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1화. 반보 대원만급
잠시 후, 격렬한 진동이 갑자기 사라지자 빠르게 제단으로 향하던 백형아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제단의 중심에 놓인 석비에서 웅장하고도 오래된 빛이 하늘 높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빛은 한데 모여 그림자를 이루더니 중년 사내의 모습을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하게 생긴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남성미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그리운 눈빛으로 낙신법신을 바라봤다.
“만 년이 지나 내가 다시 낙신법신을 보게 되다니…….”
그는 낙신법신을 보며 마음속으로 그녀의 얼굴을 그렸다.
“태령 선배님, 사성탑이 이미 하나를 잃어 선배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낙리가 유리알 같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자 태령노조의 의식이 빠르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넌 낙신과 무슨 관계냐?”
“낙신은 제 조상님이십니다.”
낙리가 공손하게 답했다. 태령노조는 가볍게 웃더니 낙리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다만, 낙리는 자신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태령노조가 자신이 아닌 낙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이곳에 잠들었던 의식이 다시 깨어나는 날이 있다니…… 그리고 나를 깨운 사람이 그녀의 후손이라니, 그녀는 늘 우리가 인연이 없다고 했는데 그런 것 같지 않구나.”
태령노조가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낙리는 몰래 혀를 내둘렀다. 보아하니 태령노조는 낙신을 연모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는데 아쉽게 구애에 실패한 듯했다.
다행히 태령노조의 의식은 그날의 일에 오래 빠져 있지 않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쓰윽 훑더니, 제단 주위에 잔뜩 모인 역외사족 강자들을 발견하고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창조의 의식이 부서졌단 말인가…… 사성탑 중 하나가 무너졌다니…….”
태령노조는 영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말했다.
“혈강 천마제의 잔혼이 완전히 부서졌다고? 부도노조의 수단이 이렇게 드셌단 말인가?”
낙리도 깜짝 놀랐다. 부도노조가 봉인했던 천마제의 잔혼이 완전히 사라졌다니?
“분명 목진이 한 거야!”
낙리는 보지는 못했지만 목진이 해냈을 거라 생각했다.
“네가 나를 제때 깨웠구나. 역외사족 녀석들이 천마제의 잔혼을 구해내면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들 창조처럼 되었을 거란다.”
태령노조는 미소를 지으며 낙리를 바라봤다. 그는 네 사람 중 가장 심하게 다쳐 남은 의식도 제일 약했다. 하여 일단 그가 봉인한 천마제의 잔혼이 풀려나면 부도노조처럼 녀석을 완전히 죽일 능력이 없을 것이다.
말을 마친 태령노조가 손가락으로 낙리의 미간을 가볍게 찍자 손끝에서 영광을 방출해 그녀의 미간에 스며들었다.
위잉.
잇따라 낙리는 온몸을 파르르 떨더니 웅장하기 그지없는 영력이 체내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그녀의 힘이 아니었다.
“나를 도와 상황을 정리하자꾸나.”
태령노조는 낙리의 어여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이에 낙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낙신법신의 어깨 위에 올라타 차가운 눈빛으로 혼잡한 전장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쏴아아.
낙신법신은 한 갈래 빛을 내뿜었는데 이는 순식간에 폭등해 수만 리 정도의 웅장한 영력이 깃든 은하수를 이뤘다.
은하수가 요동치더니 용상, 온자우 등과 치열하게 싸우던 네 명의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들을 공격했다. 그러자 녀석들은 미친 듯이 피를 토하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런데 낙리는 녀석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눈부신 은하수가 전장을 휩쓸도록 했다. 은하수에 휩쓸린 역외사족 강자들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고 아수라장이었던 전장은 태령노조의 의식의 힘을 빌린 낙리의 등장에 대역전을 이뤘다.
역외사족은 끊임없는 패배에 너무 두려운 나머지 도망을 쳤고 대천세계의 강자들은 파죽지세로 추격전을 벌였다.
