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2화. 검은색 석비
“저기를 봐.”
묵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오래된 광장의 중심을 가리키자 목진은 바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 검은색 석비가 놓여 있었다.
크지 않은 검은색 석비는 거대하고 오래된 광장에 비해 아주 평범해 보였다.
‘그럼 연체탑 4층의 시험이 바로 저 검은색 석비란 말인가?’
목진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저건 역비(力碑)야.”
“역비라…….”
신수지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던 목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실 4층의 규칙은 아주 간단해. 육신의 힘으로 역비를 있는 힘껏 때리면 돼.”
묵봉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역비에 놓인 청동등이 보여?”
이에 목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검은색 석비를 발견했을 때, 석비 앞에 청동등 9개가 놓여 있는 것도 발견했는데 그 청동등의 불은 꺼져 있었다.
“저건 육신의 힘을 가늠하는 표식으로 가장 좋은 성적은 청동등 9개를 전부 켜는 것인데 거의 불가능해. 9급 지존경에 이르러도 어려울 거야.”
목진은 흠칫 놀랐다. 9급 지존이 전력을 다해도 청동등 9개를 전부 켜지 못하다니, 평범해 보이는 역비가 그렇게까지 힘의 충격에 잘 견딘단 말인가?
“규칙대로라면 청동등을 6개만 켜면 5층에 오를 수 있어.”
“여섯 개라…….”
목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온전히 육신의 힘만 비교하는 거라면 그는 나머지 네 사람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또 수련을 통해 강해진 육신으로 주먹을 휘두르면 어떨지도 알고 싶었다.
옆에 서 있던 묵봉은 목진의 표정을 보더니 바로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방심하지 마. 내가 알기로 여태껏 연체탑에 들어온 사람 중 9할은 여기서 실패했어.”
이에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묵봉의 말에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청동등 6개를 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듯했다.
“4층을 통과하면 어떤 보상을 주는 거지?”
연체탑의 처음 세 개의 층은 잔혹한 환경을 통해 육신을 단련하는 효과가 있었는데, 4층에서는 청동등을 6개만 켜고 통과하면 그만일까? 어디서 어떻게 보상을 준다는 거지?
“보상은 바로 석비에 있어.”
묵봉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검은색 석비를 바라봤는데 목진은 그의 눈빛에서 갈망을 읽어냈다.
석비는 역시나 보이는 것처럼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석비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
묵봉의 질문에 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연체탑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저건 탄천신수(吞天神獸)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거야.”
“탄천신수라…….”
목진은 흠칫하더니 두 눈을 번쩍 뜨고 석비를 바라봤다. 탄천신수는 하늘과 땅이 잉태해 태어난 엄청난 신수로 그 어떤 혈맥에도 속하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희귀했다. 원고 때 빼고는 여태껏 녀석을 본 사람이 없었다.
탄천신수는 한 번의 고함으로 하늘을 삼킬 수 있어 천지존마저도 녀석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는데 평범한 석비가 고적에서나 볼 수 있었던 엄청난 존재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적잖게 놀랐다.
“너무 놀랍군.”
목진은 이내 감탄했다. 탄천신수는 진정한 용과 진정한 봉황 같은 존재마저 두려워하는 무서운 생물이었다.
“역비는 강한 힘을 받으면 탄천신수의 정기를 내뿜는데, 내뿜는 양은 힘의 강약에 달렸어. 즉 청동등이 많이 켜질수록 스며져 나오는 혈기가 많고 강해. 이것이 바로 4층을 통과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이야.”
묵봉은 한껏 상기된 눈으로 역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목진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탄천신수의 정기를 흡수한다면 육신에 얼마나 좋을까?
이건 뇌수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 묵봉이 이토록 탐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연체탑은 역시 층마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
한산, 종등, 서곤도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검은색 석비를 바라보며 조금씩 가까이 갔다.
