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강자들이 한자리에
구유는 상대방의 정체를 바로 알아채고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들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유청(柳清)아, 난 네가 나한테 진 것 때문에 여태껏 괴로워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 말에 목진도 고개를 들었다. 그들 앞쪽에 나타난 네 사람 중 푸른색 옷을 입은 여인이 구유와 대화를 나누었다. 늘씬한 몸매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것이 제법 예쁘게 생긴 여인이었는데 구유의 말에 눈빛이 금세 차가워졌다.
목진은 상대방의 정체를 알지 못했지만, 구유와 유청의 원한이 제법 깊은 것처럼 보였다.
“목진 오라버니, 저들은 천붕족이에요. 천붕족에서 해마다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우리 구유족과 힘을 겨루곤 했는데 유청은 과거 구유 언니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죠. 그런데 그 일을 여태껏 기억할 줄은 몰랐네요.”
묵령이 조용히 설명했다. 그녀도 유청을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천붕족이라…….”
목진은 흠칫하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붕족도 구유족 못지않은 영수 종족으로 최정예 신수인 금시대붕(金翅大鵬)의 혈맥이 깃들어 완전히 각성하면 충분히 최정예급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 본 사이에 입담이 늘었구나.”
유청은 다시 콧방귀를 뀌더니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네가 인간과 혈맥을 연결했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이야?”
그녀는 목진을 쓰윽 훑었는데 눈빛에 오만함과 무시의 뜻이 가득 담겼다.
“6급 지존이라…… 이 정도 실력밖에 안 되는 사람을 신수지원에 들이다니 많이 아끼는구나. 그런데 조심해. 저 녀석이 신수지원에서 죽기라도 하면 너도 죽을 테니 말이야.”
이에 목진은 바로 인상을 찌푸리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유청을 쳐다봤다. 그는 상대방의 말에 화가 나 주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회가 되면 반드시 제대로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유청은 목진이 나이와 달리 침착한 모습에 흠칫 놀랐다.
“괜한 걱정 같구나. 대신 지난번 대결을 되풀이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구유가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유청이 피식거리더니 옆에 서 있는 사람한테 말을 건넸다.
“종등(宗騰) 오라버니는 이미 연체탑에 도착했겠지?”
“7급 지존 중, 종등 형님의 속도를 따라갈 사람은 없어.”
녀석은 말을 마치더니 히쭉거리며 목진 등을 쳐다봤다.
“종등이라…….”
종등이란 말에 구유는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목진은 어리둥절해 몰래 묵령에게 물었다.
“종등은 누구야?”
묵령도 안색이 어두워져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종등은 천붕족 젊은이 중 가장 천부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금지대붕의 혈맥을 각성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들었어요. 그는 무려 봉황족의 천재와 싸운 적 있었는데 전혀 뒤처지지 않는 실력을 선보여 영수계에서 제법 유명해졌죠.”
목진은 그제야 유청이 이토록 우쭐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이건 다 진붕이란 뒷배를 믿고 나대는 것이었다.
구유가 조용히 서 있기만 하자 유청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 목표도 여기 있는 연체탑인 것 같은데 종등 오라버니더러 너희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할게.”
“너무 시끄럽군.”
목진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에 유청은 순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이를 갈며 그를 노려봤다.
“종등 오라버니 앞에서도 지금처럼 태연하길 바랄게!”
말을 마친 유청은 바로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가르며 폐허가 된 도성으로 향했다. 목진은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종등이라…… 목진은 녀석이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출신이 어떻게 되든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유청 등이 떠나자 목진 등도 바로 폐허가 된 도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폐허 속으로 들어가자 순간 창망한 기운이 휘몰아쳤고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웅장하기 그지없는 원고의 도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성의 건물들은 구름을 찌를 정도로 높았고 하늘에서 거대한 그림자들이 지나갔으며 주위에서는 짐승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웅장한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목진 등의 눈앞에는 다시 폐허가 된 도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전의 모습은 이곳의 잔상으로 오래 유지할 수 없어 잠시나마 전성기 때의 도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번화했던 도시가 이렇게 됐다니, 참으로 아쉽군.”
목진이 이내 감탄하며 말했다. 목진은 이렇게 웅장한 도성은 처음 보는지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라천역은 여기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곳이 신수지원의 정예 세력 중 하나라 그래.”
구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력으로만 따지면 아무리 구유족이라도 대황성을 따라가지는 못할 것이다. 전성기에 대황성의 실력이 얼마나 강대했을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강대한 세력도 파멸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없군.”
목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역외족은 대천세계에 있어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목진 등은 신속하게 방대한 도성의 중심을 향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도성의 중심에서 지극히 오래된 홍황의 파동을 느꼈다. 이건 분명 상고 연체탑이 내뿜은 파동일 것이다.
“가자!”
목진 등은 속도를 끌어올린 채 공간을 가르며 반 시진 정도 달려서야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슉!
네 사람은 파손된 누각의 정상에 내려앉자마자 앞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은 평탄한 대지로 다른 곳과 달리 균열 하나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는 대지의 중심에 있는 오래된 석탑 덕분이었다.
