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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915화 (914/1,000)

915화. 백령왕

백령대륙의 중심 도시인 백령성은 대륙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특히, 최근 들어 백령대륙에서 가장 떠들썩한 도성이 되었다.

백령대륙의 조왕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조왕제란 제왕을 알현한다는 뜻으로 제왕은 백령대륙의 주인인 백령왕을 일컫는다.

대륙의 지배자인 백령왕은 백령대륙의 패주로 모든 세력은 신하처럼 정기적으로 알현하고 공품을 바쳐야 했다.

하여 조왕제 때마다 백령성은 유난히 북적거렸고 사방에서 각각의 세력들이 모여들어 떠들썩해지곤 했다.

한편, 백령성 중심에 있는 화려한 백령궁(百靈宮)은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가장 큰 대전에는 각 세력주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아름다운 시녀들이 추는 춤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백령대륙에서 제법 유명한 세력의 주인들로 좌석 배치에서부터 그 지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앞쪽에 앉은 사람들은 실력이 막강한 세력의 주인들이고 뒤로 갈수록 실력이 뒤처졌다.

그런데 대전의 뒤편에 있던 한 무리가 다른 이들과 달리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의 수령은 튼실한 중년 사내로 목진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바로 목진의 아버지 목봉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한숨을 쉬기만 했고 그 옆에는 한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현의를 입고 검은 머리를 높게 묶었는데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들 저도 모르게 그녀를 힐끗 쳐다보곤 했다.

아마 목진이 있었으면 여인을 보고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그녀는 바로 목진이 북창령원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당천아였다.

당천아는 지금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북창령원을 떠난 목진과 달리 그녀는 학원에 남아 열심히 수련한 끝에 8급 지존경에 이르렀고 만황령원의 부원장까지 되었다.

그리고 부원장이 된 당천아는 북령경에 돌아가 아버지를 뵙고 싶다며 휴가를 냈는데 마침 조왕제가 열린 것이다. 이에 아버지인 당산(唐山)은 목 삼촌과 함께 백령성에 가야 한다고 했고, 사람이 많은 걸 좋아하는 당천아는 자연스레 아버지와 함께 나섰다. 그런데 백령왕이 그녀가 마음에 든다며 매일같이 찾아와 상당히 피곤해졌다.

이에 당천아는 완곡하게 백령왕의 호의를 거절했지만, 그는 불쾌하다며 그들의 자유를 박탈했고 이것으로 그녀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당천아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딸아…….”

목봉 뒤에 앉아있는 당산은 씁쓸하게 웃으며 당천아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도 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책하며 말했다.

“이건 다 내 탓이다. 내가 괜히 너더러 함께 오자고 했구나.”

당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만황령원에 보냈을 때, 그녀가 이렇게까지 출세할 줄은 몰랐다. 당천아는 8급 지존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만황령원의 부원장까지 되었으니, 이는 북령맹의 맹주인 목봉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는 축하해야 마땅한 일인데 백령왕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졌으니…….

백령왕은 단순히 당천아의 미모에 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만황령원의 부원장이란 말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천아야, 기회를 봐서 몰래 떠나거라. 백령왕은 신분 때문에라도 우리를 죽이지 못할 거란다. 그러다 안 되면 북령맹을 해산하면 그만이다.”

목봉이 당산의 어깨를 다독이더니 당천아한테 말을 건넸다.

그는 당천아를 어릴 때부터 봐왔고 아들인 목진과도 사이가 좋아 마음에도 없는 혼인을 치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당천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기만 했다. 백령왕은 속 좁은 사람이라 그녀가 몰래 떠나면 분명 아버지와 목봉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전 절대 목 삼촌을 이대로 버리고 갈 수 없어요. 그럼 앞으로 목진을 만나면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당천아는 주먹을 꽉 쥐고 결심했는데 적당한 기회를 찾아 아버지와 목 삼촌을 데리고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황령원의 부원장이 된 그녀는 백령왕의 손에서 벗어날 수단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라면 백령왕은 목 삼촌과 아버지 등이 열심히 키운 북령맹을 철저히 부숴버릴 것이고 그녀도 더는 북령경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당천아는 수많은 추억이 담긴 북령경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앉아있던 사람들이 전부 일어서서 공손하게 대전의 수석 쪽을 바라봤다.

잇따라 황금색 도포를 입은 훤칠한 사내가 미모의 궁녀들과 함께 걸어 들어왔다. 길쭉한 두 눈에 음산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고 내뿜는 강력한 영력 파동으로 보아 하위 지지존경에 이른 모양이었다.

또한, 그 뒤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부하 두 명이 유령처럼 따라붙었다.

“백령왕을 뵙습니다!”

대전에 모인 백령대륙의 여러 세력 수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다들 앉게.”

백령왕은 미소를 지은 채 수석에 앉아 손을 가볍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령왕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주위를 쓰윽 훑더니 뒤쪽 북령맹 무리에 앉아있는 당천아한테 시선을 멈췄다.

“허허, 천아 낭자는 백령성이 마음에 드는가?”

백령왕은 상냥하게 웃으며 바로 당천아한테 말을 건넸다.

“백령성은 많이 봤으니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만황령원의 부원장이 자리를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요.”

그녀는 만황령원을 내세우며 다시 한번 백령왕을 거절했는데 그 말에 상대방이 그만 포기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백령왕은 당천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 술잔을 가볍게 흔들며 생긋 웃었다.

“사실 난 천아 낭자가 정말 마음에 드는군. 이곳에 남아 나와 함께 백령대륙을 다스렸으면 좋겠네.”

