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화. 안내대
빛줄기가 탑 끝을 맞히자 오래된 석탑 전체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고 그 표면에 광권이 형성되더니 지극히 무섭고 오래된 파동이 원고의 흉수가 깨어난 듯 스며져 나왔다.
사람들은 무서운 파동에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놀라웠다.
그런데 엄청난 파동은 금세 사라졌고 상고 연체탑은 드디어 열렸다.
끼이익!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석탑 주위의 지면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오래된 석대 10개가 솟아올랐다.
난해한 부적이 가득 새겨진 석대는 은은한 빛을 발했는데 그 빛은 멀리 뻗어 상고 연체탑과 석대를 연결했다.
그런데 구유를 포함해 다들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이번엔 안내대가 10개밖에 없다니…….”
“안내대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목진은 떠들썩해진 사람들을 지켜보더니 어리둥절해 물었다.
“안내대의 개수에 따라 상고 연체탑에 들어갈 인원이 정해져. 그리고 안내대 한 개에 한 사람밖에 서지 못해. 그러니까 이번에 연체탑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10명밖에 안 돼.”
구유는 당황한 듯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엔 20개나 있었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왜…….”
목진은 바로 구유의 말을 알아챘다.
안내대가 적을수록 연체탑에 들어갈 기회는 적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목진이 주위를 훑어보니 사람들은 역시나 살기를 품은 채 주위를 살폈다.
안내대의 개수를 알게 된 사람들은 오히려 더 조용해졌고 그 구역은 점차 살기로 가득 찼다.
목진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상고 연체탑에 들어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상황을 보니 이곳을 피바다로 물들이지 않고서는 절대 최후의 10명 안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안내대가 10개밖에 없으니 우리 계획도 조정해야겠어.”
구유는 묵봉 등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10개 밖에 없는 안내대 중 우리가 4개를 차지할 수는 없을 거야. 천운이 따라 정말 그리된다고 해도 그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야.”
목진, 묵봉과 묵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안내대를 하나씩 차지하면 다른 영수 종족 사람들은 분명 질투할 것이다. 게다가 협동 공격을 벌이면 결국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획을 바꿔야만 했다.
“우린 안내대를 2개만 차지할 거야. 두 사람 모두 연체탑에 들어가는 것이 먼저야.”
“두 개라…….”
목진은 금세 사색에 잠겼다. 그리되면 네 명 중 두 사람은 상고 연체탑에 들어갈 수 있을 테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건 나머지 두 사람한테 불공평했는데 그 누구도 연체탑에 들어갈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난 묵봉과 목진을 들여보내고 묵령과 함께 옆에서 도울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구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목진은 흠칫 놀랐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묵봉과 구유는 7급 지존경에 이르러 연체탑에 들어갈 확률이 더 높았는데 구유는 목진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구유는 상고 연체탑이 목진한테 정말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일부러 양보한 것이었다.
묵봉과 묵령도 흠칫했다.
“장로들이 너에게 모든 걸 결정하라고 했으니 나와 묵령은 네 결정에 무조건 따를 거야.”
묵봉이 목진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묵봉은 며칠 간의 동행을 통해 목진이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이에 구유의 제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더구나 구유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넘겨주는 거라 그가 뭐라 할 것도 없었다.
“히히, 목진 오라버니, 힘내요.”
묵령도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목진은 묵령과 묵봉한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구유는 그런 말이 필요 없었고 신수지원에서 반드시 원고의 불사조의 신혈을 구해 구유의 혈맥을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할 뿐이었다.
한편, 그곳의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누군가 정적을 깨고 나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마족의 한산이 서서히 걸어 나오더니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주위를 쓰윽 훑었다.
“다들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것 같으니 내가 선두에 서겠네!”
그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내대에 올라 살기를 내뿜었는데 멀리서 보면 꼭 상고의 코뿔소처럼 포악해 보였다.
“이 자리는 나 한산의 것이니 불만이 있으면 얼마든지 나서게!”
