 어렵게 발견한 지지존 밀장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다. 그 정도 규모를 갖췄다면 밀장의 주인은 생전에 엄청난 실력을 지녔을 것이다. 그가 남긴 영신액을 얻으면 역주께서 상위 지지존이 될 수도 있단다. 대신, 신각 각주와 유명궁 궁주가 영신액을 얻게 되면 대라천역에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겠지.”

구유의 질문에 천취황은 정색하며 답했다.

이에 다들 동의하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비록 상위 지지존과 하위 지지존의 차이는 모르지만 천취황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영신액의 행방에 대라천역의 운명이 달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천취황은 대라천역 사람들과 함께 바로 떠나려다 갑자기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주위 공간이 일그러지다가 지극히 강력한 위압감을 내뿜는 정예 강자 여러 명이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한편, 요문, 천현전 등 정예 세력들은 이내 화색이 되었다. 천지를 떨리게 할 만큼 강력한 위압감을 형성한 사람들은 각 정예 세력의 정예 강자들이었다.

지지존의 밀장을 발견해 각 정예 세력의 정예 강자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휘하의 인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들, 제법 빠르군.”

천취황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더니 손을 가볍게 휘둘렀는데 체내에서 내뿜은 웅장한 영광으로 순식간에 수만 장 정도의 광막을 형성해 대라천역 사람들을 전부 휘감았다.

“이만 가자꾸나.”

천취황이 움직이자 방대하기 그지없는 광막은 대라천역 사람들을 휘감은 채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잠시 후, 기타 정예 세력들도 준비를 마치고 떠나자 나머지 세력들은 몰래 한숨을 쉬었다. 대수렵전은 지금부터가 중요했는데 지지존이 없는 세력은 지지존 밀장의 쟁탈전에 끼어들 자격조차 없었다.

그러나 대수렵전이 끝나면 북계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정예 세력 중 사라질 세력은 또 얼마나 될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운락 전장의 깊숙한 곳은 난폭하기 그지없는 곳으로 하늘은 늘 흐렸고 무서운 영력 돌풍이 휘몰아치곤 했다. 게다가 영력 돌풍이 휘몰아치면 주위 산맥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런데 그 엄청난 힘을 버텨내는 존재가 있었으니, 순수한 한철로 이뤄진 검은색 산맥은 8급 지존의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또한, 만 장 깊숙이 파인 대지에는 거대한 흑룡이 누워있는 것처럼 음산한 기운을 풍겼고 불어오는 바람은 귀신의 처량한 울음소리처럼 들렸으며 그림자 같은 것이 떠다니곤 했다.

그건 이곳에서 별세한 강자들의 신백들로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운락 전장의 특이한 힘을 흡수해 생전의 실력 중 일부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공격성까지 갖고 있어 함부로 가까이했다가는 무차별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곳은 사역처럼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슉.

그런데 오늘,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빛줄기들이 몰려왔다. 바로 천취황과 함께 떠난 대라천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천취황과 함께 있었지만 잔뜩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감히 높이 날지 못하고 최대한 지면과 가까이했으며 일정 간격으로 노선을 바꿔가며 영력 돌풍이 휘몰아치는 구역을 피했다.

운락 전장의 깊숙한 곳의 영력 돌풍의 위력은 외부의 백 배를 훌쩍 넘어 일단 휩쓸리면 대라천역이 전멸하는 것도 순식간일 것이다.

천취황도 그 정도 위력의 영력 돌풍에서는 겨우 혼자 살아남을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다만, 제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모든 영력 돌풍을 피할 수는 없는지라 천취황은 일단 영력 돌풍을 발견하면 바로 대라천역 사람들을 거느리고 커다란 검은색 산맥으로 숨어들었다.

위잉.

목진 등은 동굴 앞에 서서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흐릿한 영력 돌풍에 주위 공간이 일그러진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영력 돌풍의 위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들은 혹시라도 빨려 들어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역주가 지지존의 밀장을 찾으며 안전한 노선을 알아냈으니 다행이지. 무턱대고 진입했다면 우리는 지금쯤 전멸했을지도 모르네.”

구유가 감탄하며 말했다.

운락 전장에서 수많은 싸움을 펼치며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자칫 잘못해 영력 돌풍에 휩쓸리면 여태껏 한 노력이 수포가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에 목진도 동의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취황께서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신중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외부를 살펴보았다. 의식의 힘이 강해져서인지 오감도 훨씬 예민해졌는데 주위에서 지극히 은밀한 파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속에 상당히 위험한 냄새가 깃들어 있어 목진은 감히 깊숙이 파고들지 못했다. 그러다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라도 닥치면 동굴에 숨은 사람들 모두 무사히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원고 시기, 역외 사족이 대천세계를 침략했을 때 이곳은 큰 전장이었단다. 고적에 적힌 정보에 따르면 여기서 지지존급 강자가 10명도 넘게 죽었다더구나. 이는 심지어 역외 사족의 지지존급 강자를 제외한 숫자란다.”

뒤에 서 있던 천취황이 미소를 지으며 한 말에 목진 등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북계의 모든 최정예 강자를 한자리에 모아도 열 명이 채 안 되었고, 그 전쟁으로 대천세계가 휩쓸렸으니 전쟁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