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화. 구면
“현재, 진천은 대천궁의 수석 장로가 되었고 차기 궁주가 정해지기 전까지 그와 다른 장로들이 함께 대천궁을 관리할 거란다. 그는 비록 대천세계에서 염제나 무조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천지존 중에서 지위가 그들 못지않단다.”
적염노선은 다시 수염을 쓸어내리더니 이내 감탄하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진천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목진도 인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록 주마왕 진천을 뵙지 못했지만 천지존들의 평가가 이토록 높은 걸 보면 실력도 상당히 뛰어날 것이다. 그는 심지어 염제, 무조 등과 같은 등급의 실력자일 가능성도 있었다.
대천세계에 진정한 강자는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
“적염 선배님, 주마령은 어떻게 수령해야 하나요?”
적염노선의 말에 목진은 대천궁 객경의 신분이 탐 나기 시작했다. 주마점으로 절세의 신통을 바꿀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시도할 만했다.
목진은 36가지 절세의 신통 중 하나인 일기화삼청 외엔 장악한 절세의 신통이 없어 대천궁에서 한 가지라도 획득할 수 있으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목진 등이 흥미로워하자 적염노선은 미소를 지으며 도성 중심으로 향했고 그들은 바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신속하게 도성을 가로지르며 2각 정도 걸어서야 다시 멈춰 섰다.
목진 등은 상당히 큰 주마비에 도착했는데 그 아래쪽에 놓인 검은색 누각에서 숨 막힐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져 다들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여기가 바로 대천루(大千樓)인데 이는 대천궁의 지부 중 하나로 성연대륙을 수호하고 역외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지어졌단다.”
적염노선은 검은색 누각을 가리킨 뒤, 대천루로 향했고 목진 등은 바로 그를 뒤따랐다.
대천루는 아주 널찍했는데 1층 허공에 떠 있는 수정에서 밝은 빛을 발해 누각 전체를 비췄다.
그리고 방대한 누각의 한 구석은 주점처럼 떠들썩했는데 목진은 그곳을 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그 구역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강력한 영력 파동을 내뿜는 것을 발견했는데 살기까지 깃든 것으로 보아 생사를 넘나드는 대결을 자주 하는 사람들 같았다.
목진 등이 나타나자 자연스레 이목을 끌었고 다들 낙리의 미모에 넋을 잃었다.
낙리 정도면 어딜 가든 주목을 받기 마련인데, 살벌한 지역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시선이 훨씬 거침없었다.
이에 낙리는 금세 인상을 찌푸렸고 목진이 바로 앞에 나서서 살기를 내뿜은 채 주위를 쓰윽 훑었다.
목진도 여태껏 생사를 넘나드는 대결을 많이 겪어 뼛속 깊숙이 스며든 살기가 성연대륙 사람들 못지않았다. 다만, 그는 평소에 이를 잘 숨기고 다녔는데 일단 드러내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목진이 나서자 사람들은 그의 살기에 흠칫 놀라 눈길을 거두더니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그를 바라봤다. 젊은 청년의 엄청난 살기에 깜짝 놀란 것이다.
“저긴 호객 구역이란다. 성연대륙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 역외사족을 잡으려면 반드시 무리를 지어야 한단다.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지.”
“저기 서 있는 사람들은 실력이 제법 뛰어나단다. 그중에는 상위 지지존도 제법 있단다.”
말을 마친 적염노선은 거대한 누각의 깊숙한 곳에 놓인 매대로 향했다. 매대 뒤쪽 벽에 있는 영력 광막에 수많은 이름이 나타나곤 했는데 이는 외부 주마방의 변경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곳이었다.
매대에는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엎드리고 있었다.
퍽!
적염노선이 매대를 힘껏 때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이, 그만 자고 일어나 일이나 하게!”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눈을 겨우 뜨고 앞에 서 있는 적염노선을 힐끗 보고는 괜히 투덜댔다.
“어이, 술꾼. 아직 죽지 않았는가?”
“허허, 내가 어찌 자네보다 먼저 죽을 수 있겠나?”
적염노선은 목진 등을 불러와 말을 이어갔다.
“이 아이들에게 주마령을 주게.”
“자, 이 노인네가 바로 이곳의 책임자란다.”
적염노선은 목진 등한테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소개했다.
목진 등은 순간 멈칫했다. 이곳의 책임자가 이렇게 수수하게 생긴 사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적염노선이 소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를 일반 접대원으로 알았을 것이다.
하여 목진 등은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자세히 살폈는데 영력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영력을 수련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영력을 이토록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이는 천지존 밖에 없었다.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도 이렇게까지는 해내지 못할 것이다.
목진과 낙리는 몰래 혀를 내두르며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바라봤다. 적염노선이 대천궁을 상징으로만 생각하지 말라고 한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대천궁 사람들의 실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때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눈을 비스듬히 뜬 채 목진 등을 쓰윽 훑더니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또 태령통천광 때문에 왔나 보군. 그런데 자네가 데려온 사람들은 전부 실패하지 않았는가?”
적염노선은 순간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가 데려온 사람만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이에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난 그저 이번엔 왜 하위 지지존경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를 데려왔는지 궁금했던 것뿐이네.”
그는 어떻게 적염노선이 영계가 아닌 낙리를 선택했는지 알아차렸을까?
“실력만 뛰어나다고 태령통천광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천부적 재능과 운도 좋아야 하네. 저 아이는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네.”
“그렇단 말인가?”
적염노선이 입을 삐쭉 내밀며 한 말에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손을 휘익 저었다. 그러자 목진 등은 순간 손끝이 찌릿해지더니 피 네 방울이 날아갔다.
