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3화. 전황 강림
전황의 소리는 천신의 소리처럼 구천에서부터 전해졌는데 천지마저 파르르 떨렸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그들은 순간 하늘에서 파멸의 재앙이 내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황금색 그림자는 뒷짐을 쥔 채 허공에 떠 있었는데 내뿜는 기운으로 보면 천지의 주인 같았다.
그의 엄청난 위압에 일반 강자들은 무릎을 꿇어야만 했고 지지존들도 대부분 압력 때문에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세상에! 서천전전의 전황이 강림할 줄이야!
그런데 낙리는 고개를 들고 본체처럼 보이는 황금색 그림자를 조용히 쳐다봤다. 그녀도 상대방의 무서운 위압감에 온몸이 파르르 떨렸지만 두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낙리는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전황의 뜻은 고맙지만, 전 서천전전의 성녀가 될 생각이 없으니 다른 사람을 구하세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낙리가 이렇게까지 담대할 줄 몰랐다.
반면, 혈령자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그는 낙신족이 이대로 살아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서천전전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싫어하기까지 했다.
하여 전황이 화라도 내면 낙신족을 없애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무례하구나!”
늠동 노인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낙리야, 전황을 거절한 대가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의 섣부른 결정으로 낙신족에서 치를 대가도 알고 있느냐?”
“다들 죽겠죠. 낙신족의 여황으로서 이토록 굴욕적인 방법으로 내 백성을 지키고 싶지는 않아요. 그럴 바에는 이대로 멸망할래요. 그래야 조상님들한테 미안하지 않죠!”
낙리가 늠동 노인을 노려보며 말했고, 그 말에 낙신족 사람들은 순간 피가 끓어올랐다. 그들의 조상들은 대천세계의 정예급 강자였고 명성과 실력이 서천전황에 뒤처지지 않았다. 하여 그들의 혈맥 깊숙한 곳에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낙리를 사랑하고 낙신의 계승을 받은 그녀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낙리의 희생으로 낙신족을 살려야 한다면 함께 죽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들도 굴욕적인 삶은 필요 없었다!
수많은 낙신족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화가 난 듯 늠동 노인을 노려봤다.
다른 세력의 강자들도 이내 감탄하며 낙리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인이긴 하지만 남다른 기백을 지니고 있었고 이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늠동 노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낙신족 사람들의 전의를 불러일으켰다.
낙리의 기백과 매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허허, 역시 낙신이 인정한 사람은 남다르군.”
황금색 도포를 입고 절세의 풍채를 자랑하는 전황이 가볍게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는 낙리의 말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게 웃으며 늠동 노인을 바라봤다.
“남녀 사이의 일은 강요하면 안 된단다. 내가 언제 그렇게 했더냐?”
늠동 노인은 바로 잘못을 인정했다.
서천전황의 드넓은 아량에 사람들은 몰래 혀를 내둘렀다. 서천대륙의 지배자는 역시 남달랐다.
그러나 목진은 서천전황이 이렇게 쉽게 이 일을 넘길 것 같지 않아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네가 원하지 않으면 나도 강요하지 않을 거란다. 대신, 서천전전의 성녀 자리는 남겨둘 테니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찾아오거라.”
서천전황은 다시 낙리한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마 끝까지 실망하실 거예요.”
낙리가 무덤덤하게 한 말에 전황은 미소를 짓더니 만다라한테 눈길을 돌렸다.
“성녀의 일은 잠시 내려놓고 상고의 만다라 꽃이 감히 서천전전의 위엄을 몇 번이나 건드리다니. 너는 벌해야겠구나.”
전황의 말에 다들 화들짝 놀라 만다라를 바라봤다. 사람들은 만다라의 본체가 상고의 만다라 꽃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목진과 낙리는 심장이 철렁했다. 전황은 성녀의 일을 잠시 내려놓겠다고 했지만, 만다라의 일로 꼬투리를 잡은 걸 보면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전황,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사소한 것까지 물고 늘어지다니, 너무 옹졸한 것 아닌가요?”
낙리의 말에 전황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내가 저들을 쉽게 풀어주면 다들 나를 쉽게 생각할 것이란다. 저 두 녀석을 데려가 몇 년만 가둬 심성을 다스린 뒤 풀어주겠다. 다만, 저들의 목숨은 살려둘 것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낙리는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전황은 만다라뿐만 아니라 목진까지 데려가려고 했다.
쿵!
그런데 낙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황은 이미 공격을 개시했다. 그가 손을 내밀자 금광이 모여 황금색 거수를 이룬 뒤, 만다라와 목진에게 향했다.
“서천대륙은 지지존 대원만급 따위가 우쭐거릴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전황의 목소리와 함께 황금색 거수가 내려앉자 공간마저 갇힌 것 같았고 천지의 영력은 흐름을 멈춘 것 같았다.
사람들은 문득 만다라와 목진이 가여워졌다. 목진한테 수단이 아무리 많아도 천지존의 공격은 막아낼 수 없을 테니 분명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이놈, 어디 더 날뛰어보지 그러냐!”
혈령자도 혈안이 된 채 이를 갈며 외쳤다. 혈신족에서 낙신족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준비했지만 목진이 전부 해결해버려 화가 났는데 지금은 무려 전황이 나섰으니 목진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선배님, 당장 목진을 데리고 떠나세요!”
낙리도 이를 악물고 만다라를 바라보며 외쳤다. 지금 당장 목진을 데리고 도망갈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만다라밖에 없었다. 여기 나타난 전황은 본체가 아닌 령영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다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목진한테 눈길을 돌렸다. 목진은 전황의 공격에도 그리 놀라지 않는 듯했다.