회흑색을 띈 석탑의 표면에는 상당히 오래된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는 사람이 새긴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형성된 것 같았고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쉬기가 어려웠다. 목진은 연체탑의 무서운 압력에 육신이 찢어질 듯 아팠다.
“저게 바로 상고 연체탑이야?”
목진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압력에 얼굴이 점차 상기되었다. 아직 연체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체내의 기혈이 비등하는 것이 느껴졌다. 목진은 당장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연체탑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일부 파손되긴 했지만 무턱대고 뛰어들었다가는 바로 잿더미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물론이고 하위 지지존급 강자라도 함부로 뛰어들지 못해.”
구유는 목진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목진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연체탑이 무서운 존재란 건 알았지만 지지존마저 함부로 뛰어들지 못하다니, 역시 원고의 물건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원고 시기, 정예 세력들이 방대한 자원을 들여 만든 연체탑이 이 정도 위력도 없었으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 제법 모였군.”
묵봉이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훑자 목진은 주위에서 느껴지는 눈빛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중, 유난히 사나운 곳을 살펴보니 폐허가 된 한 산맥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튼실해 보였고 검은색 갑옷을 입은 채 상당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선홍색 동공을 지니고 이마에는 검은색 뿌리가 난 것이 공간을 뚫을 듯 날카로워 보였다.
“저건 서마족(犀魔族)이야. 여기에 저들도 왔구나…… 서마족은 육신 수련에 능통하고 힘이 세서 맨손으로 산을 들어 올릴 수 있어. 일단 싸우면 미친 사람처럼 마구 달려들어 상대하기 정말 어려워.”
구유의 말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은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네 사람의 육신에서 강력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들은 가벼운 손짓 하나만으로도 산맥 전체를 가루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네 사람 중, 우두머리가 유난히 강해 보였다.
“저들의 수령은 아마 서마족 젊은이 중 최정예 강자인 한산(韓山)일 거야.”
구유는 녀석들의 우두머리를 쓰윽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
“한산은 7급 지존경에 이른 강자로 육신의 우세까지 더하면 전투력이 엄청나.”
구유는 어느새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전력을 다해 덤벼도 한산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목진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산은 역시 대단한 인물인 듯했다.
“서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아마 염학족(炎鶴族)일 거야. 저긴 용원족(龍猿族)…… 탄천악(吞天鱷)족…… 그야말로 장관이구나.”
옆에 서 있던 묵봉도 예상 밖으로 많아진 사람들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편, 목진은 묵봉이 말한 종족들을 보고는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오늘 이 자리에 대천세계에서 유명한 영수 종족들이 다 모였다니!
상고 연체탑에서 보상을 받으려면 혈투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목진 등은 패기 넘치는 누군가의 눈빛이 느껴져 바로 고개를 들었는데 이들과 멀리 떨어진 건물 위에 유청 등을 포함한 천붕족 5인이 서 있었다.
수장은 당연히 유청이 일전에 언급했던 천붕족의 천재인 종등일 것이다.
이에 목진은 천붕족 무리를 자세히 관찰했는데 유청의 앞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사내는 그리 튼실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뚝뚝한 표정에서 엄청난 패기가 흘러넘쳤고 주위 사람들도 잔뜩 경계하며 그를 관찰했다.
목진도 녀석한테서 위험한 파동을 읽고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녀석은 서마족 한산 못지않은 실력자였다.
그때 종등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천붕족과 구유족 젊은이 사이에서 대결을 펼쳤다고 들었어. 그땐 내가 마침 수련 중이라 참석하지 못해 구유족이 이겼겠지만 이번에는 절대 그리되지 않을 거야. 기회가 닿으면 내가 직접 너희를 상대할 테니 기다려.”
“얼마든지.”
구유도 한기 어린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을 마친 종등은 구유와 묵봉만 힐끗 보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목진과 묵령은 상대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이에 종등의 뒤에 서 있던 유청은 득의양양해 목진 등을 쳐다봤다. 꼭 구유 등한테 엄청난 재앙이 떨어진 것을 이미 보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상고 연체탑에서 제법 치열하게 싸워야겠군.”
구유도 눈길을 거두고 주위를 쓰윽 훑으며 말했다.
종등은 물론이고 이곳에 모인 다른 영수 종족의 천재들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목진도 구유의 말에 동의하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강자가 많이 모였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목진은 비록 6급 지존경 밖에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를 무시한다면 누구든 엄청난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도 천재지만 목진도 마찬가지였다.
목진은 바로 눈길을 거두고 눈을 감은 채 상고 연체탑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직은 연체탑이 열리기 전이라 다들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상고 연체탑이 열리면 사람들은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일 것이다.
그러다 반나절이 지났는데 그사이,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다들 연체탑을 호시탐탐 노릴 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런데 그때, 화염처럼 뜨거운 한 줄기 빛이 내리쬐어 마침내 석탑의 탑 끝에 적중하자 사람들은 순간 영력을 끌어올리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고 목진도 눈을 번쩍 떴다.
상고 연체탑이 드디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