목진은 검은색 석비에 깊이와 크기가 다른 권인과 장인이 가득 박힌 것을 발견했는데 그건 이전에 이곳에 와서 시험을 본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었다.
석비는 신수의 피와 살로 빚어진 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단단했고 까맣게 그을린 표면에서 엄청난 위압감을 방출해 혈액마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이건 탄천신수에 남아있는 기(氣)로, 조금밖에 안 되지만 목진 등은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목진은 석비에 가까워질수록 체내 영력의 흐름이 느려지다가 멈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건 꼭 무서운 역장 때문에 완전히 억제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력이 완전히 억제되었다니, 역시 여기서는 육신의 힘밖에 사용할 수 없군.”
목진은 주먹을 꽉 쥐고 체내의 영력을 끌어올리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묵봉 등의 주위에서 요동쳤던 영력도 전부 사라졌는데 그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태연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고 각자 자리에 앉아 몸 상태를 조절했다.
한 사람당 기회가 한 번뿐이라 일단 청동등을 여섯개 이상 못 켜면 바로 탈락으로 연체탑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하여 그들은 반드시 상태가 가장 좋을 때 나서 전력을 다해야 했고 그전까지는 힘을 비축해야만 했다.
그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자신의 상태를 살폈고 오래된 광장은 그들의 숨소리만 빼면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 * *
연체탑 밖도 제법 떠들썩했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광막을 바라보았다.
“저것은 바로 말로만 듣던 역비가 아닌가?”
“역비의 청동등을 여섯 개이상 켜야 5층에 오를 수 있다고 들었네…….”
“연체탑에 들어간 사람 중 대부분은 여기서 실패했다고 들었는데, 결코 쉽지 않을 걸세. 실력이 7급 지존경에 이르러도 실패할 수 있단 말이네.”
“그러게 말일세. 과연 5층에는 몇 사람이나 오를 수 있을까?”
“한산 정도면 되지 않을까?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해야겠지만 말이야. 비록 육신의 힘만 사용해야 하지만 밀법을 사용해 한순간만이라도 힘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5층에 오르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나?”
* * *
연체탑 밖은 떠들썩했는데 그 말을 들어보면 제법 그럴싸했다.
한편, 구유와 묵령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4층 광막에 비친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4층은 온전히 육신의 힘만을 겨루는 곳이라 인간인 목진한테 불리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일전의 일로 아무도 더는 그의 육신이 신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여 다들 이번 대결의 결과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때 4층 광막 속에 조용히 앉아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오래된 광장에 조용히 앉아있던 이들은 동시에 눈을 뜨더니 하나같이 피부에서 적광을 발했는데 이는 영광이 아니라 체내의 기혈이 정상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잠시 몸을 추스른 이들은 몸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렸다.
마상족의 서곤이 먼저 일어나 이글거리는 눈으로 검은색 석비를 노려보며 씨익 웃었다.
“다들 먼저 나서려 하지 않으니 내가 먼저 말로만 듣던 역비의 위력을 시험해 보겠네!”
이에 목진 등은 조용히 앉아있었다. 어차피 한 번씩밖에 기회가 없어 순서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서곤은 검은색 석비에 다가가더니 깊게 숨을 들이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쿵!
서곤이 체내에서 적광을 내뿜더니 육신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다. 이에 온몸의 근육은 철처럼 단단해졌으며 핏줄기는 불끈거렸다.
그한테서 아무런 영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체내에서 비롯된 힘은 여전히 놀라웠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결인하자 주위에 기혈의 빛이 모이더니 피부에 선홍색 무늬로 변했다. 이에 서곤은 더 포악해 보였다.
“저건 마상족의 혈문으로 혈맥을 일깨워 육신의 힘을 잠시나마 끌어올릴 수 있어.”
묵봉이 조용히 말해주었고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은 서곤의 육신이 강해진 것을 보고 왠지 부러웠다. 신수의 육신은 역시 타고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서곤은 청동등을 몇 개나 켤 수 있을까?”
