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화. 만고탑(萬古塔)
탕!
이튿날, 오래된 종소리가 도성 곳곳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은 벌레떼처럼 만고성의 중심 지역으로 향했다.
도성의 중심에 벌거벗은 산맥 하나가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산맥의 정상에 오래된 석탑이 놓여 있었다.
이 또한 수수해 보이지만 일단 주위 만장 범위에 들어서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것 같은 압박감이 휘몰아쳐 다들 저도 모르게 경외의 마음을 안고 석탑을 바라보곤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고탑으로 불후대제가 직접 지은 석탑이었다.
사람들은 대천세계를 구한 상고 시기의 제일 강자를 숭배했다.
“이것이 바로 만고탑이란 말인가?”
목진과 청연정, 부도현은 부도탑 주위의 누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목진도 오래된 석탑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만고불후신이 바로 이 석탑에 들어있단 말인가?
“역시 불후대제는 남다르군. 만 년도 넘게 존재했는데 내뿜는 압박감이 여전히 놀랍군.”
석탑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부도현이 서서히 입을 열었다.
성급 천지존인 그도 어느 정도 위압감을 느꼈다.
“불후대제의 실력은 성급 그 이상인 것 같네요…….”
목진도 성급 천지존을 제법 마주쳤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불후대제께서는 확실히 성급을 뛰어넘었단다.”
청연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숙연해졌다.
“성급을 뛰어넘었다면…….”
목진은 흠칫 놀랐다.
“대천세계에는 성급 천지존이 제법 있지만 불후대제 정도의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란다.”
부도현이 나지막하게 한 말에 목진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염제와 무조 선배님 말인가요?”
목진이 본 성급 중 염제와 무조만이 특별해 보였다. 그들은 하늘의 별처럼 닿기 힘들고 진정한 실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비록 하위면 출신이지만 천부적 재능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의지가 남다르단다. 그러니 불후대제 정도의 실력을 갖출 가능성이 크단다.”
부도현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염제와 무조의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그건 대천세계에 좋은 일이죠. 염제와 무조 선배님이 있으면 역외사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목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청연정은 이내 정색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부도현도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역외사족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대천세계 연맹은 역외사족에게 꼼짝도 못 했단다. 불후대제께서 전력을 다해 싸우셨는데도 절반 정도의 지역을 빼앗겼고 대천세계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을 뿐이란다.”
청연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그날의 전쟁은 대천세계가 승리했다기보다 역외사족에서 공격을 잠시 멈췄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단다. 불후대제께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역외사족의 최강자인 천사신(天邪神)을 봉인한 덕분에 녀석들은 수장을 잃어 더 이상 우리와 싸우지 않은 거란다.”
목진은 어머니의 말에서 대천세계의 비참한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천세계는 그때 도대체 얼마나 험난했었단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대천세계 자체가 역외사족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다.
목진은 일전에 하위면에서 역외사족의 노예가 되면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직접 보았다. 그건 짐승만도 못한 생활이었다.
“최근 들어 역외사족이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것 같던데 우리는 내부 상황을 전혀 모른단다. 역외사족에 새로운 사신이라도 생겼다면 대천세계의 평화는 또 깨질 것이다.”
부도현도 덩달아 말을 덧붙였다.
“불필요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역외사족에서 다시 대천세계를 공격하면 최선을 다하면 되죠. 그때는 불후대제께서 녀석들을 겨우 물리쳤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훨씬 좋아졌잖아요?”
쿵!
그때 다시 오래된 종소리가 들리더니 석탑 주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편, 목진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쓰윽 훑더니 석탑 바로 앞쪽에 놓인 우뚝 솟은 석대에 한 무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최전방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마하유였다.
그리고 그 옆에 황금색 도포를 입은 튼실한 중년 사내가 서 있었는데 마하유마저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뒤쪽에 서 있는 마하고족의 장로들도 감히 그와 함께 서지 못했다.
“저 사람이 바로 마하고족의 족장, 마하천이란다.”
옆에 서 있던 청연정이 전한 말에 목진은 흠칫 놀랐다. 저분이 바로 염제와 싸운 적 있던 마하천이란 말인가? 역시 남다르군.
마하천도 목진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멀리 떨어진 목진 등을 바라봤는데 목진은 순간 주위의 공간이 봉인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 호박에 갇힌 벌레처럼 꼼짝도 못 했다.
“콜록!”
갑자기 창로한 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음파가 퍼져나가 봉인된 공간을 부쉈다. 이는 부도현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한기 어린 눈빛으로 마하천을 노려봤다.
이에 마하천은 미소를 지으며 부도현과 청연정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족장이란 놈이 후배를 괴롭히려 하다니, 마하천은 참 예나 지금이나 옹졸하군.”
부도현은 녀석을 무시한 채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정작 목진은 화를 내지 않고 일전의 느낌을 되새기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성급의 힘인가요? 역시 대단하군요. 눈빛 하나만으로도 나를 가둬 꼼짝도 못 하게 하다니 말이에요.”
목진은 부도현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렇다고 화내실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제가 저들이 아끼는 만고불후신을 가져갈 테니 말이에요.”
“건방진 녀석, 누가 들으면 네가 이미 만고불후신의 인정을 받은 줄 알겠구나.”
부도현이 피식거리며 한 말에 목진은 예리한 눈빛으로 부도현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저 녀석이 청연정의 아들이냐?”
마하천도 눈길을 거두더니 옆에 서 있는 마하유를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네.”
마하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 녀석은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에요. 젊은 나이에 천지존경에 이른 걸 보면 요물이나 다름없어요.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무리 나라도 녀석을 쓰러뜨리지 못할 거예요.”
“아쉽게도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구나. 가여운 녀석.”