녀석은 안내대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들 각 종족 젊은이 중 최정예 강자들이라 한산이 아무리 엄청난 패기를 내뿜어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때 어디선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 당신이 난폭하단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이 기회를 빌려 우리 마상족과 한번 싸워보자꾸나!”
쿵!
튼실한 사내가 한산이 서 있는 안내대에 내려앉자 대지마저 격렬하게 흔들렸다. 온몸이 까맣고 피부에 특이한 무늬를 새긴 녀석은 상당히 강할 것 같았다.
한편, 녀석은 검은색 곤장을 들고 있었고 곤장이 닿지도 않았는데 바닥에는 이미 균열이 일었다.
“마상족의 천재 서곤(徐琨)이군. 저 녀석도 7급 지존경에 이르렀고 맨손으로 산 한 채를 들어 올릴 수 있다고 들었네. 마상족과 서마족의 대결이라니, 그러다 하늘이 무너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서곤의 등장에 주위가 순간 떠들썩해졌다. 모두 그의 실력이면 한산을 상대하기에 충분할 거라 여겼다.
“마상족이라…….”
한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리더니 발을 힘껏 굴러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는 엄청난 살기를 품은 채 상고의 코뿔소처럼 달려가 난폭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에 서곤도 수중의 검은색 장곤을 휘둘렀는데 공간을 부수며 한산을 때렸다.
쿵!
순간 웅장하고 난폭한 영력 충격파가 휘몰아쳤다.
이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강력한 영력을 끌어올린 채 하늘 높이 날아올라 나머지 안내대로 향했다.
“우리도 나서자!”
구유의 말에 목진 등은 둘씩 나눠 나섰는데 목진이 안내대 하나를 차지하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작 구유는 안내대의 위쪽에 서서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렸다. 보라색 화염이 휘몰아쳐 주위의 공기가 모조리 증발했고 사람들은 불사화 때문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6급 지존경 밖에 안 되는 녀석이 감히 안내대를 차지하려 하다니, 죽고 싶어 환장한 거지!”
“인간인 것 같은데 어떻게 여기 들어온 거지?”
“구유족에서 왜 저 녀석을 안내대에 앉히려는 거야?”
“흥, 여인 뒤에 숨는 녀석이라니, 무능하기는…….”
* * *
목진은 사람들의 비아냥거리는 소리에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구유가 인간 녀석을 안내대에 올리다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천붕족의 유청도 화들짝 놀라 히쭉거리며 말했다.
“구유가 무슨 생각으로 6급 지존경 밖에 안 되는 녀석을 안내대에 올린 걸까? 저 녀석이 운이 좋아 연체탑에 들어간다고 해도 큰 성과를 이루지 못할 텐데 말이야.”
“정녕 혼자서 녀석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옆에 서 있던 종등이 기세등등한 구유를 힐끗 보더니 이내 화색이 된 유청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네가 나서서 구유를 물리치면 내가 알아서 인간 녀석을 없애겠네. 우리 천붕족이 녀석의 안내대를 차지할 것이네.”
“6급 지존은 식은 죽 먹기네.”
그 옆에 서 있던 빨간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씨익 웃으며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영력을 끌어올렸는데 그 또한 7급 지존이었다!
이에 종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구유한테 달려갔고 종화(宗火)는 목진한테 다가가더니 사냥감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목진도 상대방의 눈빛을 느끼고 꼭 감았던 눈을 떴다. 그는 종화를 힐끗 보더니 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는데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영광이 안내대에 스며들었다.
종등은 안내대의 위쪽에 서서 보랏빛 화염을 온몸에 두른 구유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다가 아래쪽에 조용히 서 있는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구유족의 욕심이 대단하구나. 설마 안내대를 두 군데나 차지할 셈이야?”
이에 구유는 차가운 눈빛으로 녀석을 흘겨보며 물었다.
“뭐 어때?”
