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8화. 진동
성연성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매대 앞에 멍하니 서 있던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진천의 아래쪽에 새로 생긴 황금색 글자를 보더니 눈가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목진이라면…… 설마 그 술꾼이 데려왔던 녀석인가?”
“주마령을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저급 주마사가…… 설마…….”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무언가 생각난 듯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급 주마사에서 바로 주마왕이 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천마제 한 명을 죽이고 그의 잔혼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목진은 상위 지지존일 뿐이었다. 천마제를 죽이기는커녕, 상대방이 그를 죽이는 것이 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설마 상고의 성연에 봉인되었던 천마제의 잔혼 중 한 명을 죽였단 말인가?”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고서는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녀석은 정말 운이 좋군.”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록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진정한 천마제를 죽인 것은 아니지만 목진의 신분이 확실해지면 대천궁에는 역사상 실력이 가장 뒤처지는 주마왕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일은 윗선에 보고해야겠군.”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건 대천궁에 정말 중요한 일이라 그마저도 결론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니 윗선에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마친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다시 주마비의 두 번째 줄에 나타난 황금빛 글자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일은 그도 처음이었다.
이와 동시에, 성연성의 한 정원에 있던 세 사람도 고개를 들고 주마비를 바라봤다.
“목진이라면 설마 그 죄인이 아닌가?”
은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황금빛을 발하는 글자를 보더니 안색이 어두워져 묻자 옆에 서 있던 검은색 도포를 입은 노인도 인상을 확 찌푸리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그들은 부도신족의 묵은 장로와 흑광 장로였다.
“그럴 리가!”
묵은 장로가 흠칫 놀라 외쳤다. 그는 대천궁의 주마왕이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네. 상고의 성연에 봉인된 천마제의 잔혼이 있지 않은가?”
흑광 장로가 머뭇거리다가 한 말에 묵은 장로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목진이 계승을 찾아냈단 말이 아닌가? 천마제의 잔혼이 있는 곳에 네 명의 성급 천지존 중 한 명이 있을 테니 말이다.
목진이 찾아낸 계승은 부도노조의 계승일 가능성이 컸다.
그럼 목진이 팔부부도를 획득할 거란 말인가?
이러한 생각에 두 사람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반면, 옆에 서 있던 궁장을 입은 청훤 장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며 주마비를 바라봤다.
“주마왕이 되었다니…….”
목진이 정말 대천궁의 주마왕이 되었다면 신분과 지위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천궁에서는 절대 이런 식으로 주마점 만 점을 획득한 목진을 주마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네. 새로운 주마왕의 실력이 상위 지지존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대천궁의 꼴이 얼마나 우스워지겠는가?”
흑광 장로가 히쭉거리며 한 말에 청훤은 바로 그를 쏘아봤다.
“이건 흑광 장로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 대천궁의 뜻을 따라야 하네.”
그 말에 흑광 장로는 흠칫하더니 이내 정색하며 옷깃을 휘날렸다.
“아무튼 우리는 절대 팔부부도를 그 죄인한테 넘겨주지 않을 것이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부도신족도 대천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네.”
말을 마친 그는 이내 살기를 품었다.
“흑광, 뭘 하려는 건가? 자네가 나서면 대장로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나 다름없네!”
청훤도 이내 정색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여동생이 완전히 등을 돌렸으면 하는 건가?”
이에 옆에 서 있던 묵은 장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그날이 온다면 우리는 대장로의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네. 대장로께서도 분명 우리를 이해할 것이네.”
“대장로께서 너무 오냐오냐하니까 청연정이 여태껏 겁도 없이 감히 덤빈 것 아닌가!”
“난 절대 저 녀석이 눈앞에서 날뛰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네!”
흑광과 묵은의 말에 청훤은 너무 화가 나 얼굴마저 하얗게 질린 채 웅장한 영력을 끌어올렸다. 청훤은 공간을 부수며 녀석들에게 향했다.
“청훤 장로, 자네 뭘 하려는 건가?”
흑광과 묵은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나며 강력한 영력을 끌어올려 청훤의 영력 압박을 손쉽게 막아냈다.
“청훤 장로, 자네 설마 저 녀석 편을 들려는 건가? 정말 그렇다면 청맥도 함께 벌을 받을 것이네!”
묵은 장로의 말에 청훤은 이를 악물며 씩씩거리더니 한참 지나서야 영력을 조금씩 거두고 녀석들을 노려봤다.
“당신들 마음대로 할 거면 그 후과는 스스로 감당하게!”
“내 동생이 눈이 뒤집히면 대장로만으로는 절대 당신들 같은 멍청이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네!”
말을 마친 청훤이 바로 정원을 떠나자 흑광과 묵은은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가 이내 콧방귀를 뀌었다. 그들은 아무리 청연정이 강해도 그녀 정도는 부도신족이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절대 목진한테 팔부부도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목진을 부도신족으로 데려가 엄벌을 받게 할 것이다!
“내가 정말 해냈다니!”
제단에 서 있던 목진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금광을 발하는 주마령을 바라봤다. 그는 그 위에 적힌 ‘주마왕’이란 세 글자에서 엄청난 위엄을 느꼈다.
그 역시 이러한 결과에 적잖게 놀랐다. 목진이 스스로 천마제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실패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성공할 줄이야…….
“하하, 상위 지지존급 실력인 주마왕이 나타났구나.”
부도노조의 의식이 옆에 나타나 목진 수중의 황금색 영패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대천궁은 상고 때부터 존재한 조직이라 부도노조도 주마왕의 신분과 지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천궁의 주마왕은 대충 발만 한 번 굴러도 대천세계 전체가 들썩일 만큼 엄청난 존재였다.
