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3화. 그 여인
천라대륙과 서천대륙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양자 사이에 크고 작은 대륙만 해도 수십 곳이나 되고 전송 영진으로 거리를 좁혔다고 해도 한 달도 안 되는 사이에 건너가는 것은 지지존한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목진 등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쉬지 않고 천라대륙을 떠난 뒤, 전력을 다해 전진했다.
다행히 동행자들은 전부 지지존경에 이르러 잘 따라왔다.
유천도 등은 실력이 뛰어나 목진을 겨우 따를 수 있었지만, 괴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목진은 이를 무시한 채 앞만 바라봤다.
그는 반드시 낙신제(洛神祭)가 시작하기 전에 낙신족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러다 낙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목진은 절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여 목진도 피곤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전력을 다해 달렸고 유천도 등은 씁쓸하게 웃으며 뒤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목진을 주인으로 모시기로 했으니 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 후로, 20일 조금 넘게 지나자 목진 등은 드디어 서천대륙에 가까워졌다.
서릉대륙(西陵大陸)은 서천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으로 목진 등은 해당 대륙의 커다란 도성의 전송 영진 앞에 도착했다.
목진은 눈앞의 전송 영진을 보더니 얼굴에 흥분감이 묻어났다. 이 영진만 통과하면 그들은 서천대륙의 소서천계에 이를 것이다.
“여러분, 고생 많았어요!”
목진은 유천도 등의 피곤해진 얼굴을 보고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에 유천도 등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했다. 그들은 말할 힘도 없었다.
잇따라 목진이 전송 영진에 들어가 지존영액을 내던지자 공간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며 그를 감쌌다.
이와 동시에, 목진은 서서히 눈을 감았는데 옷에 숨긴 손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그는 너무 흥분되었다.
후우.
목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소녀가 떠나기 전, 뒤돌아서 자신을 꼭 끌어안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마저 파르르 떨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오늘이 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낙리야, 내가 갈게. 넌…… 잘 지내?
* * *
서천대륙, 소서천계에 있는 낙신족의 핵심 지역에는 웅장한 도성이 우뚝 솟아있었다. 오래된 기운을 내뿜는 것으로 보아 존재한 지 오래된 듯했다.
도성은 거친 물결이 치솟는 하천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졌는데 도성에서 흘러나온 하천은 성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도성을 둘러쌌다.
이 하천은 오묘하기 그지없었는데 별이 빛나는 밤보다 눈부실 때도 있었고 도성 전체에 흘러 낙신족 사람들에게 수원을 제공해주었다.
아무도 이 하천이 얼마나 깊은지 몰랐다. 언젠가 지지존 한 명이 하천에 뛰어들었는데 보름 동안 노력했는데도 밑바닥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마터면 영력이 다 닳아 죽을 뻔했다.
신비로운 하천은 낙신천의 성하이기도 해서 일정한 날짜를 정해 기도를 드리곤 했다.
낙신족은 이 하천을 낙하라고 부리는데 낙하가 둘러싼 도성이 바로 낙신성(洛神城)이었다. 낙신성은 낙신족에서 가장 중요한 성스러운 도성이라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낙신족 백성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낙신성에 모여들었다. 바로 낙신족 족장인 낙천신이 낙신족 여황을 위해 낙신제를 거행할 거란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낙신족은 과거 번성했지만 점차 쇠퇴해 몇 해 전에는 내우외환으로 수많은 백성이 참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노비로 팔려가기까지 했다.
낙신족 백성들은 이토록 참담한 상황에 절망스러웠는데 몇 년 전, 갑자기 희망이 생겼다.
명망이 높은 공주께서 돌아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태로웠던 낙신족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그녀는 낙신족 군사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혈신족과 여러 차례의 혈투를 벌였고 결국 승전하여 낙신족은 몇 해 동안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낙신족 백성들을 위해 싸우자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도 점차 많아졌다. 절망스러웠던 백성들도 다시 희망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뿔뿔이 흩어졌던 낙신족 황족들도 하나둘씩 그녀의 편을 들기 시작했는데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여 낙신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사람들은 산산이 조각났던 낙신족의 완강한 의지에 깜짝 놀랐다. 낙신족은 곧 쇠퇴한 기운을 떨쳐낼 것 같았다.
이렇게 소서천계 전체가 낙신족의 미래를 짊어질 여황이 생겼단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여황의 명성은 할아버지인 낙천신을 뛰어넘어 백성과 황족들은 그녀가 최대한 빨리 황위에 올랐으면 하고 바랐다.
이번의 낙신제는 바로 황위에 오르기 전, 가장 중요한 의식이었다.
낙신제를 순조롭게 끝내면 낙리는 낙신족의 여황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황족 내부에 반대 의견이 있어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리되면 낙신족이 전성기로 돌아가지는 못해도 혈신족과 다른 두 신족이 낙신족을 집어삼키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번 낙신제는 상당히 중요했고 이에 수많은 낙신족 백성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낙신성에서 여황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었다.
낙신제가 열리는 날이 바로 낙신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 * *
낙신성의 중심 구역에 웅장한 기세를 뽐내는 궁전이 있었다. 존귀한 기운을 내뿜는 이곳은 바로 낙신궁(洛神宮)으로 낙신족 황족의 거처였다.
황궁의 높은 곳에서는 현재 하얀색 치마를 입은 가녀린 여인이 서 있었는데 옷깃에 자금색 실로 봉황이 날개를 떨치는 모습이 수놓아져 있어 무척 존귀해 보였다.
