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천작 장로
목진은 구유궁 깊숙한 곳의 한 전각 꼭대기에 서서 구유궁 외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빛줄기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으로 보아 구유궁은 상당히 바쁜 듯했다.
그렇다고 목진이 모든 일을 당빙한테 떠넘긴 것은 아니었다.
다들 고분고분 구유궁의 휘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목진은 구유위를 거느리고 직접 찾아가 장애물을 모조리 없애야 했다. 하여 대수렵전이란 잔혹한 전쟁을 치르고도 목진은 쉬지 못했다.
다행히 몇 번의 전쟁 후, 더이상 소란을 피우는 이들은 없었고 앞으로 큰 문제만 없으면 구유궁이 성장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참 많은 일이 있었군…….”
목진은 전각 꼭대기에 서서 기세등등해진 구유궁을 보며 감탄했다. 그가 대라천역에 막 왔을 때만 해도 구유궁은 곧 해체될 처지였는데 2년이란 짧은 시간 내에 어느새 이만큼 성장했다.
“그러게 말이야…… 이건 다 네 덕분이야.”
그때 목진의 뒤편에서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구유가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구유는 목진의 곁에 서더니 먼 곳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짧은 시간에 네가 이렇게까지 많이 성장할 줄은 몰랐어.”
2년 전, 목진은 지존법신도 없이 대라천역에 왔었는데 지금은 북계 젊은이 중 제일이 되었으니, 이 엄청난 성장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건 다 네 덕분이야, 구유야.”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구유가 그를 데리고 대라천역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대천세계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구유는 가볍게 웃었는데 목진은 왠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
“구유족에서 소식을 전해왔는데 닷새 후, 천작 장로(天雀長老)께서 날 데리러 대라천역에 오신대.”
구유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한 말에 목진은 흠칫했다.
구유족에서 드디어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닷새가 지나 구유족 사람들이 대라천에 도착했다.
대라천, 영객전(迎客殿).
구유족은 대천세계 영수 종족 중 역사가 유구한 거대 종족이라 만다라마저 수련을 중단하고 천작 장로를 직접 맞이하러 나섰다.
만다라는 영객전 앞에 뒷짐을 쥔 채 서 있었고 그 뒤에 3황과 목진, 구유가 서 있었다. 목진은 구유가 왠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구유족 사람의 태도를 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걱정 말거라. 구유족이 강하긴 하나 대라천역도 절대 호락호락하진 않단다. 그러니 저들이 감히 내가 보는 앞에서 너나 목진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만다라가 구유와 목진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녀는 구유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구유와 목진은 혈맥을 연결한 사이로 생사를 함께하기로 계약을 맺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죽으면 나머지 한 사람도 죽을 것이다.
이러한 혈맥 연결은 영수 종족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대부분은 혈맥이 고귀한 영수들끼리 서로 이득을 보기 위해 연결하곤 했다.
또한, 특수한 혈맥을 가진 영수 종족은 인간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동급 영수의 전투력이 인간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재능은 타고난 것이고 육신도 인간보다 훨씬 강했다.
그들이 보기에 인간은 더없이 연약한 존재라 진정한 강자가 되기 전에 죽기 십상이었다. 하여 대부분은 인간과 혈맥을 연결하는 걸 극도로 배척했다. 그들은 인간과의 혈맥 연결을 순수한 영수의 혈맥을 더럽히는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고 전혀 득 볼 게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게다가 보수적인 영수 종족에서는 인간과 혈맥을 연결한 영수를 반역으로 여기고 온몸의 혈맥을 뽑아버린 뒤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구유는 이러한 이유로 여태껏 수심에 찼던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구유족 족장으로 구유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고 천부적인 재능도 뛰어나 종족에서 그녀를 어찌할 사람은 없겠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구유는 만다라의 말을 듣고 조금이나마 안심되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때 커다란 보라색 새가 대전 위로 날아오더니 빛줄기 몇 갈래가 만다라 앞쪽에 내려앉았다.
“허허, 난 구유족 장로 천작이네. 오늘 폐를 끼쳐야 할 것 같은데 미리 양해를 구하네, 대라 역주.”
창로한 웃음소리와 함께 놀라운 영력 위압감이 휘몰아쳤고 숨 막히는 압박감이 형성되었다.
빛이 가시자 영객전 앞쪽에 한 무리가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는 운작을 수놓은 청색 도포를 입은 노인으로 가벼운 손짓 하나만으로도 강력한 압박감을 형성했다.
일전의 놀라운 영력 위압 역시 노인이 형성한 것이었다.
노인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 중, 청색 도포를 입은 늘씬한 청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날렵한 눈매, 얇은 입술을 가진 훤칠한 사내의 모습에 눈이 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다라 뒤에 서 있던 3황도 그 놀라운 위압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구유족의 천작 장로군. 귀빈이 왔으니 대라천역에서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하지 않겠나?”
정작 만다라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평온한 파동을 내뿜어 전자가 형성한 놀라운 위압감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숨 막혔던 분위기마저 잠잠해졌다.
만다라의 아무렇지 않은 손놀림에 청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흠칫 놀라 소녀를 흘겨보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대라 역주가 벌써 상위 지지존 돌파를 앞두고 있을 줄은 몰랐군. 머지않아 곧 경지를 돌파할 것 같은데 미리 경축드리네.”
