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6화. 혈전왕(血戰王)
“도대체 뭘 원하는 건가?”
종등이 이를 갈며 물었다. 그는 지금은 목진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사실 난 자네가 일전에 한 짓을 충분히 이해하네. 그러니 지존영액을 300만 방울만 내놓게.”
목진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밀자 종등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존영액 300만 방울이라니,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편이 더 빠르겠군!”
종등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천붕족 천재한테도 지존영액 300만 방울은 적지 않은 양이었는데 종등이 혼자서 이를 마련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럼 당장 연체탑에서 나가게!”
목진은 바로 정색하며 말했다.
“자네!”
종등은 너무 화가 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나한텐 지금 백만 방울밖에 없네.”
“이리 내게.”
목진이 손을 내밀자 종등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황금색 옥병을 건넸는데 그 속에 눈부신 영광을 발하는 액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잇따라 목진은 건네받은 옥병을 확인하더니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궁에서 반년간 거둬들여야 하는 양을 몸에 지니고 다니다니, 역시 천붕족의 천재는 남달랐다.
목진은 지존영액을 반으로 나눠 절반을 묵봉한테 넘겼다.
“고마웠어.”
묵봉이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목진은 정말 종등의 공격에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이에 묵봉은 바로 지존영액을 건네받았다. 지존영액은 수련에 필요한 자원이라 많을수록 좋았다.
“녀석을 이대로 풀어줄 거야?”
묵봉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목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된 그는 목진이 이대로 녀석을 풀어주려는 것이 왠지 의심스러웠다.
“여기서 종등을 죽이려 했다가 녀석이 나가면 더 큰 일이야. 녀석이 복수하려고 구유와 묵령을 공격하면 우리도 5층의 시험을 포기하고 나가야 하니까.”
“이건 우리한테도 좋을 게 없으니 5층의 보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애쓸 필요는 없어. 저 녀석은 연체탑에서 나가서 다시 상대하면 돼. 지존영액은 이자를 받은 셈 치자고. 하하. 사실, 녀석이 지존영액을 주지 않았어도 할 말은 없었어. 5층에서 얻을 보상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종등처럼 간사한 녀석이 목진의 꼼수에 넘어가다니, 묵봉은 목진이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종등도 눈치를 챈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안색이 확 어두워진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네가 감히!”
종등이 목진이었다면 절대 이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뭔가 꺼리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종등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바로 목진의 속셈을 알아챘다.
“생각보다 반응이 빠르군.”
목진이 히쭉거리며 한 말에 종등은 화가 났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진을 쏘아봤다.
목진은 연체탑에서 나가면 다시 녀석을 때려잡기로 하고 그들 일에 끼어들지 않은 한산한테 고개를 돌렸다.
“이번 일은 고마웠네.”
목진은 눈을 감고 탄천신수의 정기를 흡수하고 있었지만 벌어진 모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산이 나서지 않아 고마웠다. 안 그러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을 것이다.
“별말씀을…….”
한산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야말로 대단하네.”
한산은 목진이 검우를 획득한 것과 종등을 위협해 지존영액을 얻어내자 녀석이 절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서지 않은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만약 그가 욕심에 눈이 멀어 목진을 건드렸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졌을 것이다.
이에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샌가 검은색 석비의 뒤편에 홍황의 기운을 내뿜는 광문이 나타난 것이 보였다.
광문을 발견한 목진은 심장이 다시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광문만 넘으면 그는 5층에 이를 것이다.
오래된 파동을 내뿜는 광문은 조용히 검은색 석비의 뒤편에 나타났는데 무궁무진한 홍황의 기운에 목진 등은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단계에 이른 통로겠지? 5층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목진이 나지막하게 한 질문에 묵봉은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5층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은 데다가 매번 시험 방식이 달라서 나도 뭐라고 말해줄 수 없어.”
이에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연체탑에 들어온 뒤로 처음으로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렵게 온 목진은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탄천신수의 정기를 흡수하고 육신이 부쩍 강해진 그는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용봉진경이 경지를 돌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목진의 육신은 환골탈태의 변화를 가질 것이고 정예 신수들을 아무렇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7급 지존경에 이른 강자 중, 더는 그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자!”
목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광문에 뛰어들었고 묵봉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한산은 미소를 지은 채 안색이 확 어두워진 종등을 힐끗 보더니 덩달아 광문으로 향했다.
그때 제자리에 서 있던 종등은 음산한 눈빛으로 눈앞에서 사라진 목진 등을 바라보더니 반드시 5층에서 1위를 따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가서 실력이 확 늘면 바로 목진을 죽이리라!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종등은 성큼성큼 나아가 광문으로 들어섰다.
* * *
목진 등이 광문으로 들어가자 연체탑 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사람들은 5층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들도 연체탑 5층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여태껏 5층의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얼마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다들 목진 등의 실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결국 5층에서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하고 나올 거라 여겼다.
“구유 언니, 목진 오라버니와 우리 오라버니가 5층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묵령이 주먹을 꼭 쥔 채 정색하자 구유는 잠시 생각하더니 서서히 입을 열었다.
“글쎄, 5층의 시험은 매번 다르다고 들었어. 성물이 나타나 무차별적인 공격을 한 적도 있었대. 그런데 그건 진정한 성물이 아니라 성물의 투영일 뿐이었지. 그런데도 그 위력은 우리의 실력으로는 이겨내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대.”
