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화. 염제 VS 전황
그 뒤로 낙천신은 염제에 관한 소식을 가끔 듣곤 했는데, 무한의 화역을 세우고 대천세계의 천지존으로 거듭나 유명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낙신족이 멸망의 위기에 놓이자 그도 무한의 화역의 도움을 구할 생각도 해봤지만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낙천신은 그날의 보잘것없는 은혜로 염제를 움직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염제는 이제 대천세계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염제는 이미 낙신성에 왔던 일을 잊었을 수도 있고 낙천신은 그때 편리를 봐준 것뿐이라 이것만으로 천지존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여기지 않았다.
천지존과 그들 사이의 거리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염제는 낙천신의 말에 이내 정색하더니 바로 다가가 상대방의 메마른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나 소염은 절대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해, 당신이 투기를 영력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헤맸을지 몰라요. 그러다 내가 모든 걸 깨닫고 아내와 친구를 찾아갔을 땐 이미 늦었을 거예요.”
염제가 제때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아내와 친구는 죽었을 것이다.
낙천신은 자신이 염제한테 이렇게 큰 도움을 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멍하니 서 있다가 흐뭇하게 웃으며 염제의 손을 다독였다.
“몸에 상처가 있네요?”
염제는 낙천신의 얼굴을 보더니 바로 체내의 영력에 이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혈마독일 뿐이란다.”
낙천신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이건 과거 혈령자와 싸우다가 남긴 상처로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주요 원인이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그는 결국 혈마독 때문에 죽게 될 것이다.
혈마독은 지극히 난폭하고 체내에 머무른 지 오래되어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가 나서도 독을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가 해결해드릴게요.”
말을 마친 염제가 낙천신의 손등을 가볍게 때리자 한 갈래 현란한 불씨가 낙천신의 체내에 스며들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지더니 피비린내 나는 혈액이 스며져 나와 빠르게 증발했다.
1각도 안 되는 사이, 낙천신은 다시 안색이 밝아졌고 영력 흐름도 원활해졌다. 그는 몇 년간 몸에 달고 지냈던 혈마독을 너무 쉽게 없애자 깜짝 놀라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멀리서 상황을 살피던 혈령자는 사색이 된 채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목진이 염제를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전설 같은 염제가 낙천신과 구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놀라운 전개에 그는 어쩔 바를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는 절대 낙신족을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낙신족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염제는 낙천신 체내의 독을 없애고 낙신성 위쪽 형세를 쓰윽 살피더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에 낙천신은 잠시 고민하더니 자초지종을 알렸다.
“목진이 너를 불러올 수 있을 줄은 몰랐구나.”
낙천신이 쓸쓸하게 웃으며 한 말에 염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목진이 나를 불렀으니 다행이지. 안 그럼 나 소염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뻔했어요.”
목진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염제를 불렀는데 그가 이렇게 고마워할 줄 몰랐다.
“이제부터 나한테 맡기세요.”
염제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무서운 위압을 내뿜는 서천전황을 바라봤다.
“서천전황이 용맹하다고 익히 들었는데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군.”
서천전황은 염제를 노려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염제야 워낙 대천세계에서 유명하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네.”
“내가 서천대륙의 일에 간섭하면 안 되지만, 낙신족이 나한테 베푼 은혜가 있어 어쩔 수 없게 되었네. 혹시 나를 봐서라도 낙신족과 목진을 그만 괴롭히면 안 되겠나?”
염제가 상냥하게 웃으며 한 말에 서천전황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염제는 대천세계에서 상당히 유명한 존재이고 무한의 화역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대한 세력이지만 백전백승의 전황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전황이 낙신족을 살려줄 수는 있지만, 오늘 일이 알려지면 다들 서천전황이 염제가 두려워 그런 거라 말할 것이 분명했다. 이건 체면이 걸린 중요한 문제였다.
이에 서천전황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그러기 싫다면 어쩌겠나?”
전황이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사람들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고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전황은 대천세계의 정예 강자이고 염제는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런 둘이 정말 싸움이라도 벌이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아마 소서천계 전체가 들썩일 것이다.
천지존들의 대결에는 파멸의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염제도 전황의 대답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바로 미소를 지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은데…….”
염제는 평소 상냥하고 대하기 쉬운 것 같지만 일단 화가 나면 그 패기에 전황도 바로 제압당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서천전황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을 이어갔다.
“만 가지 화염을 모아 만든 제염이 난폭하기 그지없다고 들었는데 이번 기회에 확인해봅시다.”
전황은 염제가 대천세계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잘 알고 있었지만 다들 염제가 그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황은 실력으로 염제에게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전황은 오늘 다른 천지존이 왔다면 봐줬을지도 모르지만 염제만큼은 쉽게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
안 그럼 다들 서천전황이 염제를 두려워한다고 소문이 날 텐데 그는 이를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도 서천전황의 전황결이 대천세계에서 유일하게 영력과 전의를 융합할 수 있어 상당히 오묘하다고 들었네. 오늘, 이렇게 만났으니 그 오묘함을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염제는 전황이 내민 도전장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말만으로는 절대 전황의 뜻을 꺾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알았다.
말을 마친 염제가 가볍게 손을 들자 현란한 화염이 휘몰아치며 손바닥에 모여 현란한 불덩이를 이뤘다.
수천수만 가지 색깔을 띤 상당히 아름다운 현란한 불덩이에 무서울 정도로 강력한 힘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현란한 불덩이를 보자 불덩이가 일단 지면에 닿으면 주위 수십만 리가 바로 화해가 될 것이고 모든 생명이 사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란한 불덩이는 불씨를 튀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주위의 공간이 부단히 무너지고 공간 파편이 떨어져 화염에 활활 타버렸다.
