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화. 성녀?
“오늘 우리는 어떻게든 낙신족을 구할 것이니 기어코 혈신족을 돕겠다면 그렇게 하게.”
만다라가 느긋하게 건넨 말에 늠동 노인은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신족에서 지불한 대가가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를 상대할 정도까지는 아니네.”
혈령자는 순간 사색이 되었고 낙천신 등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비록 목진 쪽에도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가 있지만, 그들이 정말 싸우길 바라지는 않았다.
늠동 노인은 서천전전의 장로로 서천대륙에서 감히 서천전전의 장로한테 무례를 범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목진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늠동 노인을 쳐다봤다. 그는 상대방이 이렇게 쉽게 포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허허, 오늘 내가 낙신족에 온 이유는 혈령자 족장 때문만은 아니네.”
늠동 노인의 창로한 얼굴에 괴이한 미소가 걸렸다.
이에 혈령자는 순간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혈신족에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모셔온 사람이 처음부터 낙신족에 오려고 했고 혈신족에서 제시한 가격이 괜찮아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라니…….
“그럼 무슨 일로 낙신족에 오셨나요?”
목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늠동 노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 일은 저 아이와 연관이 있으니 저 아이의 답을 들어봐야 한단다.”
늠동 노인이 영겁을 건너고 있는 낙리를 바라보며 한 말에 목진은 괜히 불안해졌다. 이에 뭐라 말하려는데 만다라가 갑자기 막아 나서며 조용히 서서 낙리쪽을 바라봤다.
쿠쿵!
현재, 낙리는 여전히 백옥대에 조용히 앉아있었고 주위에 지극히 강력한 영력 파동을 내뿜었는데 9급 지존경 원만급을 훨씬 뛰어넘었다.
하늘에 겹겹이 싸인 영운이 모여들어 경천의 뇌광을 내려 낙리를 사정없이 때렸다. 뇌광이 그녀 주위 백 장 범위에 진입하자 낙하가 거대한 수막을 형성해 벼락을 막아냈다.
낙하는 낙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무서운 영겁은 결국 영력을 전부 소모하더니 영광이 되어 천천히 사라졌다.
순간, 낙리의 체내에서 강력하기 그지없는 영력이 폭발해 낙하에 만 장의 파도가 일었다.
사람들은 낙리가 경지를 돌파하고 하위 지지존경에 이른 것을 깨닫고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때 낙리가 꼭 감았던 눈을 번쩍 뜨자 유리알같이 맑은 눈동자에 별들이 반짝였다. 그녀가 두 손을 모아 결인하자 낙하가 휘몰아치며 그녀 뒤에 모여 거대하기 그지없는 물결 모양의 사람 형태를 이뤘다.
그녀의 영롱하고 가녀린 몸에서 신광이 발하더니 모습이 점차 변해 낙리와 똑같게 변했다. 그리고 미간에 은하수 같은 무늬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신비로운 하천처럼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신비로운 하천 무늬가 형성되자 가녀린 그림자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방출했고 그 앞에 서 있던 낙리의 미간에도 똑같은 무늬가 나타나 특이한 빛을 발했다. 경국지색의 낙리는 더 아름다워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된 것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대천세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지!”
누군가 낙리의 미모에 푹 빠진 채 중얼거렸다.
반면, 낙천신과 낙신족 강자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낙리의 뒤에 나타난 가녀린 그림자와 신비로운 하천 무늬를 쳐다봤다.
“저…… 저건 낙신법신(洛神法身)이네!”
낙신법신은 대천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법신으로 일단 수련에 성공하면 주인과 상부상조할 수 있다. 낙신도 낙신법신의 수련에 성공해 대천세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 두 번째 계승자가 낙리라니!
“낙신법신의 수련 조건은 상당히 까다롭다고 들었네. 수련자가 경국지색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천부적 재능도 아주 뛰어나야 한다네. 여태껏 낙신족에서 낙신법신의 수련 조건을 만족한 사람은 낙리 뿐일 것이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낙천신은 이내 화색이 되었다. 이제 낙리가 낙신의 계승을 받았으니 낙신족 상황도 곧 좋아질 것이다.
