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6화. 혈마산(血魔山)
차가운 찻물이 새하얀 피부에 떨어지자 백소소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더없이 수치스러웠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를 악물며 버텼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의 희망은 목진한테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진이 그 힘을 전수해줄 수만 있다면 그들은 혈사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여 백소소는 영롱한 몸매를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일단 옷부터 입게.”
목진은 입가의 찻물을 닦고 헛기침하며 말했다.
“부디 허락해 주세요!”
백소소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외쳤다.
이에 목진이 옷깃을 휘날리자 바닥에 떨어졌던 옷이 다시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가렸다.
“내 힘은 정말 전수할 수가 없네.”
목진의 결연한 태도에 백소소는 순간 사색이 되었지만 감히 목진을 화나게 할 수 없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으로 몸을 대충 가리긴 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풍만한 몸매는 여전히 눈에 띄었다.
“내 힘을 전수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 있는 혈사족을 전부 없애고 떠날 테니 걱정하지 말게.”
목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백소소한테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백소소는 그제야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가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목진을 바라봤다.
“설마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백성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면 전 절대 이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절대 아니네. 난 자넬 무시하기는커녕, 자네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네.”
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젊은 여인이 백성을 위해 자존심마저 버리고 알몸으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백소소도 목진의 진심 어린 눈빛에 눈가를 파르르 떨더니 코끝이 찡했다. 그녀는 반드시 강한 모습만 보여줘야 했는데 지금만큼은 가면을 벗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백소소는 목진이 자신을 알아줘서 정말 고마웠다.
“자네도 내 말을 믿어야 하네. 난 절대 내 힘을 전수하고 싶지 않아 그러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없어 그러는 것이네.”
목진의 말에 백소소는 조금 실망스러웠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긋 웃었다.
“천신님께서는 좋은 기회를 날리셨군요.”
“대신 마음이 있으면 저를 연모하셔도 돼요. 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법 있답니다. 천신님은 그 사람들보다 훨씬 나은걸요?”
목진은 담대한 소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이건 설마 자신을 희롱하는 건가?
“저기……. 용건부터 말하자꾸나.”
목진은 괜히 헛기침하며 화두를 돌렸고 백소소는 그런 목진의 모습에 입을 가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목진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그는 실력이 막강할 뿐만 아니라 자제력도 남달랐다.
백소소는 외모에 상당한 자신감이 있는 여인이었다. 이는 여태껏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내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알몸으로 다가갔을 때, 목진은 끝까지 수컷의 본능을 참았다.
이 세상의 규칙을 무시할 정도로 강대한데도 여전히 엄청난 자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하여 백소소는 목진이 보면 볼수록 끌렸다.
“천신님, 혈사족에는 혈마왕이 여섯 명 있었는데 한 명이 사망했으니 다섯 명 남았네요.”
백소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차를 따르며 말했다.
“그중, 세 명은 혈마산에 있고 나머지 두 명은 각각 이 세상의 서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어요.”
목진은 혈마왕이 한데 모여 있지 않다는 사실에 이내 화색이 되었다. 이건 그한테 절호의 기회였다.
“한 명씩 상대하면 저들은 절대 내 상대가 안 되지만 다섯 명이 한데 모이면 형세는 달라질 것이네.”
“승리를 확보하려면 혈마왕의 수를 세 명으로 줄여야 하네.”
백소소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세상의 서쪽과 북쪽을 지키고 있는 혈마왕 두 명이 최적의 상대겠군요.”
“전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최대한 새어나가지 않도록 애써 볼 거예요. 하지만 길어 봐야 보름 정도 숨길 수 있을 거예요. 보름이 지나면 다른 혈마왕들이 눈치를 챌 거예요.”
“보름이라…….”
목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두 명의 혈마왕은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워 보름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머지 두 명의 혈마왕의 위치는 저한테 맡기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어요.”
백소소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단 말인가?”
목진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소소를 바라봤다. 그는 백소소가 혈마왕의 위치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 몰랐다.
“혈사족에 우리 종족 사람들이 숨어 있어요. 그들이 우리한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애를 쓰고 있죠.”
백소소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진은 해당 정보를 얻으려면 일정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주저할 필요는 없어요. 혈사족을 물리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백소소는 목진의 속내를 꿰뚫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에 목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대의를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되어야만 했다.
“그럼 그 일은 자네한테 맡기고 혈마왕을 상대하는 일은 내가 하겠네.”
목진의 말에 백소소는 생긋 웃더니 무릎을 꿇고 앉아 차를 따르며 목진을 바라봤다.
“천신님은 참 멋있는 것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한 가지 더 있네.”
목진은 무안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무엇이든 말하세요.”