제단 아래에 멈춰 선 백형아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쥔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낙리와의 대결에서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백형아는 태령고족의 소환법으로 깊이 잠든 태령노조를 깨우지 못했고 그가 낙신법신의 파동을 느끼자마자 깨어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허공에 떠 있던 낙리는 점차 명확해지는 대결의 결과를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낙리는 체내의 웅장하기 그지없는 영력이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마지막 한 갈래 영력이 사라지자 웅장하고도 오래된 정보가 뇌리에 스며든 것을 발견하고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이것이 바로 태령통천광이군…….”
* * *
파괴된 탑에 조용히 앉아있던 목진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는데 눈동자에서 강력한 수정의 빛이 폭발하며 영롱한 부도탑이 나타났다.
위잉.
성부도탑은 목진의 앞쪽에서 부단히 회전하며 커지더니 그와 부도노조의 의식마저 감쌌다.
이에 목진이 고개를 들고 수정의 빛을 발하는 탑을 둘러봤는데 반듯한 탑 벽에 그림 여덟 폭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포악한 모습을 한 채 그윽하기 그지없는 살기를 내뿜는 그림들은 일반 사람이었다면 힐끗 보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목진은 이를 보고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팔부부도란 말인가?”
그는 아직까지 자신이 대천세계의 36가지 신통 중 하나인 팔부부도를 획득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 등급의 신통은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는 물론이고 성급 천지존이라도 탐낼 물건이었다.
잇따라 여덟 폭의 그림을 보던 목진이 마음을 움직이자 그림들은 영광을 발하며 탑 벽에서 벗어나 커다란 실체를 이뤘다. 그리고 무서운 힘을 방출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이 힘은…….”
목진은 팔부부도의 힘을 잠시 느끼고는 활짝 웃었다. 그가 지금 다시 시천유를 상대한다면 일단 부도탑에 가두고 녀석을 팔부부도로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라와 묵심은 더 이상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
여덟 명의 수호신의 힘은 천지존 이하의 모든 강자를 손쉽게 짓밟을 수 있었다.
현재, 목진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절세의 신통을 두 가지나 확보해 천지존 이하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역시 성부도탑은 대단하구나. 그 신성한 힘이 아니었다면 넌 녀석들을 이토록 쉽게 장악하지 못했을 거란다.”
옆에 서 있던 부도노조도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팔부부도의 제련 재료는 진정한 마제라 상당히 포악해 목진의 성부도탑이 사악한 힘을 스스로 물리치고 봉인과 제압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몇 년 동안 공을 들여 부도핵(浮屠核)을 배양해야 비로소 그의 부도탑에 낙인이 생겼을 것이다.
이에 목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팔부부도의 힘을 끌어올릴 때, 그는 그 속에 깃든 사악한 힘이 충분히 느껴졌다. 만약 성부도탑이 그 힘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목진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은 팔부부도 같은 절세의 신통을 얻는다고 해도 수련에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강제로 수련하려 하면 오히려 큰 화를 불러올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목진은 부도노조를 바라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노조가 아니었다면 목진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 해도 팔부부도를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절세의 신통을 계승해줘서 고맙구나.”
부도노조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목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은 훨씬 깊어졌다.
“참, 선배님, 사성탑의 상황은 어떤가요?”
목진은 갑자기 낙리가 생각나 황급히 물었다.
“창조를 제외하고 다른 두 곳은 무사하단다. 지금쯤 사성탑은 다시 안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그리고 창조를 죽이고 도망간 천마제의 잔혼도 언젠가는 사성탑의 힘에 못 이겨 완전히 죽을 거란다.”
부도노조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보아하니 오늘의 위기는 잘 해결된 모양이었다.
목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럼 낙리 쪽도 승리했다는 말인데 태령통천광은 과연 누가 가졌을까?
한편, 부도노조는 고개를 들고 파손된 부도탑을 한참 쳐다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 부도탑에 영력이 남아 있을 때 너한테 뭐라도 더 주마.”
말을 마친 부도노조가 옷깃을 휘날리자 부도탑에서 실체 같은 영광이 모였다. 이는 진정한 영광으로 영력이 한데 모여 실체를 이룬 것이었다.