그때 서곤이 발을 힘껏 구르며 날아오르자 오래된 광장 전체가 파르르 떨렸고, 그 모습은 마치 마상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이곳 천지를 부수는 것처럼 보였다.
쿵!
잇따라 서곤이 주먹을 휘두르자 적홍색 기혈의 힘이 주먹을 맴돌았는데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를 내며 권풍이 지나간 곳의 공간이 격렬하게 떨렸다. 그리고 그의 뒤쪽에 거대한 마상의 그림자가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나타났다.
퍽!
서곤의 전력을 다한 권풍은 공기를 폭발시키며 검은색 석비를 힘껏 때렸다.
순간, 검은색 석비 표면에 파문이 인 것 같았는데 정작 석비 자체는 끄떡없었다.
활활!
그 파문으로 검은색 석비의 앞쪽에 놓인 첫 번째 청동등이 켜졌다.
빨간색을 띤 화염은 기혈의 파동으로 가득 찼는데 꼭 서곤이 일전에 휘두른 권풍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슉! 슉! 슉!
잇따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청동등도 바로 켜졌는데 다섯 번째가 되니 속도가 조금 줄어들었다. 다섯 번째 청동등에는 불씨가 나타나고 한참 지나서야 활활 타올랐다.
다섯 번째 청동등도 무사히 불이 붙었다!
이에 목진은 여섯 번째 청동등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곤의 실력으로 청동등 다섯 개를 켜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기에 여섯 번째가 중요했다.
치익!
그때 여섯 번째 청동등에도 불꽃이 튀기더니 힘겹게 불을 지피려 했는데 갑자기 파르르 떨더니 꺼져버렸다.
여섯 번째 청동등은 결국 완전히 꺼졌다!
서곤은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가 전력을 다해 휘두른 주먹으로 청동등을 여섯 개도 켜지 못하다니, 그는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뒤쪽에 서서 상황을 살피던 목진 등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들은 서곤이 여섯 번째 청동등을 켤 확률이 제법 크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위잉.
그때 검은색 석비가 갑자기 진동하더니 혼돈의 기류가 스며져 나와 서곤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잇따라 서곤 주위의 기혈이 빠르게 부풀어 올랐고 체내에서 적홍색의 기가 휘몰아쳤다. 그는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기혈의 힘이 부쩍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저것이 탄천신수의 정기란 말인가?”
목진의 눈은 어느새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서곤의 육신이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뇌수의 세례를 받았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을 발견했다.
탄천신수의 정기는 역시 육신에 상당히 좋은 물건이었다.
서곤이 지금 다시 도전하면 여섯 번째 청동등을 켤 확률이 훨씬 높아질 텐데 아쉽게도…….
이를 잘 아는 서곤은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여섯 번째 청동등을 켜지 못해 연체탑에서 쫓겨났다.
목진 등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서곤을 보더니 조용해졌고 안색도 확 어두워졌다.
그러나 정적도 잠시, 종등이 바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나서겠네.”
그는 이미 검은색 석비 앞에 도착했고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갑자기 눈부신 빛을 발하며 수천 장 정도 되는 천붕으로 변했다.
종등은 신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천붕은 방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에 날아올라 은은한 황금빛을 발했는데 제법 위엄 있어 보였다.
끼익!
맑은 울음소리와 함께 황금색 천붕은 커다란 발을 휘둘렀는데 산 한 채를 부술 정도의 힘을 싣고 공간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쿵!
황금색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발이 검은색 석비를 힘껏 때렸는데도 석비는 여전히 끄떡없었다.
그러나 천붕의 엄청난 힘으로 인해 발톱이 석비에 확 꽂혔다.
활활!
순간 검은색 석비에 놓인 청동등에 불이 타올랐다.
청동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개나 밝아졌고, 서곤 때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잇따라 여섯 번째 청동등에 불꽃이 튀기더니 활활 타올랐다.
종등은 여섯 번째 청동등에 불을 지피는 것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