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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875화 (874/1,000)

875화. 부탁

“벌써 그러면 안 되지……. 인제 시작인데 말이야.”

목진이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혈마왕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흠칫 놀랐다.

커다란 수정탑이 내려앉아 그의 퇴로를 전부 막았고 수정의 빛을 발하며 공간을 봉인했다.

쿠쿵!

거대한 탑이 내려앉아 혈마왕과 그가 소환한 거대한 혈영까지 전부 감쌌다. 목진은 순식간에 사라져 수정탑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잔뜩 경계하며 수정탑을 관찰하는 혈마왕을 보며 옷깃을 휘날리자 대량의 지존영액으로 이뤄진 홍류가 솟구쳤다.

목진은 지존영액의 양이 오천만 방울 정도가 됐을 때 멈춰 손가락을 튕겨 이를 수정탑의 탑 벽에 주입했다.

쿵!

탑 벽에서 사악하고 오래된 그림 여덟 폭이 나타났는데 이는 악마의 신처럼 천천히 꿈틀거리더니 윗몸은 실체가 되어 입을 쩍 벌려 지존영액을 전부 흡입했다.

잇따라 여덟 폭의 그림은 상당히 무서운 파동을 내뿜었다.

혈마왕은 화들짝 놀라 여덟 폭의 그림을 바라봤다. 그는 상대방한테서 영혼을 빼앗길 것 같은 무서운 위압감을 느꼈다.

“이건 마제로 제련한 것이 아닌가!”

혈마왕은 너무 놀라 어쩔 바를 몰랐다. 그는 여덟 폭의 그림에서 익숙한 파동을 읽었다.

저들은 생전에 필경 역외사족의 마제였을 것이다!

“젠장, 저 녀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 이 소식을 알려야 해. 다른 혈마왕들과 함께 녀석을 죽이고 말겠어!”

혈마왕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제야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여덟 폭의 그림에서 사망의 기운을 느꼈다.

“이제야 도망가고 싶어진 건가? 이미 늦었네.”

목진은 혈마왕의 마음을 꿰뚫은 듯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팔부부도, 부도멸마광(浮屠滅魔光).”

목진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거대한 탑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슉!

이와 동시에, 탑 벽에 새겨진 여덟 폭의 그림은 날카로운 손으로 혈마왕을 가리키더니 손끝에서 어두운 빛을 내뿜었다. 이는 공간을 가르며 순식간에 혈마왕의 주위에 나타나 녀석의 퇴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혈마왕은 수수해 보이는 여덟 갈래의 빛줄기에서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망의 기운을 느꼈고 소름이 쫙 끼쳤다.

“젠장, 지지존 대원만 밖에 안 되는 녀석이 어찌 이토록 무서운 공격을 선보일 수 있단 말인가?”

혈마왕은 미칠 것 같았고, 이를 꽉 깨물자 순간 몸이 부풀어 오르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무한의 혈광이 휘몰아쳤는데 여덟 갈래의 어두운 빛줄기는 여전히 웅장한 혈광을 흡수했다.

잠시 후, 검은색 마액이 폭발했는데 혈광은 어두운 빛이 닿자마자 바로 부식되었다.

1각도 안 되는 사이, 웅장했던 혈광은 한 주먹 정도밖에 안 남아 마액의 추격에 초라하게 도망가고 있었다.

퍽!

그러다 혈광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사람의 형태로 다시 변했는데 모양새가 상당히 애처로워 보였다. 강대했던 힘의 파동은 확 줄어들었고 몸에는 검은색 반점이 가득 생겨났다.

혈마왕은 잔뜩 겁에 질린 채 목진을 바라봤다. 그는 목진의 수단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 몰랐다. 그의 강력한 한 수에 자신이 바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자넨 날 죽이면 안 되네. 나를 죽이면 다른 혈마왕들이 바로 알아채고 함께 나설 것이네. 그때가 되면 자넨 죽을 수밖에 없어!”

“그렇단 말인가…….”

혈마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목진은 멈칫하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자네를 죽이지 않겠네.”

목진의 말에 혈마왕은 이내 화색이 되었는데 목진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네를 봉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위잉!

순간, 수정탑에서 무한의 수정의 빛을 발하더니 한데 모여 혈마왕을 비추자 그의 체내의 힘이 놀라운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마지막에는 본인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젠장!”

혈마왕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자폭하려 했다.

“봉인하라!”

그런데 목진은 녀석한테 자폭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수정의 빛이 미친 듯이 줄어들자 혈마왕의 처량한 비명과 함께 그의 육신은 빠르게 작아져 선홍색 광구가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선홍색 광구의 표면에는 수정 무늬가 계속해서 회전하고 있었고 내부에는 혈마왕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자네가 졌네.”

목진은 혈마왕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거대한 도성 위쪽 하늘에 조용히 떠 있는 수정탑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며 신비로운 위엄을 방출했다.

도성의 원주민들과 혈사족 강자들은 수정탑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들의 운명은 수정탑에서 누가 걸어 나오는 가에 달렸다.

그 사람이 바로 최후의 승자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 구역은 더없이 조용했고 다들 긴장해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않았다.

대전 앞에 모인 고위층 인사들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는데 한참 지나서야 온몸을 파르르 떨며 백의 여왕한테 말을 건넸다.

“여왕 폐하, 천신님께서 정녕 이길 수 있을까요?”

만약 천신마저 실패하면 오늘 이곳은 피바다가 될 것이고 그들도 잔뜩 화가 난 혈마왕한테 죽게 될 것이다.

백의 여왕도 수정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침착해 보였다.

“우리는 이미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두지 않았는가?”

“지금 같이 짐승처럼 어딘가에 갇혀 살아가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에 다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살아갈 바에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죽으면 적어도 얼마 남지 않은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위잉!