백소소는 옆에 있는 의자에 느긋하게 앉아 머리를 쓸어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천신님이 원한다면 저마저 드릴 수 있으니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옷깃을 휘날리자 미간에서 영광이 나타나 앞쪽 허무한 공간에 영력 광막을 이뤘고 광막에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 속 세상은 피바다였고 웅장한 산맥의 정상에 몇 갈래 빛줄기가 솟구쳤다. 그리고 그 위쪽 하늘에 공간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그들은 공간 소용돌이에 들어가더니 사라졌다.
이는 목진이 백룡지존한테서 얻은 것으로 공간 소용돌이에 뛰어든 사람들은 바로 이 세상에서 도망간 백룡지존 등이었다.
목진은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백소소가 백룡지존 등이 떠난 곳을 알아봤으면 하는 마음에 이를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왠지 그곳에서 백룡지존의 집념을 일깨우면 엄청난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이곳이 어딘지 알고 싶네.”
목진은 영력 광막을 가리키며 돌아섰는데 활짝 웃고 있던 백소소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멍하니 광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목진은 흠칫 놀랐다.
“왜 그러는가?”
목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천신님께서 어찌 알고 계신 건가요?”
백소소는 눈물을 닦아내며 간신히 물었다.
“난 한 선배님의 부탁으로 이곳에 온 것이라네. 설마 저들을 아는가?”
목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한 말에 백소소는 몰래 중얼거렸다.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목진을 바라보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님, 저들은 제 조상님입니다.”
“그리고 천신님께서 가리킨 산맥은 성룡산(聖龍山)으로 지금은 혈마산이라 불리는 혈사족의 본부죠!”
“혈마산이라…….”
목진은 몰래 중얼거리고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정보를 조금이나마 알아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드넓은 하위면을 목적 없이 뛰어다녀야 했을 것이다.
그는 백룡지존 등이 백소소의 조상님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저희 세력의 이름은 성룡종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지만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만이었죠.”
백소소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혈사족이 이 세상에 침입한 뒤에야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깨달았어요. 선배님들이 목숨을 걸고 나섰는데도 녀석들을 막아내지 못했으니까요.”
목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하위면일 뿐이고 역외사족은 대천세계와 비슷하거나 더 발달한 생명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러니 백소소 등이 이런 존재들을 당해낼 리 없었다.
아무나 다 무조처럼 강한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안 그럼 무조도 대천세계에서 그렇게까지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최후의 전쟁에서 실패한 후, 천외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선배님들은 이곳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 해서 강자를 찾아 떠나기로 결심했죠.”
“그들은 강제로 공간 균열을 만들어 이곳을 떠나 천외천으로 가셨고 우리는 이곳에서 그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백소소의 말에 목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백소소가 언급한 선배님들이 용마궁을 만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선배님들은 서로 생각이 맞지 않아 백룡지존은 용마궁을 떠났고, 그 후 목진이 용마궁을 없애버렸다.
그는 이 소식을 백소소에게 전해주고 싶지 않았다. 백룡지존 외의 다른 이들이 이곳의 일을 잊었단 사실을 알게 되면 그녀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계속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도 오지 않았어요. 그러다 결국 멸망이 가까워지자 이곳에 남아 있던 선배님들이 오래된 방법으로 최후의 희망이었던 저한테 그 힘을 전수하셨죠.”
백소소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제 실력은 그렇게 얻은 거예요. 그런데도 혈마왕의 상대가 안 되지만 말이죠.”
“이 정도 해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네.”
“천신님, 혹시 우리 성룡종의 조상님들을 뵌 적이 있나요?”
목진의 말에 백소소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에 목진이 흠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소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화색이 되었다.
“전 선배님들이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들은 지금껏 우리를 구할 방법을 찾고 있었던 거예요.”
“난 이 선배님의 부탁으로 여기 온 것이네.”
목진이 가볍게 웃으며 손끝에 영광을 모으자 백룡지존이 형상을 이뤘다.
“이분은 제 조상님인 백룡 조상님이에요.”
백소소는 백룡지존의 형상을 보더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천신님, 아직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대신하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백소소는 목진을 향해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나는 단지 백룡지존의 부탁만으로 이곳에 온 것은 아니네. 그는 내가 절대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보수를 주기로 약속했네.”
목진은 백소소를 일으켜 세우고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에 백소소는 생긋 웃더니 목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점차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난 결정했네. 옛 성룡산, 지금은 혈마산이라 불리는 곳에 갈 것이네.”
목진은 백소소의 눈빛을 무시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혈마산에는 곧 천지존경에 이를 혈마왕이 세 명이나 있어 산에 오르려면 일단 그들부터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이는 뇌음존자 등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진정한 목숨을 건 대결이 될 것이다.
“최대한 빨리 외부에서 순찰하고 있는 두 명의 혈마왕을 없애야겠군. 저들이 일단 소식을 접하고 한데 모이면 나라도 상대하기 버거워질 것이네.”
목진은 혈마왕 다섯을 상대로 혼자서는 무사히 벗어날 수 있지만, 녀석들이 화가 나면 이곳을 처참한 꼴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럼 그의 임무도 실패하는 것이다.
목진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