잠시 후, 낙리의 뒤쪽 그림자가 사라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생긋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이에 다들 순간 질투로 가득 찬 눈빛으로 목진을 노려봤다. 목진이 일전에 강력한 실력을 선보이지 않았다면 그를 공격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목진은 괜히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때 늠동 노인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역시 낙신의 계승자라 그런지 남다르구나. 대천세계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란 이름이 드디어 주인을 찾았구나.”
“낙신족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낙리는 늠동 노인한테 우아하게 인사한 뒤,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 말에 늠동 노인은 소매에서 황금색 족자를 꺼냈는데 그 속에서 전해진 천지를 능가한 기운에 사람들은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이와 동시에, 늠동 노인은 족자를 펼치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전황께서는 낙신족의 여황을 서천전전의 신임 성녀로 임명하셨다.”
늠동 노인의 말에 낙천신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늠동 노인의 말에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하나같이 부러운 눈빛으로 낙리를 바라봤다.
서천전전의 전황께서 친히 낙리를 성녀로 임명하다니. 서천전전에서 성녀의 지위는 전황 다음으로 높아 늠동 노인 같은 장로들도 공손하게 모셔야만 했다.
그런데 낙천신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서천전전의 전황은 삼천의 후궁을 둬서 이 세상의 절세 미녀가 거의 모여있었다. 이는 그가 수련한 대제내경과도 연관이 있는데 해당 공법은 여인과 함께 수련해야 했고 전황은 풍류를 상당히 즐기는 인물이기도 했다.
서천전황은 언젠가부터 낙리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낙리는 실력이 그리 출중하지 않아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낙리가 점차 앳된 모습을 벗고 이목을 받자 서천전전에서 다시 그녀를 고려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낙리는 낙신법신의 수련마저 성공해 더 눈부셔졌다. 낙천신은 서천전전에서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서천대륙과 서천전전이 지배하는 대륙에서는 수많은 미인이 절세의 풍류를 즐기는 전황의 눈에 들고 싶어 한다. 전황의 실력과 풍채로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식은 죽 먹기였기 때문이다.
하여 전황의 후궁 중, 단 한 사람도 강요한 이가 없었고 전부 전황의 매력에 푹 빠져 그의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낙천신은 자기 손녀딸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낙리는 일단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무리 전황이 와서 청혼해도 거절할 여인이었다.
하여 그녀는 늠동 노인의 제안을 거절할 것이 분명한데 전황의 뜻을 어디 함부로 거역할 수 있던가?
그는 무려 서천대륙의 지배자로 대천세계에서 유명한 천지존이었다.
목진도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서천전황은 잘 모르지만 낙천신의 표정만 봐도 대충 알 것 같았다.
“허허, 축하한다. 앞으로 넌 우리 서천전전의 성녀란다.”
늠동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황금색 족자를 가볍게 휘둘렀다.
“전황의 명을 받거라.”
그런데 낙리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늠동 노인을 쳐다보더니 한참 지나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
“거절할게요.”
사람들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낙리를 쳐다봤다.
그녀가 감히 서천대륙 지배자의 명을 거역하다니!
무려 천지존의 명을 말이다!
늠동 노인의 말을 듣고 잔뜩 겁에 질렸던 혈령자는 낙리의 말에 이내 화색이 되었다.
늠동 노인도 멈칫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전황의 뜻을 거역하면 어찌 되는지 알고 그러는 것이냐?”
낙리는 늠동 노인의 말을 듣고 막중한 압력을 받았지만, 고개를 들고 곧게 서 있었다.
그때 목진이 다가와 그녀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목진과 낙리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란 걸 알아챘다.
낙리는 목진 때문에 서천전전의 성녀 자리를 거절한 것이다. 목진은 낙리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들고 늠동 노인한테 물었다.
“서천전전은 성녀를 강제로 임명해도 되나요?”
“녀석,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란다!”