그런데 갑자기 상위 지지존 밖에 안 되는 주마왕이 생기다니. 이건 여태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천궁 역사상 실력이 가장 뒤처진 주마왕이 생겼구나.”
부도노조가 피식 웃으며 한 말에 목진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지금 상황이 꿈만 같았지만 천마제를 상대한 것은 부도노조가 옆에서 부추겨 한 일이었다.
목진은 괜히 부도노조를 힐끗 노려보고는 주마령을 거두고 봉마도를 바라봤다. 혈강 천마제의 그림자가 곧 사라질 것 같았다.
퍽.
그때 무언가 부서진 소리가 들리더니 마의 그림자가 빠르게 작아졌고 목진이 느꼈던 치명적인 위협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혈강 천마제가 완전히 사망했다.
“날 풀어줘요!”
혈강 천마제는 사망했지만 마의 그림자는 여전히 움직이며 나지막하게 울부짖었다.
“시천유의 목소리에요.”
목진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말했다. 혈강 천마제의 잔혼이 부서지자 시천유는 다시 자신의 육신을 장악하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
부도노조가 목진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죽여야죠.”
목진은 서슴없이 답했다. 시천유는 역외사족일 뿐만 아니라 수단이 매서워 잡았을 때 반드시 없애야 했다.
“그럼 죽이자꾸나.”
부도노조는 하찮은 벌레를 바라보듯 시천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천유는 그한테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봉마도 속 시천유는 미친 듯이 발버둥을 쳤지만 제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목진, 자네가 오늘 나를 죽이면 시마족에서 절대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네!”
녀석의 한 맺힌 말에 목진은 피식 웃기만 했다. 대천세계와 역외사족은 원래부터 천적이라 시천유가 아니어도 양자는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럼 난 대천세계에서 시마족을 기다리고 있겠네.”
목진이 히쭉거리며 대꾸했다. 그 말에 상대방이 또 뭐라 하려 했는데 부도노조가 나서서 먹물 자국을 지우듯 봉마도에 생긴 시천유의 그림자를 완벽히 지웠다.
이렇게 시천유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잇따라 봉마도에서 지극히 옅은 흑기가 피어올라 목진 주위를 맴돌았다.
이에 목진은 흠칫 놀라 영력을 끌어올려 흑기를 없애려 했는데 흑기는 그의 몸에 닿자마자 빠르게 사라졌다.
“선배님, 이건 뭔가요?”
목진은 자신이 무탈한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이건 사망의 기운이다. 하지만 너한테 아무런 타격도 없단다. 대신 시마족 사람들은 네 몸에 깃든 기운을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거란다. 이건 녀석의 수단으로 시마족에게 자신을 위해 복수하라고 남긴 자국 같구나.”
부도노조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목진은 시마족이 두렵지 않았다. 저들이 일단 대천세계에 나타나면 목진이 나서기도 전에 다른 천지존들이 한걸음에 달려가 녀석들을 없앨 것이다.
그는 시마족 따위가 겁도 없이 감히 대천세계에 뛰어들 거라 여기지 않았다.
“없앨 수는 없나요?”
그는 비록 두렵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질문을 건넸다.
“이건 저 녀석의 본명 마혼을 불태워 형성된 것으로 내가 살아 있었으면 가능했을 텐데 지금은 어렵겠구나.”
그 말에 목진은 어깨를 들썩이더니 봉마도로 눈길을 돌렸다.
“혈강 천마제가 완전히 죽었겠죠?”
천마제의 생명력은 상당히 질겼기에 그는 왠지 마음이 안 놓였다.
“네가 본 건 녀석의 잔혼이었는데 천제검이 있어 녀석은 완전히 죽었단다.”
부도노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더니 손을 가볍게 들었다. 그러자 천제검이 한 줄기 검광이 되어 날아와 다시 수수한 수정 장검으로 변했다.
“천제검은 전성기 시절, 성급 절세의 성물이었는데 지금은 힘이 다 닳았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이 흘러 힘을 되찾는다고 해도 겨우 선급 밖에 안 될 것이다.”
부도노조는 천제검을 목진한테 돌려주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성급 절세의 성물은 성급 천지존한테도 지극히 진귀한 존재였다. 부도노조 수중의 봉마경도 겨우 선급일 뿐이었다.
부도노조의 말에 목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제검을 건네받았다. 천제검은 완전히 빛을 잃었고 표면에 쌓인 먼지는 아무리 닦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천제검이 힘을 다 써서 그가 천지존경에 이르기 전까지는 다시 오늘 같은 검광을 발하지 못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 내가 천지존이 되면 다시 네 힘을 되찾아줄게.”
목진은 검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위잉.
천제검은 목진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가볍게 떨며 오래된 검음을 냈다.
목진은 천제검을 거두고 주위를 쓰윽 훑었는데 제단 주위에 서 있던 역외사족 강자들은 황급히 도망가고 있었고 대천세계의 강자들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다만, 일부 강자들은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제단 쪽을 바라봤다.
그중,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은 현라와 묵심으로 그들은 여전히 목진이 부도노조한테서 팔부부도의 계승을 얻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선배님, 제가 이번 임무를 잘 완수했나요?”
목진은 녀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바로 부도노조한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최대한 빨리 팔부부도를 수중에 넣고 싶었다.
부도노조 역시 바로 눈치채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목진의 손을 빌려 혈강 천마제를 다시 봉인하려 했을 뿐인데 덕분에 녀석의 잔혼을 완전히 없앴으니, 이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