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부적을 녹이다
“천취황 대인, 언제쯤이면 역주님께서 발견한 지지존의 유적지에 도착할까요?”
수라왕이 천취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정도 속도라면 이틀 뒤에 도착할 거다.”
천취황 혼자였으면 훨씬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군사들과 함께라 시간이 더 걸렸다.
“길에서 이상한 공간 파동을 발견한다고 해도 감히 건드리지는 말거라. 이곳에서 별세한 강자가 너무 많은 데다가 그중 일부는 죽기 전, 자신을 찢어진 공간에 숨겼단다. 운락 전장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이들은 육신을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생전의 실력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어 일단 깨어나면 물불 안 가리고 미친 듯이 공격할 것이다.”
“일전에 나와 영동황은 밀장을 찾다가 누군가를 깨운 적이 있는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나서서야 겨우 그를 물리쳤단다.”
“네!”
천취황의 말에 다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천취황과 영동황이 함께 나섰는데도 겨우 살아남을 정도였다니. 그들이 발견한 이는 생전에 적어도 9급 지존이나 지지존의 실력이었을 것이다. 운락 전장의 깊숙한 곳은 역시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 * *
대라천역 사람들은 영력 돌풍이 완전히 가신 뒤에 다시 떠났는데 그렇다고 순조로웠던 건 아니었다. 천취황이 없었다면 대라천역 무리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목진 등의 전진 속도는 느렸지만 큰 손실 없이 이틀 만에 검은색 산맥이 가득한 곳에서 벗어났다.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영력 돌풍이 완전히 사라져 주위는 유난히 조용했다.
그런데 목진 등은 눈앞의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 앞쪽 공간이 무서운 힘으로 부서지고 검은색 균열이 잔뜩 생겨 악마의 입처럼 쩍 벌린 것이 상당히 무서워 보였다.
그들은 미세하게 빛나는 검은색 균열 사이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검은색 금자탑을 발견했다.
검은색 금자탑에 비하면 목진 등은 먼지처럼 하찮아 보였고 그 엄청난 위압감에 다들 머리가 지끈거렸다.
“검은색 금자탑이 바로 우리가 발견한 지지존 밀장이란다.”
천취황은 앞쪽 부서진 공간을 바라보더니 감탄하며 말했다.
“이곳은 원고 시기, 무서운 영력 파동으로 인해 찢어진 것 같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여기서 상위 지지존이 돌아가셨을 것이다.”
“상위 지지존이라…….”
목진 등은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대라천역의 역주인 만다라도 기껏해야 하위 지지존이고 이는 상위 지지존과 천지 차이이며 북계 전체를 통틀어 봐도 그 정도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북계의 정예 세력들이 여태껏 공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드디어 왔구나.”
그때 목진 등의 앞쪽 공간이 파르르 떨리더니 앳된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나타났다. 앞장선 사람은 대라천역의 역주 만다라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수황과 영동황이었다.
“역주님을 뵙습니다.”
만다라가 나타나자 왕들은 황급히 인사를 올렸고, 뒤쪽에 서 있던 군사들도 덩달아 무릎을 굽혔다.
“전진사가 됐어?”
만다라가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황금빛 눈동자를 굴리며 목진을 보고 흠칫 놀랐다.
“허허, 목진은 전진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궁의 전진사도 죽였다고 봐야죠. 목진은 이번 대수렵전에서 큰 공을 세웠답니다.”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천취황이 웃으며 목진의 활약에 대해 말했다.
“정녕 그렇단 말인가?”
천취황의 말에 만다라, 수황, 영동황은 흠칫 놀랐다. 그들은 대라천역의 왕 중 실력이 최하위인 목진이 이번 대수렵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운락 원단은 충분하겠구나.”
만다라는 목진의 활약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0만 알도 넘게 확보했습니다.”
말을 마친 천취황은 바로 만다라에게 운락 원단이 담긴 개자탁을 전해주었다.