이에 다들 부러운 듯한 눈빛으로 당천아를 바라봤다. 그들한테는 한 대륙의 패주가 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당천아는 너무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앞쪽에 놓인 술을 백령왕의 얼굴에 던지고 싶었지만, 더는 그날의 무식한 소녀가 아니라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백령왕의 뜻은 고맙지만 전 만황령원이 더 좋더군요. 그러니 만황령원을 봐서라도 없던 일로 하시죠.”

“만황령원이 대단하긴 해도 나보다야 더할까?”

백령왕은 수중의 술잔을 흔들며 피식 웃었다.

“내 아버지는 북현궁(北玄宮)의 궁주로 선급 초기 천지존이시고 어머니는 백화종(百花宗)의 종주로 영급 초기 천지존이시네.”

백령왕이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만황령원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은가?”

백령왕이 히쭉거리며 한 말에 그곳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다들 온몸을 파르르 떨며 백령왕을 바라봤다. 그들은 백령왕의 신분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역시나 놀라웠다.

북현궁은 대천세계의 서북 구역에서 제법 유명한 세력으로 대륙을 네 개나 장악해 진정한 패주나 다름없었다.

백화종은 비록 북현궁보다 못하지만 수장이 천지존이라 패주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들과 비교하면 대전에 모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화종과 북현종이 숨만 쉬어도 이들은 잿더미가 될 것이다.

백령왕이 하위 지지존의 실력으로 백령대륙을 장악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다들 백령왕의 무서운 뒷배에 그보다 실력이 뛰어나도 굽신거리기 바빴다.

당천아도 엄청난 압력을 느끼고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만황령원은 확실히 백화종 및 북현종의 상대가 안 되었다.

그렇다고 만황령원이 호락호락하다는 건 아니었다. 만황령원은 실력보다 인맥이 뛰어났다.

그러니 북현궁과 백화종이 만황령원을 없애는 일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백령왕, 정녕 끝까지 강요할 생각인가요?”

당천아가 주먹을 꽉 쥐고 묻자 백령왕은 입꼬리를 씰룩거리기만 했다. 그 모습에 다들 식은땀이 흘렀다.

사람들은 당천아가 주제도 모르고 감히 백령왕을 언짢게 한다고 생각해 화를 냈는데 백령왕이 정말 화가 나면 그들은 이곳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화내지 마십시오. 천아는 아직 철이 덜 들었습니다. 더구나 제 아들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큰일을 하시는 분이 굳이 여인 문제로…….”

목봉이 이를 악물고 일어나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백령왕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에 검은색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목봉을 쏘아보며 물었다.

“지금 당신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뇌명 같은 노인의 말에 대전 전체가 진동했다. 목봉은 큰 타격을 입은 듯 사색이 된 채 주저앉았고 입가에는 핏자국이 생겼다.

검은색 도포를 입은 노인한테서 느껴진 무서운 영력 위압감에 다들 화들짝 놀랐다.

“지지존 대원만이라니!”

사람들은 백령왕이 뒷배가 상당한 사람답게 본인은 하위 지지존일 뿐이지만 부하들은 무려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인 것에 적잖게 놀랐다.

잇따라 백령왕은 수중의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하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감히 일어나 입을 놀리다니. 자네 아들이 뭐라고 감히 내 여인을 욕심낸단 말인가!”

백령왕의 말에 목봉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삼촌, 괜찮아요?”

당천아는 황급히 목봉을 부축하더니 걱정되어 물었다.

“내가 무능해서 미안하구나.”

목봉이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당천아는 이를 꽉 깨물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더는 이곳에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당천아는 일단 백령왕부터 달래고 기회를 찾아 밀법으로 아버지, 삼촌과 몰래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을 내린 당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백령왕한테 말을 건넸다.

“좋아요. 난 당신과…….”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갑자기 길쭉한 손이 뻗어나와 당천아의 붉은 입술을 막았다.

이와 동시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천아 누이, 저따위 녀석이 어찌 누이와 어울린단 말인가요?”

갑작스레 들려온 말소리에 대전에 모인 각 세력의 수령들은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목진이 감히 백령왕한테 이따위 말을 할 줄 몰랐다.

백령대륙의 주인인 백령왕의 한 마디에 그 어떤 세력이든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었으니, 그 엄청난 권력과 힘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두려울 뿐이었다.

사람들은 백령왕이 화를 낼 것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오늘 이곳에 피바람이 불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당천아의 뒤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편, 당천아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자신의 입을 막은 손 때문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두르려 했는데 잇따라 들리는 목소리에 순간 온몸이 굳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상당히 낯익었다.

당천아가 천천히 돌아서자 앳된 모습은 사라지고 성숙해진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안정감을 주었다.

“목…… 진아!”

당천아는 눈앞에 나타난 훤칠한 청년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만 같아 저도 모르게 목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따뜻한 촉감에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너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당연히 아버지를 뵈러 왔죠.”

목진은 생긋 웃으며 답하더니 당천아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목봉 등을 바라보며 히쭉 웃었다.

“아버지, 그만 정신 차리세요.”

목봉은 아직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목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목봉은 북령경을 떠난 아들이 꿈에도 나올 만큼 그리웠기 때문에 목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 누구보다 깜짝 놀랐다.

“이 녀석, 드디어 돌아온 것이냐?”

목봉이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투덜대자 목진은 배시시 웃으며 달려가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

“그만 화 푸세요.”

목진은 아버지의 입가에 맺힌 피를 보더니 눈빛이 확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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