이에 묵령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성물이 공격하다니, 그 정도의 공격이면 7급 지존경에 이른 강자마저 한순간에 죽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연체탑 5층이 이렇게까지 오르기 어렵단 말인가?
잠시 후, 수군대던 사람들은 드디어 5층에 빛이 모여 점차 광막을 형성하자 바로 집중했다.
* * *
목진은 광권에 들어서자 눈앞이 반짝 빛나더니 짙은 피비린내가 몰려와 흠칫 놀라 바로 용봉체를 소환했다. 그리고 종등한테서 빼앗은 검우를 꺼냈다.
그는 한껏 경계하며 서서히 고개를 들었는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화들짝 놀랐다.
그는 시체가 즐비한 오래된 전장에 서 있었는데 짙은 피비린내와 참혹한 기운이 맴도는 현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묵봉 등도 나타나 주위를 살피더니 깜짝 놀라 영력을 끌어올려 온몸을 휘감았다.
“여기가 연체탑 마지막 층이란 말인가?”
목진은 정색하며 오래된 전장을 살폈는데 이곳에서 얼마나 무서운 전쟁이 벌어졌는지 저절로 상상이 갔다.
위잉!
그때 오래된 전장이 진동하더니 피비린내와 참혹한 기운이 실체처럼 요동치며 목진 등의 앞쪽에 암홍색 그림자를 이뤘다.
목진 등은 선홍색 갑옷을 입은 채 무궁무진한 살기를 내뿜는 그림자의 기운에 순간 몸이 굳어져 꼼짝도 못 했다.
그들도 생사를 오가는 대결을 적잖게 겪었는데 이토록 살기가 강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보아하니 상대방은 그들보다 경험이 훨씬 더 풍부한 듯했다.
암홍색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진 등을 훑자 순간 소름이 쫙 끼치며 당장 연체탑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리며 조용히 서 있었다.
“난 혈전왕이다.”
암홍색 그림자가 천천히 입을 열자 주위에서 갑자기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암홍색 바람이 불었다.
“혈전왕이라…….”
이에 묵봉, 한산과 종등은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게 누군데?”
신수지원에 대해 잘 모르는 목진이 혈전왕을 알 리 없었다.
“혈전왕은 원고 시기, 신수지원의 엄청난 강자라고 들었어. 그는 천부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지만 수많은 전쟁을 치르고도 끝까지 살아남아 지지존 대원만급 실력을 다졌는데 그 정도만으로도 천지존을 상대할 수 있었다는군!”
“심지어 역외족이 신수지원에 쳐들어 왔을 때, 혈전왕은 그쪽의 천지존급 강자와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고 알려졌어.”
말을 마친 묵봉은 저절로 숙연해졌다.
“천지존과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니!”
목진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아직 그 정도 실력자가 되려면 멀었지만 지지존 대원만급과 천지존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았다. 그런데 혈전왕은 천지존과 싸우다가 상대방과 함께 죽다니, 그것만으로도 그 실력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만 년 전에 별세했는데도 그의 기세는 남달랐다.
“5층의 관문을 건너가고 싶으면 내 공격을 받아내면 된다.”
허공에 떠 있는 암홍색 그림자의 말에 목진 등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대방은 천지존마저 죽인 무서운 존재였다. 비록 수만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고는 하나 남아있는 실력만으로도 그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었다.
“젠장,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
한산마저 이를 갈며 외쳤다. 그는 혈전왕의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묵봉도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또한, 한산과 같은 마음이었다.
목진 역시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서 있었다. 5층의 관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런데 무덤덤하게 서 있던 혈전왕이 내뿜는 살기는 점차 강해졌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어갔다.
“난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스스로 사신마권(舍身魔拳)이란 신통을 만들었는데 누구든 내 공격을 받아내면 그 첫 번째 권법을 전수할 것이다.”
“이런 젠장!”
혈전왕이 무려 신통을 사용한단 말에 목진 등은 버럭 화가 났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녀석은 혈전왕보다는 비겁왕이란 이름이 더 어울렸다!
그런데 목진 등은 혈전왕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구미가 확 당겼다.
신통이라니!
혈전왕이 만들어낸 신통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목진 등은 절대 혈전왕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할 걸 잘 알았지만 욕심이 생겨 차마 물러날 수 없었다.
지지존급 강자마저 탐낼 신통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완전한 신통이 아니더라도 그 가치는 목진 등이 연체탑에 들어와서 획득한 보상을 전부 더한 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에 목진 등은 주위를 쓰윽 훑었는데 아무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역시 인간의 욕심이란…….”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혈전왕을 노려봤다. 결과가 어떻든 그는 적어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안 될 것 같으면 물러나면 그만이었다.
잇따라 혈전왕이 바로 주먹을 쥐고 엄청난 살기를 내뿜자 참혹한 기운이 시간을 뛰어넘어 전해지는 것 같았고 이로 인해 천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혈전왕이 무덤덤하게 서서 목진 등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하늘을 뒤흔들 법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혈전왕이 엄청난 위엄을 과시하며 나서자 하늘은 갑자기 시뻘겋게 물들었고 목진 등은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5층의 시험이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이건 아무도 건너지 못할 시험이었다!
그런데 혈전왕은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시한 채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주먹을 힘껏 휘둘렀다.
쿠쿵!
순간, 주위의 공기가 바로 사라졌고 그곳 공간마저 반으로 갈라졌다.
천 장 정도의 혈광 권영이 악마가 휘두른 주먹처럼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