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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재-924화 (923/1,000)

924화. 기선 제압

멀지 않은 곳 산봉우리에 서 있는 구유족의 천황 족장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안색이 점차 어두워졌다.

한편, 천황의 뒤쪽에 있는 구유는 몸에 찰싹 달라붙는 현의를 입어 영롱한 몸매와 길쭉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입을 삐쭉 내민 채 서 있었다.

그녀는 천황보다는 태연해 보였지만 꽉 쥔 손을 보니 얼마나 불안한지 알 것 같았다.

“육 장로, 자네가 구유와 함께 들어가는 수밖에 없겠네.”

천황은 한숨을 쉬더니 옆에 서 있는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한테 말을 건넸다. 그가 바로 구유족의 유일한 천지존으로 수련 중이었지만 구유 때문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러나 구유족의 장로인 그도 겨우 영급 후기의 실력자일 뿐이었다.

회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자신이 없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걱정 마세요, 족장님. 최선을 다해 구유를 지킬 겁니다. 하지만 내가 황현지의 상대는 안 될 것 같군요.”

천황 족장은 순간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도 선급 초기 천지존경에 이른 황현지의 전투력이 상당하다는 걸 잘 알았다. 녀석은 심지어 선급 초기의 강자를 죽인 적도 있었으니, 동급 실력자 중 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현지를 정면 상대할 필요는 없네. 녀석을 잘만 피해 다니면 되지 않겠나? 최대한 시간을 벌어 구유한테 기회를 마련해 주고 눈치를 봐가면서 몰래 빠져나오면 될 것 같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천황 족장의 말에 육 장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깊게 숨을 들이켜며 이내 정색했다. 그도 봉황족 때문에 잔뜩 화가 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구유를 지켜내리라 마음먹었다.

“천작 장로는 아직인가요? 목진의 실력이 부쩍 늘었다고 들었는데 녀석이 오면 황현지를…….”

육 장로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라도 난 듯 구유를 힐끗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 없네. 구유족은 외부인의 도움을 구걸할 필요가 없네. 그리고 목진이 우리 편을 든다는 건 봉황족의 적이 되겠다는 뜻인데 과연 그리할까?”

천황은 인상을 살짝 찌푸린 채 답했다. 그는 목진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대천세계에서 봉황족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구유족의 편을 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구유족과 관계가 제법 좋던 다른 신수 종족들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구유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천황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래, 다시는 녀석의 험담을 하지 않으마.”

천황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황김이 갑자기 고개를 숙여 무덤덤하게 구유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결정은 하였느냐?”

“황왕, 우리 구유족을 한 번만 살려 주면 안 될까요?”

천황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족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물었다.

“왜 또 그러는 것이냐? 내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구유족에 풍부한 보상을 내릴 텐데 말이야. 왜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냐?”

황김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천황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각자의 실력에 맡기자꾸나.”

천황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저 사람이 자네 호법인가?”

황김 뒤쪽에 서 있던 황현지가 고고한 눈빛으로 구유 등을 쓰윽 훑더니 육 장로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영급 후기라…….”

황현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면 애초에 반항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말을 마친 황현지가 앞으로 나서자 봉황의 울음소리와 함께 도천의 위압이 휘몰아쳐 천지마저 파르르 떨렸다.

녀석은 육 장로에게 기선 제압을 하려 했다. 무서운 위압감에 육 장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무릎을 서서히 꿇었다.

현황지는 화산지에 들어가기 전에 육 장로한테 제대로 겁을 주고 싶었다. 그럼 화산지에 들어가도 녀석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육 장로도 황현지의 속내를 바로 알아채고 이를 악물며 선급 천지존의 무서운 압박감을 견뎌내려 했는데 황현지의 진정한 봉황의 위압감에 무릎이 점차 바닥을 향했다.

옆에 서 있던 천황 족장과 구유는 안색이 확 어두워진 채 서 있었다. 그들은 황현지 때문에 수모를 겪고 있는 육 장로한테 전혀 도움을 줄 수 없어 괴로웠다.

그 광경에 천황 족장은 온몸을 파르르 떨었고 피를 토하기 직전이었다. 이로써 구유족의 체면은 완전히 구겨졌다.

구유는 주먹을 꽉 쥐고 서 있었는데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뚝뚝 떨어졌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런 무기력함이 너무 싫었다.

“그만하게. 불사조의 혈맥을 원하면…….”

구유는 두 눈을 부릅뜨고 황현지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뇌명이 울려 퍼졌고 다들 고개를 번쩍 들고 웅장한 영력이 휘몰아치는 하늘을 바라봤다.

쿠쿵!

웅장한 영력 충격은 황현지의 영력 위압감을 순식간에 부쉈고 나지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넨 구유의 혈맥을 취할 자격이 없네!”

구유도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는데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청년의 훤칠한 얼굴에 깃든 무서운 기운에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낯익은 청년을 멍하니 쳐다보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쿠쿵!

난폭한 영력 파동이 돌풍처럼 휘몰아치며 형성한 강력한 영력 위압에 다들 흠칫 놀라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청년을 바라봤다.

그는 당연히 한시도 쉬지 않고 산해대륙으로 달려온 목진이었다. 그는 구유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보더니 화가 치밀었다.

강인하고 집요한 구유가 눈물을 흘리다니. 도대체 얼마나 괴롭고 힘들면 그런단 말인가?

“천황 족장님, 괜찮으세요?”

목진은 천황 족장한테 말을 건넨 뒤, 육 장로를 일으켜 세웠다.

“늦어서 죄송해요.”

