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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873화 (872/1,000)

873화. 혈마왕(血魔王)

“여왕 폐하, 저희가 한 말은 전부 사실입니다. 확실히 천신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의 실력은 막강해 단번에 철혈성의 혈마장을 죽였습니다.”

소녀가 격동되어 한 말에 다들 깜짝 놀랐고 하얀색 치마를 입은 소녀마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혈사족의 혈마장의 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혈마장을 이길 수 있었지만 단번에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흥, 천신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데 그때, 대전의 최전방에 서 있던 안색이 음침한 노인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천신 따위를 운운하기보다야 혈사족의 성노를 어떻게 잠재울지 의논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노인은 음산한 눈빛으로 주위를 쓰윽 훑더니 왕좌에 앉아있는 여왕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에 혈마장 한 명과 혈사족 강자가 그렇게나 많이 죽었으니 혈사족에서는 절대 이를 쉽게 넘어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들을 전부 철혈성으로 돌려보내고 따로 백성 500만 명을 보내 혈사족 대인들의 화를 가라앉혀야 해요. 안 그럼 결국 이곳도 지켜내지 못할 거예요!”

“대국사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혈사족의 성노를 잠재워야 하니 저들을 돌려보냅시다.”

중년 사내 세 명이 덩달아 나섰는데 그들의 눈 깊숙한 곳에서 은은한 혈광이 요동쳤다.

그들의 말에 고위층들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주먹을 꽉 쥐었지만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국사들은 여왕 다음으로 실력이 뛰어났고 전부 혈사족과 사이가 좋았으며 힘도 혈사족에게서 얻은 사람들이었다.

“여왕 폐하, 부디 도와 주십시오!”

소녀는 자신을 다시 혈사족의 악마들한테 돌려보낸단 말에 사색이 되어 여왕한테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좌에 앉아있는 여왕도 주먹을 꽉 쥐었는데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였다.

“대국사, 저들은 이곳을 최후의 구원지로 여기고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려보내다니, 너무한 것 아닌가?”

갑옷을 입은 한 사내가 안색이 확 어두워져 외치자 대국사는 그를 한껏 쏘아보며 답했다.

“대장군이 이런 사람인 줄은 몰랐군. 그럼 혈사족은 자네가 책임지고 달랠 건가?”

“멸망하더라도 당신이 제시한 방법보다는 낫다고 보네! 다들 이곳은 자기 힘으로 이곳에서 살아간다고 여기는데 해마다 500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혈사족에 바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갑옷을 입은 대장군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지만 과연 이런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이럴 바에 목숨을 걸고 저들과 싸우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나!”

말을 마친 대장군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가가 촉촉해졌고 그의 말에 고위층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왕좌에 앉아있는 백의 여왕도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손톱에 찍힌 손바닥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다들 그녀를 이 세상의 최후의 구세주라 여기는데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사실, 그녀 덕분에 이 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혈사족에서 먹이가 필요해 이들을 살려둔 것이었다.

여왕은 해마다 수백만 백성의 절망스럽고 처량한 울부짖음과 광기 어린 혈사족의 비웃음을 들을 때마다 무기력해지곤 했다. 녀석들과 함께 죽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리하면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목진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 도성은 혈사족이 일부러 남겨둔 것이었다. 저들은 대량의 음식이 필요했고 이곳은 최후의 구원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백성들이 잠시나마 그렇게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일 뿐이었다.

참 비참한 현실이었다.

목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는데 갑자기 왕좌에 앉아있던 백의 여왕이 고개를 번쩍 들고 자신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그는 완전히 허공에 스며들어 이를 발견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마 백의 여왕이 정녕 목진을 발견했단 말인가?

그때 백의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입술을 깨물며 목진이 있는 쪽을 향해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왔으면 이만 모습을 드러내시죠.”

백의 여왕의 말에 고위층들은 흠칫 놀라 경계하는 눈빛으로 목진 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주위에 숨어 있었는데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니!

해당 공간은 한참이 지나서야 파르르 떨렸고 그제야 늘씬한 소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참 예민하군.”

목진은 조금 놀란 듯한 눈빛으로 백의 여왕을 바라봤다.

목진은 대천세계의 지지존 대원만 정상급 강자들마저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하위면 사람이 발견한 것에 흠칫 놀랐다.

“저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예민하여 운 좋게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백의 여왕은 여왕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내려놓은 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녀는 상대방한테서 은은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는 위협감을 느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신비로운 청년은 상당히 강력했다.

“천신님!”

그때 대전에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녀가 외치자 다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목진을 바라봤다. 아무도 이렇게 젊은 청년이 소녀가 언급했던 천신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흥, 네가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사람이란 말이냐?”

그런데 그때, 안색이 음침한 노인이 피식 웃더니 음산한 눈빛으로 목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긴 하느냐? 감히 혈사족 사람을 죽이다니! 저들이 화라도 나면 우린 모두 너 때문에 목숨을 바쳐야 한단 말이다.”

“어딜 가든 저따위 말을 하는 배신자는 존재하는군.”

목진은 노인을 쓰윽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노인은 버럭 화를 내더니 귀신처럼 갑자기 앞에 나타난 목진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가 혈광이 요동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웅장한 힘을 끌어올려 장풍을 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늘씬한 손바닥이 공간을 가르며 다가가 그의 목덜미를 꽉 잡았다.

목진이 손을 가볍게 들자 노인은 번쩍 들렸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꼼짝도 못 했다.

“당신이 나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목진의 비아냥거림에 노인은 드디어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도 상대방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거 놓거라! 안 그럼 혈사족에서 절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게, 당신 따위를 처리하는 데 내 손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네.”