목진은 낙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더니 수수한 등잔을 꺼내 아쉬운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물건을 이렇게 빨리 사용할 줄 몰랐네…….”
잇따라 목진이 영력을 주입하자 수수한 등잔이 빠르게 밝아졌다.
* * *
황금색 거수가 만다라와 목진을 완전히 감싸자 사람들은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제 아무리 만다라라도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서천전황은 만다라와 목진을 데려가면 낙리가 자연스레 성녀의 자리에 오를 거라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은 함께 지내게 될 테고, 전황은 낙리가 결국 자기 매력에 흠뻑 빠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 그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사실, 전황 정도 경지에 이르면 여인의 아름다움에 크게 끌리지 않았다. 그러나 낙리는 낙신법신을 획득해 함께 수련하면 대제내경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전황은 자신이 얼굴만 비춰도 낙리가 자신의 풍채와 매력에 반할 거라 여겼는데 그녀는 다른 놈에게 마음이 사로잡혀 서천전전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니 그가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했다.
“낙리야, 너도 언젠가 내 매력을 알게 될 것이다. 너와 어울리는 사람은 나뿐이란다. 목진이란 녀석은 스쳐 지나가는 이일 뿐이니 네가 그렇게까지 마음 쓸 필요는 없단다. 이건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말을 마친 전황은 꿈쩍도 하지 않는 황금색 거수를 보더니 만다라와 목진이 반항을 포기했나 싶어 이내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빠르군.”
그런데 그가 목진과 만다라를 거두려 할 때, 황금색 거수에서 갑자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현란한 화염이 스며져 나와 황금색 거수를 빠르게 녹였다.
“이럴 수가!”
갑작스러운 변고에 서천전황은 화들짝 놀랐다.
일반 지지존 원만급 강자마저 그의 공격에 꼼짝없이 당하는데 어찌 화염에 녹아내린단 말인가?
상황을 살피던 사람들도 너무 놀란 나머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란한 화염은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황금색 거수를 완전히 녹였고 목진과 만다라는 다시 무사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에 갑자기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뒷짐을 쥐고 목진 앞에 서서 느긋하게 웃고 있었는데 절세의 강자만의 위압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전황의 위압이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천지존의 위압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다른 천지존이 형성한 위압뿐이란 걸 알 것이다.
“서천전황이 후배를 공격하다니, 너무 보잘것없는 것 아닌가?”
목진의 앞에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전황을 바라봤다.
“염제, 소염?”
전황은 사내를 보더니 안색이 확 어두워져 소리쳤다.
사람들은 목진이 불러온 천지존이 대천세계에서 유명한 염제란 걸 알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염제, 소염?”
서천전황이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목진의 옆에 나타난 사내를 바라봤다.
대천세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진정한 전설이었다.
그의 실력이 엄청난 것은 물론이고 그가 세운 무한의 화역의 실력도 일부 고족보다 뛰어나 대천세계에서 엄청난 세력으로 거듭났다. 역사가 유구한 고족들도 감히 염제한테는 덤비지 못할 것이다.
서천전황도 충분히 강하지만 무한의 화역의 염제와 비교하면 실력에 차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정예 강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정예 강자 중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목진이 평소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아 마주치기 힘든 염제를 모셔오다니…….
사람들이 목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확 변했다. 그들은 만다라가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더 그를 경계했다.
그 외, 목진 등이 곧 죽을 거란 생각에 이내 화색이 되었던 혈령자도 표정이 확 굳었고 혈신족의 나머지 강자들도 사색이 되어 미친 듯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목진을 바라봤다.
그러다 혈령자는 얼굴에 맺힌 땀을 닦으며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랬다. 천지존이 나서도 목진을 죽이지 못하다니. 목진은 순식간에 무려 대천세계의 전설을 모셔왔다.
‘목진의 정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혈령자는 속으로 미친 듯이 포효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무턱대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 하위 지지존은 재산을 탈탈 털어도 천지존을 모셔올 수 없었다!
하찮은 벌레가 하늘의 별을 딸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절망스러웠던 낙신족 강자들의 두 눈에는 다시 희망의 빛이 깃들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목진이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목진과 낙리의 관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당히 만족했다.
목진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는 무려 천지존도 불러올 수 있는 강대한 인맥까지 지니고 있었다.
목진 정도는 되어야 낙신족의 여황과 어울릴 것이다.
한편, 염제는 뒷짐을 쥔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전황처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무서운 기운을 내뿜지 않았지만 전황이 형성한 위압이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다.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위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그때 염제는 낙신성을 쓰윽 훑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다시 낙신성에 와보는구나.”
“선배님, 일전에 이곳에 오신 적이 있나요?”
목진이 흠칫 놀라 물었다.
“하하, 나와 낙신족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란다.”
염제는 명쾌하게 웃으며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낙천신한테 눈길을 돌렸다.
“오랜만이네요, 낙천신.”
낙천신은 멍하니 염제를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넌 인제 더는 그날의 길 잃은 소년이 아니구나.”
염제는 대천세계에 오자마자 낙신족에 도착했는데 하위면에서 수련한 투기를 이곳의 영력으로 전환하지 못해 상당히 허약했다. 게다가 대천세계는 처음이라 낙신성에서 길을 잃었다.
그때 낙천신이 낙신족의 족장이었는데 마침 염제와 마주쳐 도움을 주었고 염제는 아내와 친구를 찾으러 바로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