그러다 현란한 불덩이는 빠르게 작아지더니 정교하기 그지없는 화련을 만들었다.
화련은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상당히 아름다웠다.
“다들 화련을 보지 말게. 영력이 연소하여 없어질 것이네.”
화련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사람들은 염제의 명쾌한 웃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들은 곧 체내가 뜨거워진 것을 느꼈고 영력이 비등해 불타오를 기미가 보였다.
이에 다들 황급히 시선을 거두자 다시 체내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 광경에 다들 소름이 쫙 끼쳤다. 염제가 이룬 화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체내의 영력이 스스로 연소하다니, 염제가 귀띔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다들 온몸이 불타올랐을 것이다.
잇따라 염제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현란한 화련은 곧장 전황에게 향했다.
화련의 속도는 상당히 느려 보였지만 절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화련은 상대가 어디 숨든, 심지어 공간을 가르고 도망가도 결국 그를 찾아내 공격할 것 같았다.
서천전황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화련을 보더니 이내 정색했다. 그마저 화련에서 위험한 기운을 느꼈다.
“제염은 역시 대단하군!”
전황은 이리 중얼거리더니 바로 결인했다. 그러자 체내에서 황금색 태양들이 떠올랐는데 그 속에 사람들이 깃들어 있었다.
위잉!
황금색 태양은 파르르 떨며 웅장한 영력을 내뿜었다.
목진은 황금색 태양들을 보고는 흠칫 놀랐는데 황금색 영력에서 전의의 파동을 읽었기 때문이다.
전황은 영력과 전의를 융합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의는 군대의 강대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영력과는 전혀 달랐다. 목진도 전진사이긴 하지만 자신의 영력을 전의와 이토록 완벽하게 융합하지는 못했다.
전의는 아무리 강해 봐야 군대의 것이지 자신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런데 서천전황은 이를 해냈으니, 목진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그때 황금색 태양이 한데 모여 커다란 황금색 솥을 이뤘는데 표면에 가득 새겨진 사람들은 정예 부대인 것 같았다.
“전령불패정(戰靈不敗鼎)!”
서천전황의 나지막한 고함에 황금색 솥은 현란한 화련을 꿀꺽 삼키더니 하늘에 가만히 떠 있었다. 잠시 후, 전사들의 고함이 전해졌다.
“나의 불패정에는 수백만 명의 군사가 있어 영력으로 융합하면 천지존도 가둘 수 있다네.”
서천전황이 자신만만하게 한 말에 염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단하군. 하지만 아무리 강해도 불을 이길 수 있을까?”
염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금색 솥 표면에 새겨진 사람들은 놀라운 속도로 사라졌고 미세하고 현란한 화염이 피어올라 금광을 집어삼켰다.
서천전황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활활!
현란한 화염이 눈 깜짝할 사이에 골고루 퍼지자 황금색 솥은 빠르게 황금색 액체로 녹아내렸다.
그 광경에 사람들은 이내 감탄했다. 아무도 두 천지존의 대결이 이렇게 빨리 끝날 줄 몰랐다.
아무리 바보라도 염제의 제염이 더 강하단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천전황은 멍하니 서 있다가 복잡미묘해진 표정으로 염제를 노려봤다.
“벌써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렀군…….”
두 사람의 대결은 예상 밖으로 아주 조용히 끝났는데 결과가 나타난 순간, 전황은 자신이 절대 염제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염제는 남다르군. 마하고족의 마하천이 건드리지 못한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어.”
“이번엔 운이 좋아 이긴 것뿐이네.”
염제는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
“미세한 차이라도 승패는 갈렸으니 낙신족은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것이네.”
“목진은 왜 빼놓은 건가?”
염제는 바로 전황의 말의 뜻을 알아챘다. 그가 한 말에 목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저 아이는 목부 사람들과 함께 서천대륙에서 소란을 피우고 서천전전에 불경스러운 말과 행동까지 하였는데 어찌 처벌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전황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 말에 염제는 여전히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리광은 그만 부리게. 목진은 자네 체면을 생각해서 날 부른 것이네.”
염제의 말에 다들 어리둥절해졌다.
“허허, 염제가 서천대륙에 온 것은 이곳의 영광이네.”
전황이 콧방귀를 뀌며 말하자 염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으로 목진을 가리켰다.
“목진한테는 다른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물건이 있는데 그 사람은 자네와 인연이 있다만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네.”
“음?”
전황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대천세계에서 내가 만나면 안 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이에 염제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전황을 노려봤다.
“무조, 임동.”
순간, 서천전황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무조, 임동?”
사람들은 염제의 말에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전황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무경의 주인, 무조 임동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대천세계에서 염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으로 염제 못지않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무조도 하위면 출신으로 하위면 강자들을 거느리고 역외사족을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비록 그날, 물리친 이마족(異魔族)은 역외사족에서 방대한 세력은 아니지만 하위면을 없애기엔 충분했는데 결국 무조의 손에 죽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천세계에 온 무조는 홀로 빙령족을 상대했을 뿐만 아니라 무경을 만들어 대천세계의 엄청난 세력으로 거듭났다. 이룬 성과로 따지자면 무조도 염제 못지않았다.
다만, 전설 같은 무조의 실력도 염제와 비슷할 거라 오늘 이 자리에 무조가 왔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란 염제의 말은 이해가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