이에 만다라는 그 속에 깃든 운락 원단의 양을 확인하더니 환하게 웃으며 앞쪽에 있는 검은색 균열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슬슬 봉인을 뚫어볼까?”
목진 등은 만다라의 시선에 따라 앞쪽을 쳐다보고는 그제야 검은색 균열에 오래된 부적이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방어막처럼 부서진 공간을 봉인하고 있었다.
“뭐지?”
오래된 부적을 쳐다보던 목진은 운락 전장에서 우연히 획득한 영라반이 갑자기 뜨거워진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소청운 선배는 영라반으로 원고 천궁의 네 번째 궁주의 유적지를 찾아낼 수 있다고 했는데 물건의 반응으로 보아 부서진 공간 속 검은색 금자탑이 원고 천궁의 네 번째 전주의 물건인 듯했다.
영라반의 반응에 목진은 이내 화색이 되었다. 만약 검은색 금자탑이 정말 원고 천궁의 네 번째 전주의 물건이라면 목진은 그 속에서 원고 천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그래?”
목진의 반응에 만다라가 바로 물었다.
“원고 천궁의 네 번째 전주라니!”
목진이 이실직고하자 천취황 등은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네 번째 전주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원고 천궁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원고 시기, 천라대륙의 패주가 바로 원고 천궁으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사람들은 지금도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하는 유적을 찾고자 애를 쓰고 있었다.
이에 목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다라를 봤다. 소녀는 잠시 넋 놓고 서 있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번째 전주라…… 나도 고적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가 이곳 운락 전장에서 별세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여기일 줄은 몰랐어. 그는 탄천사제(吞天邪帝)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고 들었는데…….”
“탄천사제라…….”
목진 등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역외 사족의 엄청난 강자로 상위 지지존에 이르는 실력자였고 천라대륙을 침범한 통령 중 한 사람이기도 했어.”
만다라는 말을 마치더니 황금빛 눈동자를 굴리며 부서진 공간의 깊숙한 곳의 검은색 금자탑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색했다.
“저것이 네 번째 전주의 물건이라면 영신액의 위력은 어마어마할 거야. 그러니 이걸 절대 신각 등 다른 세력한테 빼앗기면 안 돼. 그러다 저들 중 누군가가 상위 지지존이 되면 대라천역에 큰 화가 닥칠 거야.”
이에 목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위를 살폈다.
“다른 정예 세력들도 이 유적지를 탐내고 있다더니 왜 보이지 않는 거야?”
“부서진 공간은 상당히 커서 다들 다른 곳에 멀리 떨어져 있어. 그리고 이곳은 입구가 없어 운락 원단만 충분하면 누구든 어디서든 들어갈 수 있지.”
만다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입구는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 누구도 이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지.”
목진은 흠칫하더니 바로 만다라의 말이 이해되었다. 그리하면 운락 원단을 절약해서 좋지만 이는 절대 정예 세력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저들은 더 고생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다른 세력에 득이 될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운락 원단의 수가 부족하면 제아무리 정예 세력이라도 지지존 밀장에 들어갈 수 없고 경쟁자가 하나라도 줄어드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거였다.
역시 믿을 건 자신밖에 없었다.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은 지지존 밀장을 얻을 자격이 아예 없었다.
“지지존의 밀장은 위험천만해서 왕들까지만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이곳에서 대기하거라.”
만다라는 뒤쪽에 서 있는 군사들을 쓰윽 훑으며 말했다. 지지존 밀장처럼 위험한 곳에 대규모 군대가 들어가면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될 수 있었다. 잘못 움직여 무언가를 건드렸다가 걷잡을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천취황 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군사들을 전부 소집했다. 왕들이 없어 외부의 공격을 받을까 걱정되었는데 사실,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었다.
“군대를 거느릴 수 없으니 목왕이 안 됐군.”
열산왕 등은 아쉬워하며 말했다. 전진사인 목진 곁에 군사가 없으면 전투력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전의가 좋긴 하나 너무 의존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것이네. 그리고 난 전의만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니네.”