위잉.
영광이 휘몰아치며 날아가더니 목진의 머리에 닿자마자 요동치는 영력으로 변해 관정의 방식으로 체내에 스며들었다.
목진은 그제야 노조의 의도를 파악했다. 노조는 자신의 부도탑에 남아 있는 힘을 전부 목진의 체내에 주입해 실력 향상에 도움을 주려 하고 있었다.
영광이 부단히 목진의 체내에 스며들자 파손된 부도탑은 놀라운 속도로 어두워졌고 목진은 수정 같은 빛을 발했으며 온몸의 피와 살은 웅장한 영력의 세례에 점차 영롱하고 투명해졌다.
심지어 그의 육신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이는 육신에 깃든 이물질이 완전히 사라져 나타난 현상이었다.
잠시 후, 목진이 다시 눈을 뜨자 노조의 부도탑은 곧 부서질 것처럼 균열이 잔뜩 생겼고 옆에 서 있던 부도노조의 의식도 한껏 흐릿해졌다.
잇따라 목진이 자신의 몸을 살폈는데 체내의 피와 살에서 영롱한 빛을 발하더니 강력하기 그지없는 영력이 경맥을 타고 부단히 흘렀다.
“반보 대원만급이라……”.
목진은 금세 자신의 경지를 알아챘는데 대원만급에 이르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은 힘으로 육신을 제련하고 체내의 영력과 융합해 반보 대원만급에 이르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이란다.”
부도노조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너는 욕심이 많으니 언젠가 나보다 강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 절대 억지로 경지를 돌파하여 네 수련에 해를 끼치지 않길 바란다.”
목진은 괜히 머쓱하여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는 확실히 부도노조께서 기분이 좋아 경지를 끌어올린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이는 최대한 빨리 강해지는 법이긴 하나 결코 수련에 좋은 일은 아니었다.
수련은 차근차근해야 덧나지 않는 법이었다. 더구나 목진은 천부적 재능이 뛰어나 수련 속도가 빠른지라 강제로 경지를 끌어올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연스레 경지를 돌파하면 되었다.
기반을 잘 닦아 놓아야 앞으로 천지존경에 이를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성급 천지존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보 대원만급이라…… 내가 어느 정도 수련한 뒤, 성령단을 먹으면 완벽한 상태로 지지존 대원만급에 이를 수 있겠군.”
목진은 노조 몰래 중얼거렸다.
“이제 헤어지자꾸나. 난 너한테 줄 수 있는 모든 걸 줬단다.”
부도노조가 손뼉을 치며 피식 웃자 목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목진이 부도신족 사람한테 이토록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도노조가 처음이었다.
이에 부도노조는 똑바로 서서 목진의 절을 받았다. 혈맥으로 따지면 그는 목진의 조상님이라 큰절을 받아 마땅했다.
“목진아…….”
“네.”
목진이 공손하게 대답하자 부도노조는 그를 한참 쳐다보더니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너와 부도족 사이의 원한이 얼마나 깊든 체내에 부도족 혈맥이 깃들었다는 것만은 잊지 말거라. 언젠가 부도신족에 파멸의 위기가 닥치면 한 번쯤은 도와줬으면 하는구나.”
목진은 흠칫 놀랐다. 그는 아직 상위 지지존일 뿐이고 그한테 목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데 그런 말씀을 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그는 순간 마음이 복잡미묘해졌는데 희망으로 가득 찬 노조의 눈빛을 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도노조는 그제야 한시름 놓듯 미소를 짓더니 육신이 점차 흐릿해졌고 부도탑에서 바위가 부단히 떨어졌다. 부도탑은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이만 보내주마…… 사성탑의 임무는 잘 완성하였다.”
말을 마친 부도노조가 옷깃을 휘날리자 한 갈래 영광이 목진을 감쌌고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다가 금세 그를 집어삼켰다.
쿠쿵!
목진이 떠나자 부도탑은 바로 무너졌다. 바위가 떨어지자 한때 대천세계를 들썩이었던 부도탑은 폐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