늠동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경천의 영력 위압감을 형성했다. 이에 천지는 추운 겨울이 되었고 무서운 한류가 목진에게 향했다. 그러나 만다라가 마침 나타나 왜소한 몸에서 발한 어두운 빛으로 한류를 전부 없애버렸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늠동 노인을 바라봤다.
“말도 못 하나? 서천전전이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인 곳인가?”
비록 서천전황은 천지존이지만 만다라는 천제를 따라 천지존을 제법 만났기에 서천전전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이에 늠동 노인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만다라를 노려봤다.
“자네, 진정 서천전전의 뜻을 거역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어떡할 건가?”
만다라가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무례하네!”
드디어 화가 난 늠동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옷깃을 휘날리자 수정 같은 별들이 형성되었는데 천지의 온도를 모조리 흡수해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위잉!
수정 같은 별은 한 갈래 한류가 되어 날아오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폭등해 커다란 얼음의 별을 이룬 뒤, 만다라를 향해 사정없이 내려앉았다.
그 위력은 천지를 부수고도 남았다.
“흥!”
만다라가 입을 쩍 벌리자 억만 갈래의 빛이 솟구쳐 금자탑을 이뤘다. 이건 목진이 선물로 준 성진진마탑이었다.
슉!
성진진마탑에서 무한의 성광을 발하더니 얼음의 별을 미친 듯이 공격했다.
얼음의 별은 결국 폭발해 우수수 떨어졌고 늠동 노인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뒤로 물러났다. 그는 만다라와의 첫 번째 대결에서 제법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좋네, 아주 좋아!”
늠동 노인은 눈을 부릅뜨고 만다라를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두 손으로 공손하게 황금색 족자를 들고 혀끝을 깨물어 정혈 한 방울을 떨궜다.
위잉.
황금색 족자에서 갑자기 도천의 금광을 발하더니 지극히 무서운 기운을 방출했다. 그 기운은 천지를 능가한 이 세상의 지배자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무서운 기운에 지지존경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은 바로 무릎을 꿇었고 머리조차 들지 못한 채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람들은 바로 그 기운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깨달았다. 서천대륙에서 이 정도 기운을 지닌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바로 서천전전의 주인, 서천전황이었다!
만다라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황금색 족자로 전황의 령영을 소환할 수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령영만으로도 엄청난 압력을 느꼈다.
목진은 낙리가 갑자기 손에 힘을 꽉 준 것이 느껴졌다.
“걱정 마.”
목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낙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소년은 진지해 보이긴 했지만 전혀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기회가 되면 먼저 가.”
낙리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넌?”
이에 낙리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암튼 난 성녀가 되지 않을 거야.”
목진은 소녀의 미소에서 그녀의 결정을 바로 알아챘다. 낙리는 성녀가 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낙리야…….”
목진은 낙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그때, 너한테 했던 말 기억해? 다음번에 만나면 절대 너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아무도 내 곁에서 널 데려갈 수는 없어.”
그는 목진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상대가 아무리 서천전황이라도 말이야.”
서천정황은 비록 강대하지만 목진에게도 전혀 대비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낙리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목진이 왜 이리 자신만만한지 몰랐지만 분명 믿는 구석이 있어 보여 조금이나마 시름이 놓였다.
“정말 많은 걸 경험했나 보구나.”
말을 마친 낙리가 미소를 짓자 목진은 그 자리에서 낙리를 바로 끌어안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미간을 찌푸린 채 황금색 족자를 쳐다봤다. 그때 족자에서 발하던 금광이 황금색 그림자를 이뤘다.
“전황을 뵙습니다.”
늠동 노인은 유아독존의 기운을 내뿜는 황금색 그림자를 보더니 바로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뒷짐을 쥐고 나타난 황금색 허상은 눈부신 금발에 각진 얼굴, 그윽한 눈매까지 더해 엄청난 매력을 뽐내는 미남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뿜는 천지를 능가한 위엄이야말로 제일이었다.
사람들은 전황의 위압에 깜짝 놀라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낙리야, 진정 내 뜻을 거역할 것이냐?”
전황은 나타나자마자 낙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