그녀는 완벽한 몸매를 지녔는데 길쭉한 다리, 잘록한 허리에 우아하고 새하얀 목은 아름다운 얼굴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굴리며 하늘을 보는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하수처럼 축 드리운 장발로 인해 여인은 꼭 그림에서 걸어 나온 것만 같았다.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는 조용히 서서 미간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봤다.
“목진아…… 잘 지내?”
낙신족 백성 앞에서 더없이 강인한 그녀가 지금은 보기 드물게 부드러움과 그리움을 드러냈다.
“아직도 그 녀석 생각을 하는 것이냐?”
그때 뒤쪽에서 갑자기 창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소녀는 바로 인상을 펴고 존귀하고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노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이제 그 사람을 그리워할 권리마저 빼앗을 건가요?”
이에 노인은 쓸쓸하게 웃으며 무안한 듯 답했다.
“낙신족 백성들이 이제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는데 내가 감히 그럴까?”
“그런데 낙리야, 그 녀석이 여태껏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평생 이렇게 기다리고만 있을 거냐?”
소녀는 바로 목진과 헤어진 지 오래된 낙리였다. 몇 년 사이 그녀의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경국지색으로 거듭났다.
낙리는 더 이상 목진 옆에 서 있던 조용하고 우아하던 소녀가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경외로운 여황의 기운을 내뿜었다.
낙리 뒤에 서 있는 노인은 낙신족의 족장, 낙천신이었다.
낙리는 낙천신의 질문에 느긋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의 미소는 할아버지께 더는 이처럼 무의미한 말을 하지 말라고 알려주는 뜻이었다.
하지만 낙리의 반응에 낙천신은 왠지 다급해졌다.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흘렀는데 녀석이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겼…….”
소녀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할아버지를 쏘아봤다. 한때, 조용하기만 했던 소녀가 내뿜는 여황의 기운에 흠칫 놀란 낙천신은 감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낙천신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낙리가 낙신족을 되살리자 소서천계는 물론이고 서천대륙에서 어느새 명성이 자자해졌다.
수많은 천재가 아름답고 실력이 강한 낙리의 마음을 사려고 애를 썼고 낙신족 못지않거나 훨씬 강한 세력에서 혼인하자며 연락이 왔다. 그 세력과 혼인하면 낙신족을 호시탐탐 노리는 혈신족을 제압하기엔 충분했다.
심지어 혈신족에서도 실력이 가장 뛰어난 젊은이와 낙리를 혼인시켜 쌍방의 원한을 풀자며 제안을 했는데 낙리는 이를 전부 강력하게 거절했다.
낙리는 진정으로 강해지려면 스스로 일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낙신족이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어떤 종족과 혼인 관계를 맺든 오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이에 낙신족 대부분이 낙리의 말을 받아들였다. 특히, 낙신족 중 실력이 뛰어난 젊은이들이 그녀를 지지했다. 하지만 낙천신은 이것이 손녀딸의 핑계일 뿐이란 걸 잘 알았다. 그녀는 그 녀석만을 마음에 품었고 평생 바뀌지 않을 것이다.
“몹쓸 녀석!”
이러한 생각에 낙천신은 이를 갈며 말했다. 그는 낙리를 낙신족에 데려오면 언젠가 목진을 잊을 거라 여겼다. 낙천신은 북창령원에서 수련하는 녀석이 무슨 수로 대천세계를 넘나들며 실력을 갈고닦아 다시 낙리를 찾아오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그의 손녀딸은 여전히 목진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이고.”
낙천신은 무척 언짢았지만,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길게 한숨만 내쉬었다.
“낙리야, 이번 낙신제를 무사히 마치면 넌 지지존경에 이를 것이고 낙신족의 여황이 될 거란다.”
낙천신은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채 낙리한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우리 적들은 절대 이를 원치 않을 거란다. 낙신족 내부든 다른 사람들이든 말이다.”
“이번 낙신제는 절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아무리 나라도…… 확신이 서지 않는구나.”
낙리는 창로하고 어두운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코끝이 찡해졌다.
“결과가 어떻든 전 낙신족과 함께 할 거예요!”
낙리는 낙천신의 거칠고 마른 손을 꼭 잡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걱정 말거라. 내가 있는 한 저들은 절대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란다.”
낙천신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얼른 가자꾸나. 낙신제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이에 낙리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봤다. 공간 너머 어딘가에 있는 소년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낙리는 고개를 휙 돌리며 자리를 떠났다.
“목진아, 무슨 일이 벌어지든 여기서 널 기다릴게!”
낙신제는 낙신궁 밖, 낙하가 한데 모이는 지점에서 진행되는데 무궁무진한 하천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 무한의 생명력을 방출하는 것 같았다.
하여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내뿜는 군사들이 낙하의 양측을 둘러싼 채 수비했고 하늘에마저 기사들이 뇌학으로 방어막을 형성해 호위했다. 아마 날벌레조차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멀리 내다보니 그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낙하의 양측은 사람으로 가득 차 상당히 떠들썩했다.
그들은 낙신족 백성들로 여황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낙신제의 성공을 확인하고 여황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 모인 것이었다.
오늘만큼은 그곳이 낙신성, 심지어 낙신족 모두의 이목을 끄는 곳이 될 것이다.
쿵!
사람들의 오랜 기다림 속에서 상고의 종소리가 드디어 울려 퍼졌다.
슉!
낙신궁에서 몇 갈래 빛줄기가 솟구치더니 낙하의 위쪽에 떠 있는 옥대에 내려앉았다.
백옥으로 빚은 옥대는 햇빛에 영롱한 빛을 발하는 것이 아주 아름다웠고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그 위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