천황과 육 장로는 멍하니 목진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은 목진이 정말 올 줄 몰랐다.

녀석이 정녕 봉황족의 적이 되면서까지 구유를 구하려 한단 말인가?

“아니, 늦지 않았단다.”

천황 족장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에게 뾰족한 수가 있었다면 절대 천작 장로를 목부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구나.”

“천황 족장님, 그런 말씀 마세요. 구유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구유를 돕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목진은 가볍게 웃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이에 천황은 표정이 복잡미묘해졌고 목진한테 미안하면서도 뿌듯했다. 그는 목진을 오해한 것이 미안했고 구유가 좋은 벗을 사귀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목진은 구유가 안정을 되찾은 뒤에야 다가가더니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너도 울 줄 알았어?”

구유는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고 목진을 쏘아보더니 길쭉한 다리를 휘둘러 목진의 발등을 찼다.

“감히 날 비웃어!”

“넌 여기 오질 말았어야 했어.”

구유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목진은 비록 전보다 훨씬 강해졌고 어머니도 부도신족의 대장로가 되었지만 봉황족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가 나와 함께 북령경을 떠나 대천세계에서 떠돌며 나를 지켜줬지? 바로 너야. 넌 그때도 별 볼 일 없었던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는데 나는 왜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목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구유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때의 목진은 실력이 너무 약해 구유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절대 오늘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에 구유는 순간 코끝이 찡했고 눈가에 또 눈물이 고였지만 목진 앞이라 끝까지 눈물을 참았다.

“넌 누구냐? 왜 신수 종족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냐?”

갑자기 존귀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황왕 황김이 목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 목진이라고 합니다. 구유족의 요청으로 구유의 호법이 되어주러 왔어요.”

이에 다들 깜짝 놀라 목진을 훑었다. 그는 요즘 대천세계에 널리 알려져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어느 정도 예상한 황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목진이 보통 인간 천지존이었다면 당장 내쫓았겠지만 목진한테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어머니가 부도신족의 대장로인데다 염제, 무조와도 각별한 사이였다. 심지어 대천궁의 주마왕이라 자칫 잘못하면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세력들의 토벌 상대가 될 수도 있었다.

황왕은 제법 난감해졌다. 목진의 배후에도 성급 천지존이 있어 성급의 실력으로 억압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그의 어머니가 오기라도 하면 경천의 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아버지, 이 정도는 저 혼자도 충분해요.”

뒤쪽에 서 있던 황현지가 가볍게 웃더니 금광을 발하는 두 눈으로 목진을 쏘아봤다.

“목 부주가 부도신족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은 들었네. 하지만 이곳은 부도신족이 아니고 이곳에서는 호위 영진도 장악할 수 없을 것이네.”

황현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에 따르면 목진은 부도신족의 호위 영진의 힘을 빌려 부도신족의 장로들을 제압했고 실제로 실력은 영급 중기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화신지에 들어가는 존재들은 전부 엄청난 신수 종족 중 절세의 천재들로 전투력이 엄청나 목진이 부도신족에서처럼 종횡무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현지는 역시 황왕의 아들답게 목진이 이룬 눈부신 성과를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부도신족의 장로들은 상대하기 번거로워 호위 영진을 사용해야만 했지만, 오늘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

“허허, 목 부주는 참 호기롭군.”

목진이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황현지도 피식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신수 종족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황현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그는 목진을 신수 종족의 공동의 적으로 만들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의 산봉우리에 조용히 서서 상황을 살피던 신수 종족의 절세의 천재들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목진을 쏘아봤다.

목진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 히쭉거리는 사람, 언짢은 듯 목진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허허, 영급 중기밖에 안 되는 인간 천지존 따위가 감히 여기서 막말을 하다니! 제 명에 죽지 못할까 봐 걱정되지도 않나 보지?”

누군가 히쭉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돌려 보니 멀지 않은 산봉우리에 뒷짐을 쥔 사내가 음산한 눈빛으로 목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쪽에서는 만 갈래 영광이 번쩍이며 거대한 새의 모양을 이뤘는데 몸이 온통 노란 것이 황금으로 빚은 황과 독수리를 동시에 닮았다.

“저 사람은 금황조(金凰雕)족의 절세의 천재 방경(方鏡)이란다. 금황조족은 체내에 황족의 혈맥이 깃들어 있어 황족과 아주 가깝게 지냈단다. 게다가 황족과 동맹을 맺어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목진 옆에 서 있던 천황 족장이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채 말했다.

“영급 후기밖에 안 되는 녀석이에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목진은 방경의 말을 듣지도 않고 녀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방경이 황현지한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이, 자기 주제도 모르는 녀석!”

목진의 태도에 방경은 화가 난 나머지 히쭉 웃으며 외쳤다. 그러나 바로 나서지 않고 음산한 눈빛으로 목진을 흘겨보기만 했다.

“그따위 말로 이간질을 할 수 있을 거라 여기는 건가? 자네 설마 이곳 사람들을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나 목진의 실력이 어떤지는 자네가 직접 확인하면 되지 않는가?”

목진은 여전히 방경을 무시한 채 대수롭지 않게 황현지한테 말을 건넸다.

“나는 반드시 불사조의 혈맥을 획득할 것이네!”

황현지는 이내 정색하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목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네는 그럴 자격이 없네.”

목진도 황현지를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다들 몰래 혀를 내둘렀다. 한 사람은 봉황족의 절세의 천재였고 다른 한 사람도 대천세계에서 유명한 천재였다. 그야말로 용쟁호투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싸우면 과연 누가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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