천작 장로는 아직 하위 지지존으로 구유족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대라 역주도 자기와 같은 등급이라 만일의 경우, 싸움이라도 나면 신수의 강력한 육신으로 우세를 차지할 거라 여겼는데 상대방의 실력이 예상 밖으로 뛰어나 놀란 것이다.
구유족에서 보더라도 그녀의 실력은 상위 지지존의 최정예급 존재인데 지방 세력에 이토록 강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과찬이네, 천작 장로.”
만다라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영수의 오만함을 잘 알고 있었고 기세등등하게 등장한 이들한테서도 충분히 느꼈다. 만다라가 대수렵전을 통해 실력이 부쩍 늘지 않았다면 천작 장로는 지금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유야, 이 노인네가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렇게 숨어만 있을 거냐?”
천작 장로가 미소를 지으며 만다라의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걸어 나왔다.
천작 장로는 바로 예리한 눈빛으로 구유를 쓰윽 훑더니 이내 화색이 되었다.
“역시 구유명작이구나. 네가 드디어 이 혈맥을 각성했구나. 너는 역시 수천 년 이래, 구유족의 최강 혈맥 보유자였어.”
천작 장로의 말에 목진은 어리둥절해 천취황께 물었다.
“구유작이 구유명작이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천작 장로의 말을 들으니 구유족에서 혈맥을 각성하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인 듯했다.
“허허, 구유작은 영수일 뿐인데 진화체는 여러 가지란다. 그중에는 구유염작(九幽炎雀), 구유한작(九幽寒雀) 등이 있단다. 그런데 구유명작은 여러 가지 진화체 중 가장 희귀한 종으로 체내에 불사조 혈맥이 있어야만 가능하단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진정한 불사조로 진화할 수도 있단다. 불사조는 진정한 신수로 최정예 신수중에서도 정예급 존재란다.”
천취황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알기로 구유는 지난 천 년간, 구유족에서 구유명작이 된 유일한 구유작이란다.”
이에 목진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그는 구유가 천부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희귀한 존재인 줄은 몰랐다.
정작 구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를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만 떠날까요?”
그런데 그때, 천작 장로 뒤에 서 있던 훤칠한 청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돌아가는 걸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우리가 이리 온 것은 따로 볼 일이 있어서예요.”
“넌 누구냐?”
구유가 한기 어린 눈빛으로 청년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는 구유족 집법당(執法堂)의 집사, 유청(柳青)입니다.”
훤칠한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유청이라…….”
구유는 유청이란 이름이 왠지 모르게 낯익었다. 구유가 구유족을 떠났을 때, 유청은 종족의 젊은이 중 정예 강자였는데 지금은 집법당 집사가 돼 있었다. 구유는 그 엄청난 진보에 조금 놀랐다.
“허허, 구유야. 이 아이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말거라.”
천작 장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고 혼탁한 두 눈이 점차 예리해졌다.
“넌 천년 이래, 구유족에서 혈맥이 가장 뛰어나 명패를 종묘에 둔 일인인데 일전에 네 명패에 혼탁한 기운이 든 것을 발견했단다. 혈맥이 혼탁해진 것으로 보여 그 일을 알아보려고 이리 걸음을 한 거란다.”
구유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건 내가 중상을 입은 적이 있어서 그런 것으로 곧 사라질 거예요.”
그러나 천작 장로는 믿지 않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네가 누군가와 혈맥을 연결했다는 걸 한눈에 알아봤으니 숨길 필요 없단다. 그리고 걱정 말거라. 그게 누구든 너를 협박해 혈맥을 연결했다면 구유족에서는 절대 그 녀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넌 혈맥 연결자만 알려주면 된단다.”
천작 장로가 살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고 구유는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난 충분히 알 수 있단다. 이곳에 구유족 혈맥 냄새가 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말이야!”
천작 장로는 구유를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고, 뒤쪽에 서 있는 목진을 쏘아보며 물었다.
“내가 한 말이 정확한 것 같으냐?”
천작 장로의 우레와 같은 소리에 하늘이 부들부들 떨렸고 그의 예리한 눈은 칼을 내뿜을 듯 공간을 가르며 목진을 쏘아봤다.
목진은 상대방의 무서운 위압감과 날카로운 눈빛에 가슴이 뚫릴 것만 같았고 체내의 기혈이 솟구쳤지만 이를 억지로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봤다.
목진의 실력은 상대방보다 훨씬 뒤처졌지만, 기세만큼은 전혀 밀리지 않았다.
“흥!”
천작 장로는 5급 지존 따위가 굽신거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이 언짢아 목진을 제압하려고 기합을 넣으며 나서려 했다.
“감히 대라천역에서 싸우려 하다니, 본좌를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때, 만다라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작 장로는 무서운 위압감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고, 그 엄청난 압박에 그는 꼼짝도 못 했다.
그가 영력을 사용하면 만다라가 형성한 위압감을 떨쳐내고 목진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정말 그리하면 만다라는 분명 호된 공격을 개시해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 분명했다.
만다라는 반보 상위 지지존이라 하위 지지존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났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려는 것은 아주 멍청한 짓이었다.
이에 천작 장로가 잠시 생각하다가 진정하자 체내에서 내뿜던 무서운 위압감이 점차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