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5화. 이별
“정말 태령고족에 갈 거야?”
목진은 낙리가 적염노선과 태령고족으로 가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정작 낙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낙신족은 이미 되살아났고, 혈신족은 큰 타격을 입었으니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거고, 우리 스스로 쇠퇴하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하지만 목진은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태령고족에 갈 생각이 없었던 낙리의 생각이 갑자기 왜 바뀐 걸까?
목진은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낙리를 노려보며 물었다.
“설마 나 때문에 태령고족에 가려는 거야?”
낙리는 흠칫하더니 더는 목진을 속일 수 없을 것 같아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답했다.
“지금의 난 너무 약해. 너한테 전혀 도움이 안 돼.”
일전에 부도신족이 목진을 괴롭히려 했을 때, 낙리는 화가 났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낙신법신을 수련했다고 해도 천지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상고의 성연에 들어가 보니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볼품없는지 깨달았다. 이에 낙리는 목진의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걱정만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낙신족의 공주마마로 살아왔고 지금은 낙신족의 여황이지만 낙리는 절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낙리가 목진을 따라잡으려면 태령고족으로 가서 성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성녀가 되면 그녀도 태령고족에서 범상치 않은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태령고족이란 뒷배가 있으면 목진이 부도신족과 사이가 틀어졌을 때 태령고족의 힘으로 목진한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목진은 낙리의 얼굴을 보더니 바로 속내를 꿰뚫고 마음이 뭉클해졌다.
태령고족은 5대 고족 중 하나라 낙리가 태령통천광의 계승을 받았다고 해도 성녀의 자리를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어코 가기로 했다니 목진은 낙리가 고마울 뿐이었다.
“낙리야…….”
“나를 설득할 생각은 하지 마. 난 이미 결정을 마쳤어. 게다가 태령고족에서만큼은 안전할 거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어.”
낙리는 가녀린 손으로 입을 살포시 막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목진은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그는 낙리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결연한 의지를 엿보았는데 제대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하여 목진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마점으로 바꾼 천령옥수를 꺼냈다.
“선물이야. 수련에 큰 도움이 된대.”
낙리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선물을 건네받았는데 수정으로 만든 귀걸이는 상당히 정교했고 푸른색 옥수에서 지극히 순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를 흡입하니 체내의 기운이 청량해졌고 영력도 더 빨리 움직였다.
“이건 설마 천령옥수야?”
낙리는 바로 푸른색 옥수의 정체를 알아채고 흠칫 놀라 물었다. 그녀도 이 물건이 얼마나 진귀한지 알고 있었다.
“귀에 걸어봐.”
목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낙리는 수정 귀걸이를 조용히 귀에 걸었다.
하얗고 예쁘장한 낙리의 귀에 수정 귀걸이가 걸리자 낙리가 더 예뻐 보였다.
“예뻐?”
낙리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는데 그야말로 경국지색이었다.
그들은 비록 대천루의 구석에 있었지만 다들 멍하니 낙리를 바라봤다. 목진은 탐욕스러운 녀석들의 시선을 차단하며 답했다.
“앞으로는 내가 없을 땐 이렇게 예쁘게 웃지 마.”
“왜?”
낙리는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다른 사내들이 널 덮칠까 봐 그래.”
목진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낙리는 그를 흘겨보더니 점차 자신한테 가까워지는 목진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며 그를 노려봤다.
“뭘 하려는 거야?”
목진이 입을 삐쭉 내밀며 답했다.
“곧 헤어질 텐데 위로도 안 해주는 거야? 안 해주면 보내주지 않을 거야.”
낙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목진을 노려봤다. 평소 듬직하고 과묵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어리광을 부리는 거지?
그런데 한참 떨어져 있을 걸 생각하니 낙리도 벌써 목진이 그리워지는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손을 거두며 서서히 눈을 감았다.
목진은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낙리의 얼굴을 보자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입술을 맞댔다.
쪼옥!
두 사람은 비록 구석에 서 있었지만 다들 그녀에게 주목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입을 맞추자 하나둘씩 씩씩거리며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마사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어찌 목진을 마음에 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목진은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단 말인가?
정작 목진은 이를 전부 무시한 채 두 사람만의 낭만을 즐겼다.
그러다 낙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목진을 밀쳐냈는데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하!”
낙리가 흘겨보자 목진은 히쭉거리더니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낙리는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에헴.”
그때 적염노선이 목진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곳에서 태령고족의 성녀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런데 목진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낙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적염 선배님.”
“그걸 말이라고…….”
적염노선은 입을 삐쭉 내밀며 말을 이어갔다.
“걱정하지 말거라. 낙리는 태령고족에서만큼은 너보다 수련 속도가 더 빠를 것이다.”
목진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낙리의 천부적 재능에 낙신법신, 태령통천광까지 있으니 태령고족에서 분명 전력을 다해 그녀를 배양할 것이다. 그녀는 머지않아 천지존경에 이를 것이다.
“그럼 인제 떠나자꾸나.”
적염노선의 말에 낙리는 목진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적염노선이 옷깃을 휘날리자 허리에 찬 빨간색 조롱박이 순간 커지더니 두 사람을 태웠고 그들은 한 줄기 빛이 되어 멀리 날아갔다.
목진은 두 사람이 떠나간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온청선이 와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목진아, 상고의 성연 쟁탈전이 끝났으니 우리도 이만 온가로 돌아가야 해.”
