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0화. 처분
쥐 죽은 듯 조용한 대전에 서 있는 진북현 등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성급 대종사는 그들을 영진 세계에 가둬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었다.
성급과 선급의 차이는 그토록 엄청났다.
그 차이는 대제국의 황제와 자그마한 나라의 주인 사이의 차이와 비슷했다. 두 사람은 비록 한 나라의 주인이지만 전자가 후자를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부도신족의 대장로라니!”
기타 세력의 수장들과 북령맹의 고위층들은 어리둥절하여 청연정을 바라봤다. 그들은 평소에 부도신족처럼 오래되고 강대한 세력과 접촉해본 적이 없었다.
또한, 천지존이 장악한 세력만으로도 벅찬 이들이 부도신족 같은 대천세계의 정예급 세력을 주의 깊게 지켜봤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부도신족의 대장로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몰라도 진북현 등의 반응만 봐도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목진이 선보인 놀라운 전투력에 흠칫 놀랐던 유천도 등이 청연정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 보면 청연정이 목진보다 훨씬 강대한 존재임이 분명했다.
꿀꺽.
이에 다들 몰래 침을 꿀꺽 삼키더니 경외의 눈빛으로 청연정을 바라봤다. 그들은 그제야 여기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목진이 아니라 미소를 지은 채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이란 걸 깨달았다.
씩씩거리는 목진보다 아무렇지 않게 앉아있는 청연정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였다.
일전에 겁도 없이 청연정과 담소를 나눴던 북령맹 고위층들은 어느새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들은 평생 노력해도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였는데 그런 사람과 대화를 나눴단 사실에 깜짝 놀랐다.
“허허, 역시 우리 정이가 아들보다 낫군.”
정작 목봉은 히쭉 웃으며 목진을 바라봤고 목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흘겨봤다.
“아버지!”
반면, 백령왕은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은 듯 한껏 일그러진 표정으로 외쳤다.
“아버지, 저를 위해 복수하셔야죠! 저들을 절대 이대로 용서하시면 안 됩니다!”
백령왕은 손꼽아 기다렸던 구원병이 복수는커녕 오히려 상대방한테 굽신거리자 너무 화가 나 이성을 잃었다.
“멍청한 녀석,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진북현이 안색이 확 어두워져 옷깃을 휘날려 백령왕의 뺨을 때리자 그는 뒤쪽 벽에 날아가 부딪쳤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그따위 말을 하는 것이냐?”
진북현은 친구의 눈치가 빠른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럼 성급 대종사인 청연정이 절대 북현종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선급 천지존인 그는 성급 대종사의 실력과 부도신족 같은 고족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들 때문에 자신이 애써 일궈온 세력이 사라질 뻔했단 사실에 진북현은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
한편, 얼굴 전체가 부풀어 오른 백령왕은 잔뜩 화가 난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얼굴에서 전해진 통증에 정신을 벌떡 차렸다.
그는 그제야 아버지께서 그의 복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너무 강해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청년과 상냥해 보이는 여인은 그들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강대한 존재였다.
백령왕은 굳게 믿었던 뒷배가 무너지자 목진이 두려워져 온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북현! 뭐 하는 거야?”
유백화도 어느새 대전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부은 아들을 보고 버럭 화를 냈다. 백령왕은 유백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존재였다.
“너도 당장 닥쳐!”
진북현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아내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북현종과 백화종이 멸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유백화는 순간 소름이 쫙 돋았는데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한 채 청연정을 힐끗 쳐다봤다. 그녀는 청연정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상대방이 체내에서 내뿜는 무서운 위압감에 적잖게 놀랐다.
압박감을 느낀 그녀는 더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 광경에 기타 세력 수장들은 이내 감탄했다. 보아하니 백령왕은 이번에 사람을 잘못 건드린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북령맹의 맹주가 이토록 대단한 아내와 아들을 뒀을 줄은 몰랐다.
그의 아내는 부도신족의 대장로이고 그 아들은 진북현보다 실력이 뛰어난 천지존이었으니, 이보다 놀라운 일은 또 없을 것이다. 심지어 목봉은 아직 지존경에도 이르지 않았다.
잇따라 진북현은 돌아서 청연정한테 말을 건넸다.
“오늘 일은 제 아들이 잘못한 것이 맞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가요?”
“내 아들이 알아서 할 테니 아들한테 물어보게.”
청연정은 사소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진 종주님, 백령왕은 사람들을 괴롭혔지만 당신들이 두려워 당하고만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제 가족을 건드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목진이 힐끗 쳐다보며 말했고 진북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쉽게 해결해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리고 말았으니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이니 말만 하거라.”
반항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진북현은 바로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똑똑한 사람이군요.”
목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북현은 역시 한 세력의 주인답게 결단력이 있었다.
“오늘부터 백령대륙은 북현종 소속이 아니라 북령맹에서 관리할 거예요.”
목진의 말에 다들 수군대기 시작했고 백령대륙의 수장들은 흠칫 놀랐다. 그럼 앞으로 그들이 모셔야 하는 왕은 목봉이란 말인가?
일부 세력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북령맹은 기껏해야 백령대륙의 중급 세력일 뿐이었다.
그러나 목진이 주위를 쓰윽 훑자 다들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 이렇게 대단한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북령맹을 중급 세력이라고 하겠는가?
“좋다. 북현종에서 아들의 잘못에 대한 댓가로 백령대륙을 바치겠다.”
진북현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령대륙을 포기하는 것은 북현종한테 영향이 컸지만 세력 전체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제 가족을 다치게 한 백령왕은 죽어야 마땅하지만, 당신의 태도를 봐서 살려는 줄게요.”