노인이 계속해서 발버둥 치자 목진은 그를 대충 내던졌다. 이에 노인은 멀리 날아가 돌기둥에 깊숙하게 박혔고 강력한 힘에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고위층 사람들은 녀석의 꼴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국사는 여왕 다음으로 실력이 강한 사람인데 신비로운 청년한테는 전혀 상대가 안 되었다.

나머지 국사들은 사색이 되어 감히 목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대전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목진과 눈을 마주친 사람은 엄청난 압박감에 꿈쩍도 못 했다.

그러다 목진의 눈길이 백의 여왕한테 닿았는데 그녀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난 이곳이 정말 최후의 피난처라 여겼는데 이곳도 결국 지옥이었군.”

목진은 백의 여왕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최후의 피난처 같아 보이는 도성은 사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백성을 혈사족에 바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백의 여왕도 목진의 말의 뜻을 알아채고 부끄러운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왕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곳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여왕의 편을 들었다.

“그만하게.”

백의 여왕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건 다 무능하여 여러분을 구하지 못한 내 탓이네.”

여왕은 고개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혈사족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왕이 되어야만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목진은 실력이 강력해 혈마왕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있으면 혈사족도 더는 그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왕의 말에 목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여인은 그를 하위면의 강자로 여긴 모양이었다.

“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네.”

목진의 말에 백의 여왕은 흠칫하더니 이내 흥분한 채 물었다.

“당신은 설마 외부에서 온 사람인가요?”

“뭔가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목진은 여인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보아하니 그녀는 대천세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고적에서 이 세상에 천외천이 있고 천외천의 강자가 역외사족의 강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백의 여왕의 말에 다른 고위층들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이에 목진이 뭐라 말하려 했는데 이상한 파동이 느껴졌다. 이에 고개를 들어 저 멀리 하늘을 바라봤다.

“녀석들이 벌써 찾아왔군.”

목진의 말에 백의 여왕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고 눈가에는 한과 두려움이 섞인 복잡미묘한 기운이 맺혔다.

잠시 후, 하늘이 어두워지며 구름이 암홍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런, 혈사족이네!”

고위층 사람들은 순간 사색이 되었고 드넓은 도성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수많은 원주민은 잔뜩 겁에 질린 듯 시뻘건 하늘을 바라보더니 제자리에 주저앉아 절망스러운 듯 소리를 질렀다.

이 세상에서 혈사족의 출현보다 무섭고 절망스러운 일은 없었다.

먼 곳에서 대량의 혈운이 휘몰아치더니 도성의 위쪽 하늘에 나타났고 그 속에서 수많은 선홍색 그림자가 사악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바라봤다.

그중, 최전방에 서 있는 네 사람은 악마의 신처럼 팔짱을 끼고 음산한 눈빛으로 드넓은 도성을 바라보며 강력한 압박감을 내뿜었다.

“혈마장이 네 명이나 오다니!”

대전에 서 있던 고위층들은 순간 사색이 되었고 다들 두려운 듯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여왕도 혈마장을 한 명밖에 상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목진은 혈마장이 아니라 그 뒤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녀석들이 공손하게 자리를 비키자 뒤쪽에 선홍색 왕좌가 나타났고 선홍색 도포를 입은 백발 사내가 느긋하게 왕좌에 앉아있었다.

상대방의 출현에 대전의 고위층들은 절망스러웠고 일부는 다리에 힘이 풀러 주저앉았으며 백의 여왕도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가볍게 떨었다.

“혈마왕마저 나섰다니…….”

“혈마왕이라…….”

목진은 상대방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녀석이 바로 혈마왕이란 말인가? 혈마왕의 실력은 북역의 자운진군 등과 비슷한 곧 천지존경에 이를 강자였다.

이 정도 실력자라면 목진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선홍색 왕좌에 앉아있던 백발 사내는 고개를 숙여 대전 쪽을 바라봤는데 꼭 도살할 짐승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주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람들을 내놓거라. 이번엔 처벌로 천만 명을 데려갈 것이다.”

녀석의 말에 다들 더없이 절망스러웠고 대전에 모인 고위층들은 너무 무서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게 우쭐거리더니 지금은 두려워졌나 보지?”

돌기둥에 박힌 노인이 껄껄 웃으며 목진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자 고위층들도 파르르 떨며 백의 여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 인제 어떡해야 합니까?”

그들은 목진을 혈사족에 바치려는 듯 힐끗거렸다.

정작 목진은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서서 백의 여왕의 결정만을 기다렸다.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조용히 서서 백의 여왕을 물끄러미 쳐다봤고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 고민하더니 깊게 숨을 들이켜며 사람들을 훑어봤다.

“여러분은 정녕 이대로 계속 살아가고 싶은가? 저들이 우리를 짐승 다스리듯 대하는 것을 정녕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말에 다들 치를 떨었다. 그들도 혈사족이 더없이 미웠지만 절대적인 힘 앞에서 별다른 수가 없었다.

“당신들의 생각이 어떻든 난 더 이상 나의 백성을 저들의 먹이로 주고 싶지 않네.”

백의 여왕은 이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하여 난 절대 사람을 건네지 않을 것이네!”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여왕은 처음 보는 청년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실패하면 그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목진도 흠칫 놀라 백의 여왕을 힐끗 쳐다봤다. 그도 여인의 과감한 결정에 제법 놀랐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혈사족에 혈마왕보다 강한 존재가 있는가?”

목진은 여왕을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혈사족에는 혈마왕이 여섯 명 있는데 그들이 바로 혈사족의 지배자입니다.”

백의 여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그렇단 말인가…….”

목진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대전 밖으로 나갔다.

“그럼 앞으로 혈사족에 혈마왕은 다섯 명밖에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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