온청선이 생긋 웃으며 말했고 온자우도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언젠가 시간이 있으면 온가에 놀러 와.”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온청선 등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렇게 온가네 하파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빠르게 떠났다.
목진은 온청선 등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서서 기지개를 켜며 영계와 용상을 바라봤다.
“우리도 이만 갑시다. 일단 천라대륙으로 돌아갑시다.”
어느덧 천라대륙을 떠난 지도 한 해가 넘었는데 하위 지지존이었던 목진은 어느새 반보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목진은 만다라가 있어야 목부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었는데 지금은 천지존 아래 최강자나 다름없었다.
“목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목진은 가볍게 웃으며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 * *
천라대륙 북계에 있는 목부의 대전에 수많은 강자가 모여 있었다. 현재, 목부는 북계에서 가장 방대한 세력으로 패주나 다름없었다. 대부분 세력은 이를 섬기기로 했고 충성을 맹세하는 강자도 점차 많아져 날이 갈수록 강대해졌다.
그런데 대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대전의 가장 높은 곳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왜소한 체구의 만다라가 앉아있었는데 그녀는 목부의 대리인으로서 북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정작 목부의 부주인 목진은 목부를 세우자마자 북계를 떠나 여태껏 돌아오지 않아 다들 만다라는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목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만다라의 아래편에는 유천도, 만성노조, 유명궁주 등 북계의 노참들이 서 있었고 더 아래쪽에는 목부의 기타 강자들이 서 있었는데 그 규모는 대라천역 때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때 만다라가 손으로 손잡이를 가볍게 때리며 주위를 쓰윽 훑더니 한참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자운종의 사절단이 곧 목부에 도착한다고 들었다.”
대전은 순간 조용해졌고 다들 자운종이란 말에 두려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천라대륙은 대천세계의 엄청난 대륙 중 하나라 땅이 상당히 커 동, 서, 남, 북, 중 등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누고 북계는 북역 중 자그마한 곳일 뿐이었다.
비록 목부는 북계의 패주가 되었지만 북역에서 놓고 보면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반면, 만다라가 언급한 자운종은 북역의 3대 패주급 세력 중 하나였다.
자운종의 장로들은 전부 지지존 대원만급에 이르렀다고 들었는데 이것만 봐도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만다라 한 사람으로 버티고 있는 목부는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천라대륙은 너무 컸다. 이들이 상대했던 대하황조와 성마궁도 비록 유명하긴 하지만 자운종 같은 세력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여 목부의 강자들은 자운종이란 말에 이토록 놀란 것이었다.
“자운종에서 뭘 원하는가?”
잠시 후, 아래쪽에 서 있던 유천도가 이내 정색하며 묻자 만다라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뭐겠는가? 우리 목부가 충성을 맹세하길 원하네. 북역의 패주 쟁탈전을 곧 시작할 거라 자운종은 나머지 양대 패주 세력과 다투기 위해 앞잡이를 마련하려는 것이네.”
“북계에 여태껏 패주 세력이 없어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뿐이고 지금은 목부가 북계의 패주가 되었으니 당연히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네.”
만다라의 말에 다들 안색이 어두워졌다. 목부는 북계를 통일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지위와 권리를 누리지도 못했는데 벌써 자운종의 눈에 띄었다.
“북역 패주 쟁탈전은 잔혹하기 그지없네. 이는 3대 패주 세력의 전장인데 매번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와 비슷한 세력이 수도 없이 사라졌다네. 우리가 함부로 참전했다가…….”
만성노조의 말에 천사로귀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제안을 거절하면 자운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목부가 그럴 자격이나 있는가?”
“그렇다고 자운종 때문에 죽을 수는 없지 않나!”
* * *
대전에 모인 강자들은 말다툼을 벌였다. 다들 자운종 사절단의 도래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모양이었다.
그 광경에 만다라도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녀는 북계를 통일해 목부를 보다 강한 세력으로 만들려는 것뿐이었는데 자운종의 눈에 띌 줄 몰랐다.
괜히 일만 복잡해진 느낌이었다.
“부주님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목부에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가요?”
대전에서 말다툼하던 사람들이 언짢은 듯 물었다.
“저는 목부에 가입해서부터 지금까지 신비로운 부주를 뵌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목부의 일은 전부 만다라 대인께서 관리하고 있으니까요.”
“부주님께서 너무 어릴 뿐만 아니라 하위 지지존일 뿐이라 돌아와도 크게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네.”
“그 입 다물라!”
사람들이 점차 화두를 돌리자 만다라는 이내 정색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바로 조용해졌고 다들 만다라의 위엄에 놀라 금세 시무룩해졌다.
“자운종 친구들, 왔으면 이만 모습을 드러내게.”
만다라는 한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쓰윽 훑더니 흠칫 놀라 대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허, 목부의 주인이 특이하게 생겼다고 들었는데 역시 명불허전이군요.”
만다라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대전 밖에서 누군가 히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다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만다라 대인을 비웃다니!
만다라도 화가 났지만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가운 눈빛으로 대문 쪽을 바라봤는데 그곳에서 영광이 번쩍이더니 세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그들은 보라색 도포를 입은 노인 세 명으로 우두머리는 갓난아기처럼 뽀얀 얼굴에 백발이었다. 배시시 웃고만 있는 것을 보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두 노인도 인상이 썩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