그때 오랫동안 조용했던 수정탑이 갑자기 진동하자 다들 흠칫 놀랐고 백의 여왕도 입술을 깨물며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비록 최악의 상황에 대비했지만 목진이 이기길 바랐다.

슉!

수정탑에서 한 줄기 빛이 날아올라 늘씬한 청년의 모습을 이뤘다.

“천신님이네!”

도성의 원주민들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고 일부는 심지어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목진은 떠나갈 듯 떠들썩해진 도성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수중에 선홍색 광구가 있었는데 그 속에 혈마왕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이제 아무리 멍청해도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천신님이 정녕……. 이겼단 말인가?”

대전 앞에 서 있던 고위층 사람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악마의 신으로 여겼던 혈마왕이 이대로 무너지다니.

그 앞에 서 있던 백의 여왕도 허공에 떠 있는 늘씬한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오늘이 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얼마나 노력했단 말인가?

그녀는 고통 속에서 최선을 다해 백성들을 다스리고 이곳을 개척했지만 그건 그저 허상일 뿐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혈사족이 원하면 이곳은 언제든지 지옥이 될 것이다.

하여 그녀는 매일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이를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가 무너지면 이곳도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적이라고 여겼던 혈마왕이 오늘, 완전히 제압되었다니! 그 엄청난 충격에 백의 여왕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녀는 드디어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구원의 빛을 봤다.

반면, 혈사족 강자들은 잔뜩 겁에 질려 목진을 바라봤다. 그들도 혈마왕이 패배할 줄 몰랐다.

“당장 도망가 다른 혈마왕들한테 이 소식을 알립시다!”

녀석들은 최대한 빨리 무서운 청년한테서 벗어나고자 미친 듯이 도망갔다.

하늘은 순식간에 혼잡해졌고 혈사족 강자들은 상갓집 개 신세가 되었다.

이에 목진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거대한 불후금신을 소환한 뒤, 자금색 빛으로 수많은 자금 거창을 이루더니 녀석들을 사정없이 공격했다.

슈슉!

자금 거창은 폭우처럼 쏟아져 혈사족 강자들의 몸을 뚫어 이 구역은 순식간에 처량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혈사족 강자들은 날개가 잘린 새처럼 맥없이 추락했다.

1각도 안 되는 사이, 그곳은 다시 조용해졌고 목진은 혈사족 강자를 모조리 없앴다.

목진은 백의 여왕에게서 혈사족에 혈마왕이 한 명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명씩 상대하면 충분히 자신 있었지만 녀석들이 일단 한곳에 모이면 그의 우세는 확 줄어들 거라 그 소식이 최대한 늦게 퍼졌으면 하고 바랐다.

한편, 도성의 원주민들은 목진이 순식간에 강자들을 죽여버리자 눈빛이 경외심으로 물들었다.

목진은 옷깃을 휘날려 수정탑과 봉인한 혈마왕 광구를 거둔 뒤, 다시 대전으로 향했다. 그가 나타나자 고위층 원주민들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심지어 백의 여왕마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소녀 백소소(白素素), 천신님을 뵙습니다.”

“난 천신이 아니네.”

목진은 피식 웃으며 말하더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국사들을 힐끗 쳐다봤다. 녀석들은 어느새 돌기둥에 박힌 대국사를 꺼냈지만 하나 같이 잔뜩 겁에 질린 듯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백소소도 목진의 눈길이 닿은 곳을 보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녀석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천신님의 눈을 더럽히지 말고 저들을 당장 치우거라.”

슉!

백소소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주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국사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녀석들은 결국 처참한 꼴로 죽었고 대국사마저 일전에 목진 때문에 다쳐 도망갈 힘도 없는지라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원주민들은 국사들을 여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광경에 목진은 흠칫 놀라 백소소를 바라봤다.

“입장을 바꾸려는 건가?”

목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백소소는 혈사족과 완전히 선을 그으려는 것이다.

“전 처음부터 천신님이 이길 거라 믿었답니다.”

백소소는 생긋 웃으며 목진을 쳐다봤다.

“난 따로 목적이 있어 이곳에 온 것이고 지금은 혈사족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네.”

“저를 따라오세요, 천신님.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백소소는 공손하게 말을 건넨 뒤, 혼자서 목진과 함께 내전으로 향했다.

“이리 앉으세요.”

목진이 자리에 앉자 백소소는 직접 차를 따라 올리며 매우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인제 말해줄 수 있겠나?”

목진이 차를 건네받으며 묻자 백소소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여왕의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천신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목진은 흠칫 놀랐다.

“혈사족을 상대할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백소소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목진이 선보인 힘은 더없이 강대했다. 이는 하위면 강자가 이를 수 있을 정도의 경지가 아니었는데 그들이 목진의 가르침을 받을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혈사족을 상대할 때도 지금처럼 무기력하고 절망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목진은 멈칫하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당신들은 내 힘을 장악할 수 없네.”

목진은 영력을 수련해 힘이 강대해진 것인데 이는 대천세계에만 있는 거라 하위면에서 수련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백소소는 목진이 가르쳐주기 싫어 그러는 줄 알고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천신님, 부디 우리를 구해주세요!”

말을 마친 백소소는 갑자기 왕관을 내려놓고 허리에 띤 보라색 허리띠를 풀었다. 그러자 화려한 옷이 벗겨지며 영롱한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발을 드리운 채 목진 앞에 무릎을 꿇은 여인의 몸매는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천신님, 저희한테 강대한 힘을 가르쳐 주시면 평생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백소소는 온몸을 파르르 떨며 애처롭게 말했다.

풉.

목진은 갑작스러운 변고에 입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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