목진이 괜히 센 척하려고 이리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자기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었다. 목진은 전의의 힘이 날개가 되는 것은 인정했지만 타인의 힘보다는 스스로 수련해 얻은 힘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절대적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목진은 자신에게 전의를 다스리는 재능을 발견했을 때 조금 놀랐을 뿐, 다른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야 전의의 힘을 잃어도 자신의 실력으로 모든 걸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한편, 열산왕 등은 목진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흠칫하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전의처럼 강력한 힘을 장악했음에도 겸손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들이었다면 목진처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열산왕 등은 그제야 목진이 짧은 시간에 대라천역에서 엄청난 성장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 한번 잘했어. 진정한 강자는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다스리는 거야!”
만다라가 감탄하며 말했고 수황마저 눈을 비스듬히 뜨고 목진을 쳐다봤다. 그도 목진의 태도에 놀란 모양이었다.
정작 목진은 만다라의 칭찬에 괜히 머쓱하여 어깨를 들썩였다. 그는 전의의 힘에 과하게 의지하지 말자고 생각할 뿐이었다. 언젠가 군대가 곁에 없으면 보통 사람이나 다름없어질 텐데 그러다 천적이라도 만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이만 떠날까?”
만다라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을 들더니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고 3황과 목진도 그 뒤를 따랐다.
대라천역의 정예들이 총출동하자 진영은 상당히 화려했는데 그들이 지지존 밀장에서 사고라도 당하면 대라천역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잠시 후, 목진 등은 만다라를 따라 부서진 공간으로 다가갔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검은색 균열에서 무서운 위압감이 느껴졌다.
검은색 균열은 부단히 꿈틀거렸고 오래된 부적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암홍색 광막을 만들어 균열을 가렸다. 목진 등은 그중 한 갈래의 균열 앞에 멈춰 섰는데 그 속에서 내뿜는 위압감에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이는 만다라도 마찬가지였다. 만다라는 이곳 유적지를 발견하자마자 지지존의 힘으로 강제로 부적을 없애려 했는데 보다시피 실패했다.
운락 전장에는 죽은 강자들이 너무 많았고 그중에는 만다라보다 강한 사람도 적잖게 존재했다. 그들의 죽음으로 운락 전장에 특이하고 강대한 힘이 부여됐지만, 이는 직접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호령처럼 여기서 죽은 강자들이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운락 전장의 규칙으로 아무리 만다라라도 절대 이 규칙을 깰 수 없었다.
그때 만다라가 개자탁을 꺼내 열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홍류가 나타났다. 그건 커다란 이무기처럼 만다라의 앞쪽에서 헤엄쳤는데 그 속에 운락 원단이 깃들었고 적어도 십만 알 정도 되었다.
대량의 운락 원단이 나타나자 그윽한 향기가 주위에 퍼졌는데 목진 등은 그 향기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운락 원단 십만 알에 깃든 영력은 지존영액 백만 방울보다 많아 5급 지존이 이를 제련해 흡수한다면 영력 수련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만다라는 대수롭지 않게 운락 원단을 쳐다보더니 두 손을 모아 가볍게 비틀었다. 이에 운락 원단이 이룬 홍류가 폭발하더니 강력한 힘으로 인해 다시 한데 모여 압축되었다.
그러다 빠르게 작아지던 홍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진득한 액체로 변했고 액체가 지나간 곳은 공간마저 일그러졌다. 얼마 안 돼 보이는 액체는 산 한 채보다 무거웠다.
놀라운 광경에 목진 등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이 운락 원단 십만 방울을 제련했다면 몇 개월은 걸렸을 텐데 만다라는 대충 손을 비틀고 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지지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잇따라 만다라가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을 튕기자 진득한 액체가 공간 균열을 메운 오래된 부적으로 향했다.
치익.
진득한 액체에 닿은 부적은 파르르 떨리더니 안개가 피어오르며 조금씩 어두워지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엄청난 위압감을 내뿜던 오래된 봉인부적은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운락 원단에 의해 완전히 녹아내렸다.
이렇게 지지존 밀장을 향한 대문이 드디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