목진 등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바라봤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피를 취한 수단은 상당히 포악했다.
목진 등의 영력 방어를 무시한 채 체내의 피를 쉽게 조종했기 때문이었다.
“허허.”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히쭉 웃으며 목진 등을 바라보자 네 갈래 영광이 날아올라 피 네 방울을 감싼 뒤, 영패 네 개를 이뤄 목진 등에게 향했다.
건네받고 보니 검은색 영패에 빨간색으로 ‘주마’ 두 글자가 새겨졌고 최하단에 저급 주마사라고 적혀 있었다.
“너희가 역외사족을 죽인 뒤, 마혼을 부숴 주마령에 주입하면 그에 상응한 주마점을 획득할 거란다. 주마령은 너희 정혈로 제련한 것이니 본인만 자기 주마점 수집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단다. 다른 사람이 네 주마령을 얻었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단다.”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말을 마치자 주마령을 만지작거리던 목진 등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적염노선은 목진 등이 주마령을 수중에 넣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한테 나지막하게 물었다.
“이번에 성연에 온 세력이 몇 군데나 되는가?”
“마침 한 군데 왔군. 어디 보자, 북역(北域) 온가인 것 같은데…….”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히쭉 웃으며 한 말에 적염노선이 돌아서 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한 무리가 갑자기 대천루에 들어왔는데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이 맨 앞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다.
“온가네 하파(河婆)가 아닌가?”
목진 등도 어리둥절하여 고개를 들고 기세등등하게 대천루에 들어온 무리를 쳐다봤다. 그때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 뒤에 서 있는 늘씬한 여인이 눈에 확 꽂혔다.
목진과 낙리는 여기서 그녀를 만날 줄 몰라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은 영력 파동을 전혀 내뿜지 않았지만 그녀를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연대륙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사람들은 눈치가 빨라 그녀의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길은 대부분 그 뒤에 서 있는 여인에게 머물렀다.
자주색 옷을 입은 여인은 늘씬한 몸매에 다리가 곧고 길었는데 다리에 적당히 들러붙는 긴 바지를 입어 더 매혹적으로 보였다.
그녀의 얼굴은 유난히 아름다웠고 별처럼 맑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무한의 청춘과 활력을 발산했다. 하나로 묶인 머리는 걸을 때마다 하늘거리는 것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그녀가 가볍게 올린 입꼬리에는 자신감이 듬뿍 담겨 있었다.
대천루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비록 은발 여인이 훨씬 예쁘긴 하지만 그녀가 가진 멋스러움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에게 추근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의 시선에 다들 바로 눈길을 거뒀다.
목진과 낙리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오대원 대전 때 만났던 온청선이었다.
“저 아이가 북역 온가 사람이었다니.”
낙리가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북역 온가는 지난 천년 사이, 대천세계에서 유명해진 세력으로 낙신족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만 실력으로 따지면 이미 대천세계의 정예급 세력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온청선은 왜 만봉령원에 갔을까?”
목진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북역 온가가 만봉령원의 뒷배라는 소문이 있어.”
낙리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목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온청선이 만봉령원의 학생이 된 것이었다.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 무리는 어느새 매대 앞에 도착했다. 무심한 듯 주위를 훑던 온청선은 그제야 목진과 낙리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온청선 옆에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는데 그녀가 멈춰 서자 다들 같이 멈춰 섰다.
“청선아, 왜 그래?”
온청선 옆에 서 있던 하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내는 훤칠하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체내에서 내뿜는 강력한 영력 파동으로 보아 반보 대원만급 강자로 온가에서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듯했다.
그런데 온청선은 못 들은 척 미소를 짓고는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낙리? 목진아?”
“청선아, 오랜만이야.”
낙리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너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
목진도 이내 감탄하며 웃었다. 지난날 오대원 대전에서 목진과 낙리, 온청선은 협력 관계로 많은 대결을 함께 이겨냈다.
오대원 대전이 끝나고 흩어진 후로는 더 이상 마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성연대륙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정말 너희구나!”
온청선은 이내 화색이 되어 달려가 두 팔을 벌렸는데 목진이 끌어안으려 하자 갑자기 온청선의 팔꿈치가 그의 가슴팍을 힘껏 때렸다.
이에 목진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날 안으려고? 꿈도 야무지지.”
온청선은 목진을 흘겨보더니 낙리의 가녀린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어갔다.
“낙리야, 왜 이렇게 예뻐졌어? 못 알아볼 뻔했어.”
낙리는 북창령원에 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더구나 그동안 겪은 일과 낙신법신의 영향으로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워졌다.
낙리도 온청선을 만나서 기쁜 듯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도 북창령원에서 보냈던 시간과 친구들이 그리웠다. 낙리는 이를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넌 왜 아직도 목진과 함께 있는 거야? 저 녀석이 정녕 너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온청선은 목진을 흘겨보더니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낙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목진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고 낙리는 피식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청선아, 그들은 네 친구야?”
그때 하얀색 도포를 입은 훤칠한 사내가 다가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녕, 난 온자우(溫子羽)라고 해. 나도 온가 사람이야.”
사내의 진심 어린 호의에 친근함이 느껴졌는데 온청선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목진과 낙리는 이를 발견하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목진이라고 해.”
“난 낙리야.”
반면, 온청선이 노려보자 온자우는 쓸쓸하게 웃기만 했다.
그들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빨간색 치마를 입은 늙은 여인도 다가와 낙리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예쁜 아이로구나.”
잇따라 그는 목진을 힐끗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목진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목진한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사내에게는 전부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