마하천이 오래된 석탑을 바라보며 말했고 마하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에 제가 만고불후신의 새로운 주인이 될 테니까요.”
마하유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다른 경쟁 상대와 비교하면 그가 성공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실수하지 말아라.”
마하천은 앞쪽 돌기둥에 놓인 돌사자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실패해도 내가 보는 앞에서 만고불후신을 가져갈 사람은 없을 거란다.”
* * *
“저 사람이 수라창 엽경이겠지?”
목진은 석탑의 서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고지에 청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뒷짐을 쥔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제법 훤칠하게 생겼지만 암홍색 눈동자에 살육의 기운이 깃들어 상당히 무서워 보였다.
그의 주위는 공기마저 차가워 아무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금강왕 석라와 도성 탁발창도 있군…….”
황금색 가사를 입은 메마른 사내가 엽경과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 있었는데 반듯한 머리가 빛을 반사해 눈에 상당히 띄었다. 목진은 상냥하게 웃는 녀석의 몸에 무서운 맹수가 깃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또한, 저 멀리 파손된 건물에는 검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등에 부러진 칼을 얹은 채 무덤덤하게 서 있었는데 온몸에서 예리하기 그지없는 도망을 내뿜었다. 그를 가까이하면 누구든 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역시 다들 왔군.”
목진은 녀석들의 강력한 영력 파동을 느끼고는 피가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갈망으로 녀석들의 몸에 깃든 무언가가 손짓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는 불후금신 사이의 이끌림이었다.
쿠쿵!
그때 대지가 파르르 떨리더니 오래된 종소리가 울려 퍼져 다들 고개를 번쩍 들었고 산봉우리에 놓인 오래된 석탑을 쳐다봤는데 꼭 닫혔던 대문이 천천히 열렸다.
대문과 바닥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를 들은 목진도 지그시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예리한 눈빛으로 석탑을 쳐다봤다.
만고탑이 드디어 열렸다!
끼익!
오래된 대문이 서서히 열리자 어둑한 내부에서 신비롭고도 오래된 기운이 스며져 나왔다.
사람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산봉우리에 놓인 석탑을 바라봤다. 불후금신을 수련한 사람만 석탑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몰랐다면 다들 강제로라도 들어가려 했을 것이다.
만고불후신을 앞에 두고 포기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었다.
높은 석대에 서 있던 마하천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서서히 열리는 대문을 쳐다봤는데 눈빛에 만고불후신에 대한 갈망과 엄청난 점유의 욕구가 깃들었다.
5대 고족 중, 다른 네 종족에는 원시 법신을 각각 한 가지씩 지니고 있었다. 이는 네 종족의 조상님들이 원시법신을 수련해낸 사람이라 자연스레 종족 내부에서 계승을 이어왔다. 그러나 나머지 네 종족에도 원시 법신을 수련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원시 법신의 주인이었지만 마하고족은 겨우 보관해주는 대리인일 뿐이었다.
마하고족의 조상님은 불후대제와 만고불후신을 다퉜는데 후자가 한 수 위라 결국 이를 수련해내고 대천세계의 제일 강자가 되었다.
아마 불후대제는 그날의 대결 때문에 마하고족한테 만고불후신을 맡겼던 것이 분명했다.
다만, 다른 네 종족과 달리 마하고족은 주인이 아닌 신분으로 만고불후신을 보관하고 있었다. 이에 마하고족 역대 족장들은 질투가 났고 세월이 흐르면서 만고불후신에 대한 집념도 상당히 강렬해졌다.
“불후대제, 마하고족은 당신을 대신해 만고불후신을 만 년도 넘게 지켰으니 이제 우리한테 넘겨줘도 되지 않겠나?”
“당신이 우리 조상님에게 만고불후신을 빼앗았으니 이제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마하천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리더니 인접한 산봉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쓰윽 훑었다. 그들은 모두 이번에 만고탑에 들어갈 사람들이었다.
“만고탑이 열렸구나. 만고탑에서의 경쟁은 상당히 치열하다는 걸 명심하거라. 층마다 인수의 절반이 탈락할 것이니 끝까지 가고 싶으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마하천의 말에 다들 흠칫 놀라더니 이내 정색했다.
“층마다 인원수의 절반이 탈락하다니…….”
목진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이 정도 탈락률이라면 상당히 살벌한 대결이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만고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야 진정한 만고불후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슉.
마하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마하유가 먼저 한 갈래 빛줄기가 되어 하늘을 가르며 만고탑의 문을 넘었다.
슉! 슉!
잇따라 엽경, 석라, 탁발창도 하늘 높이 날아오르자 나머지 사람들도 사정없이 만고탑으로 향했다.
“저 이만 가볼게요.”
목진은 청연정과 부도현한테 말을 건넸다.
“조심하거라.”
청연정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하거라. 만고불후신도 대단하지만 우리 부도신족의 무한광명체도 5대 원시 법신 중 하나라 전혀 뒤처지지 않는단다.”
“콜록.”
청연정의 말에 부도현은 힘껏 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대장로가 되었다고 해도 아무한테나 무한광명체의 수련법을 알려줘서는 안 된단다. 이는 조탑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 일이야.”
“대장로인 제가 추천하면 되죠. 그리고 조탑이 동의할 수도 있잖아요?”
청연정은 부도현을 무시한 채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이런!”
두 사람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목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한 갈래 빛줄기가 되어 석탑으로 향했다.
1각도 안 되는 사이, 불후금신의 수련자 백여 명이 전부 석탑으로 들어갔다. 마하천은 옷깃을 휘날려 허공에 수백 개의 영력 광경을 이뤘고 이내 석탑에 들어간 사람들을 비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