목진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대신 이대로 보내줄 수는 없겠죠?”
목진이 말을 마치자 머리 쪽에서 수수하게 생긴 수정 부도탑이 날아오르더니 화들짝 놀라 자리에 앉아있던 백령왕한테 날아갔다.
위잉.
수정의 빛은 백령왕의 몸에 수정 같은 부적을 이루더니 체내에 스며들었다.
백령왕은 체내의 영력이 빠르게 사그라들더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순간 사색이 되었다.
“백령왕의 영력을 50년 동안 봉인할 거예요.”
목진의 차가운 목소리에 백령왕은 순간 잿빛이 되었다.
“너!”
유백화는 이를 갈며 목진을 노려봤다.
“그리고 당신!”
그런데 목진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유백화를 쏘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함부로 제 가족을 입에 올린 죄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을 거예요!”
목진은 막돼먹은 유백화 때문에 적잖게 화가 났다. 백령왕은 그녀의 잘못으로 이따위로 성장한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감히 목진의 아버지한테 망언을 날리다니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슉!
목진이 말을 마치자 수정탑은 다시 공간을 가르며 유백화한테 날아가 수정의 빛을 발했다.
이에 유백화는 화들짝 놀라 황급히 영력을 끌어올렸는데 그녀의 영력은 수정의 빛에 닿자 놀라운 속도로 사그라들었다. 또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몸 표면에 수정 부적이 형성되었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던 영력 파동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목진의 실력으로 천지존의 영력을 완전히 봉인할 수는 없지만 실력을 약화하기에는 충분했다. 현재, 유백화의 실력은 상위 지지존 밖에 안 되었다.
“이 봉인은 20년간 유지할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거예요.”
고고한 천지존이었던 유백화는 순식간에 지지존이 되어 사색이 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다들 목진의 매서운 수단에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백령왕과 유백화의 영력을 봉인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 종주님, 어때요? 따로 하실 말씀이 있나요?”
진북현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천세계에서 성급의 실력은 천지를 부수고도 남는지라 이런 존재가 정말 화라도 내면 북현종과 백화종은 바로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백령왕과 유백화의 영력을 봉인한 것뿐이었다. 그는 목진이 선심을 썼다는 걸 알았다.
“그럼 그만합시다. 앞으로도 주의하길 바랍니다. 향후 북령맹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제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목진은 태연하게 서서 말을 건넸다. 그는 백령대륙에만 머무를 수 없었고 청연정까지 부도신족에 돌아가면 북령맹의 실력으로 절대 이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이다.
진북현도 목진의 속내를 바로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진과 청연정의 실력을 확인한 그가 어찌 감히 복수를 생각할까?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진북현은 청연정에게 인사를 올리더니 백령왕 등과 함께 떠났다.
이렇게 이 구역에 맴돌았던 무서운 압박감도 함께 사라졌다.
대전에 남아있던 기타 세력 수장들은 아수라장이 된 대전을 보더니 그제야 백령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그들도 최대한 빨리 선물을 준비해 북령맹에 축하 인사를 올리러 가야 할 것이다.
각 세력 수장들이 돌아가자 백령성 일은 널리 퍼져나갔고 다들 의외에 결과게 적잖게 놀랐다. 그들은 이번 조왕제에서 백령대륙의 주인마저 바뀔 줄 몰랐다.
더구나 그 주인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북령맹이었다.
북령맹은 백령대륙의 중소형 세력일 뿐이라 절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는데도 말이다.
다들 북령맹을 질투했지만 그 주인인 목봉의 뒷배가 상당하는 걸 깨닫고는 그 마음을 접었다. 목봉의 실력은 별 볼 일 없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실력자였다.
특히 목봉의 아내인 청연정은 부도신족의 대장로인데 부도신족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세력이었고 아들 목진은 10년 사이에 스스로 천지존경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천라대륙에도 세력을 만들었다.
백령왕은 목봉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북현종의 종주 진북현마저 고개를 숙이고 백령대륙을 손수 바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하여 백령대륙의 기타 세력들은 감히 북령맹을 건드리지 못했고 일부 세력들은 사신단을 파견해 백령대륙의 새로운 주인에게 아부하느라 바빴다.
* * *
현재 북령맹의 본부는 목역의 주성으로 바로 목진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목진은 조용한 정원의 한 정자에 편히 누워있었는데 지금처럼 마음이 편했던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북령경을 떠났을 때부터 목진은 한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실력 증진에 심혈을 기울였고 어떠한 고난이 닥치든 굳건한 마음으로 헤쳐나갔다.
그때의 목진은 실력이 부족해 낙리의 낙신족마저 상대할 수 없었고 부도신족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여 목진은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다행히 목진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정한 성과를 이루었고, 북령경을 떠나며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모두 지켰다.
비록 과정은 엄청 힘들었지만 그는 마침내 해냈다.
“아버지, 제가 마침내 해냈어요.”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낙리가 곁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진은 낙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낙리는 목진을 도와주기 위해 태령고족에 간 것도 있지만 그녀의 승부욕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낙리의 승부욕은 절세의 미모 못지않게 강했다.
영로에서 집념만으로 목진을 며칠이나 쫓아다닌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현재, 목진은 이미 천지존경에 이르렀으니 낙리도 어느 정도 압력을 느낄 것이다. 그녀는 목진 뒤에 숨어 모든 걸 맡기는 여인이 아니라 목진과 함께 고난을 이겨나가길 원했다.
“어이, 정신 차려!”
그때 명쾌한 목소리가 들리며 눈앞에 새하얀 손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