구유의 말에 종등의 눈가에 금광이 나타났고 눈빛은 점차 예리해진 것이 꼭 눈빛으로 육신을 뚫을 것만 같았다.
“죽음을 자초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군.”
종등은 옷깃을 휘날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너희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장 물러나. 그러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넌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저 녀석은 여기서 죽게 될 거야.”
“어디서 협박이야!”
정작 구유는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기만 했다. 종등은 금시대붕의 혈맥을 일부 각성해 진화에 차도가 있었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구유가 아니었다.
“과연 그럴까?”
종등이 바로 정색하며 앞으로 나서자 금광을 발하는 영력이 휘몰아쳐 그의 뒤쪽에 날개를 활짝 펼친 대붕을 이뤘다. 온몸에서 황금빛을 발하는 녀석의 몸에서 강력하고 난폭한 기운이 느껴졌다.
종등이 바로 신수 형태를 소환하자 다들 흠칫 놀랐다.
그들은 종등의 신수 형태에서 일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는 금시대붕이란 최정예 신수에서 비롯된 압박감이었다. 비록 종등은 완전히 진화하지는 못했지만 금시대붕의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구유족에서 네가 가장 완벽한 불사조의 혈맥을 지녔다고 들었는데 오늘 어디 우열을 가려볼까? 불사조의 혈맥과 금시대붕의 혈맥 중 과연 누가 더 강한지 말이야.”
종등은 구유를 쏘아보며 주먹을 꽉 쥐었는데 황금색 깃털이 나타나 금광을 발하며 황금색 거창으로 변했다.
구유도 바로 신수 형태를 소환한 종등을 보더니 이내 정색했다. 종등은 얄밉긴 해도 실력이 상당해 전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에 구유도 주먹을 꽉 쥐자 보라색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흑우장검이 수중에 나타났다. 그리고 뒤쪽에 구유명작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보라색 화염을 발하며 종등이 발산한 압박감을 모조리 물리쳤다.
두 사람의 기세등등한 대치에 웅장한 영력이 충돌해 하늘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금세 두 사람의 대결에 이끌려 눈길을 돌렸다. 과연 각자 종족의 최정예급 존재인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불사조의 혈맥을 각성한 구유일까, 금시대붕의 혈맥을 각성한 종등일까?
천붕족 사람들도 장외에서 종등과 구유의 대결을 지켜봤는데 그중 한 사람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구유는 역시 만 년 이래 구유족에서 혈맥이 가장 완벽한 사람답군. 종등 형님마저 그녀를 바로 제압할 수 없으니 말이야.”
이에 유청은 피식 웃으며 안내대를 바라봤다.
“종등 오라버니는 구유를 쓰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인간 녀석을 돕지 못하도록 잡아두는 거야. 하여 종화 오라버니가 녀석을 죽이면 그와 혈맥을 연결한 구유는 자연스레 중상을 입겠지. 종등 오라버니가 굳이 큰 힘을 들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이야.”
유청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구유 등이 안내대를 하나만 차지하려 했다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힘을 분산시키다니, 이보다 멍청한 짓은 없을 것이다.
유청은 이번 대결에서 구유 등이 분명 처참하게 패배할 거라 확신했다.
쿵!
종등과 구유는 어느새 공격을 개시했고 도천의 금광과 보라색 화염이 서로에게 향했다.
두 사람이 휘두른 창과 검이 부딪치자 경천의 영력 충격파가 휘몰아쳐 그곳 공간에 어두운 균열이 일었다.
종등과 구유는 7급 지존이고 강력한 신수 형태를 지녀 대결 또한 상당히 치열했지만 두 사람의 실력이 비슷해 승패를 가르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면 모를까…….
그러나 종등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는 구유를 잡아두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구유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때 빨간색 도포를 입은 종화가 안내대에 내려앉더니 피식 웃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목진한테 말을 건넸다.
“알아서 물러나면 목숨만은 살려줄게. 대신 한쪽 팔은 내주고 가야 할 거야.”
그러나 종화의 말에도 목진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녀석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