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7화. 안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더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성천마제는 흑시천마제를 달래며 말을 이어갔다.
“염제와 무조가 우리한테 위협적인 존재이긴 하지만 천사신께서 봉인을 뚫고 나오시기만 하면 그들을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네.”
“내 명을 전하라. 오늘부터 전력을 다해 무한의 화역과 무경을 공격한다. 염제와 무조의 발목을 꽉 잡고 있으면 그들은 천사신을 봉인한 곳에 가지 못할 것이다.”
“네!”
만마전 사람들은 도천의 마의 기운을 방출하며 소리를 질렀다.
“성마, 우리가 염제와 무조의 발목을 잡는다고 해도 천사신을 봉인한 곳에는 불후대제의 목숨을 대가로 친 영진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곳에 접근하기만 하면 튕겨 나가는데 무슨 수로 천사신이 봉인을 뚫는 걸 도와준단 말인가?”
누군가 억만 갈래의 마광을 발하며 입을 열자 뒤쪽 공간이 요동치며 마해가 아른거렸다. 엄청난 마의 위압감을 형성한 그는 32개 종족 중 영마족(靈魔族) 족장인 영천마제(靈天魔帝)였다.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 다들 내가 말하는 대로 하면 되네.”
“이건 우리의 마지막 기회란 것을 명심하게. 우리가 대천세계 땅의 절반을 차지하긴 했지만 이 세상은 이방인을 배척하기 마련이라네. 이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 이상 우린 대천세계의 힘에 정화될 것이네.”
성천마제의 말에 다들 금세 살기를 품었다.
“다들 이만 가보거라.”
성천마제의 말에 마영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리더니 마광이 되어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32개 종족 족장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순간 도천의 마의 기운이 요동쳤다.
1각도 안 되는 사이에 만마전은 텅 비었고 성천마제는 고개를 들고 마염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대천세계 쪽을 바라봤다.
“나의 신이시여, 당신이 돌아오면 대천세계는 우리 노예가 될 것입니다!”
“그때가 오면 대천세계는 당신을 봉인한 대가를 제대로 치를 것입니다.”
* * *
천라대륙의 상고의 천궁에 있는 영력 하천에 거센 파도가 요동치며 웅장하고 순수한 영력이 방출돼 안개를 형성했다. 이에 해당 구역의 공기는 유난히 맑고 시원했다.
영력 하천의 양측에 놓인 석대에는 젊은이들이 조용히 앉아 천지의 영력을 흡수하며 육신을 제련하고 있었고 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수련하고 있었다.
상고의 천궁은 더는 조용한 곳이 아니었다. 빠르게 강대해지는 목부 덕분에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상고의 천궁은 어느새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과거 천궁은 유명하긴 했지만 천제가 혼자서 이끌었고 그의 부하인 전주들은 절세의 강자가 되기도 전에 역외사족과의 전쟁에서 사망했다.
그들과 멀리 떨어진 높은 산맥에는 목진이 느긋하게 누워서 영력 하천 주위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영력 하천 주위에 모인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목진은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목진은 목부의 일을 대부분 만다라 등한테 맡겼는데 덕분에 목부는 계속해서 강대해졌다. 하여 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성취감을 느꼈다.
그는 목부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천라대륙의 패주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멀리 떨어진 수련대에서 소란이 일었는데 우아한 모습의 여인이 지나가자 다들 그녀한테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무척 존귀해 보였고 영롱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을 지녀 절세의 미녀라 불릴 만했다. 그녀는 정인이 심혈을 기울여 가꾼 수련 성지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했다.
소년들은 여인을 몰래 힐끗거렸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들은 여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또한, 소녀들은 여인과 자신을 비교하자 더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하지만 언젠가 그녀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여인이 점점 멀어지자 사람들은 아쉬운 듯 눈길을 거뒀다.
잠시 후, 여인은 목진이 있는 산맥에 올라가 상고의 천궁을 쓰윽 훑으며 말했다.
“목부가 제법 규모를 갖췄는걸?”
이에 목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금세 진지해졌다.
“우리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누가 너랑 아이를 낳는대?”
목진의 낯 뜨거운 말에 낙리는 부끄러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두 사람은 아직 혼인도 올리지 않았는데 목진은 이미 후대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진은 낙리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더니 몸이 화끈거려 그녀의 날씬한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누웠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낙리는 흠칫 놀라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이를 악물고 목진을 쏘아봤다.
목진은 낙리의 나른한 감촉을 느끼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우리 지금 당장 만들어볼까?”
“뭘 만들어?”
낙리가 멈칫하며 묻자 목진은 진지하게 답했다.
“당연히 아이지.”
목진이 말에 낙리는 얼굴이 불타오르듯 뜨거워졌다.
퍽!
잇따라 낙리가 팔꿈치로 목진의 배를 힘껏 때리자 훤칠한 청년은 표정이 순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다시 한번 그따위 소리를 해봐!”
낙리는 괜히 목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낙리는 낙신족의 황녀일 뿐만 아니라 태령고족의 성녀가 되어 다들 그녀한테 예를 갖추곤 했다. 그런데 목진의 태도에 순간 어쩔 바를 몰랐다.
“내 아내가 될 사람한테 그런 말도 못 해?”
목진이 시무룩해져 묻자 낙리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식으로 혼담이 오가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
이에 목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배를 어루만지다가 바닥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낙리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입꼬리를 씰룩거리고는 정말 아프기라도 한 건 아닌지 힐끔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목진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목진은 잠시 멍해졌다가 입맛을 다시며 낙리의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낙리는 이를 무시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옆에 앉았다.
목진은 낙리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를 맡고는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낙리의 길쭉한 다리에 머리를 얹고는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네가 북창령원을 떠난 뒤로 난 이 순간만을 바랐어.”
목진의 말에 낙리는 온몸을 파르르 떨더니 고개를 숙여 훤칠한 청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감은 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에 순간 코끝이 찡했다.
목진은 현재 대천세계의 진정한 정예급 강자가 되어 상당히 유명해졌고 수많은 이들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왔다.
낙리는 아직도 낙천신이 북창령원에 찾아와 자신을 데려갈 때, 소년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그때 소년은 언젠가 절세의 강자가 되어 아무도 더는 낙리를 자신의 곁에서 데려가지 못하게 할 거라 다짐했었다.
비록 그가 한 말을 지켜내려면 간난신고를 겪어야 하지만 말이다.
낙리는 영로에서 만났던 소년이 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어 좋았다. 그 미소 덕분에 자신 역시 수많은 고난을 마주했을 때 이겨나갈 용기가 생기곤 했다.
하여 낙리는 목진이 절세의 강자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만만하고 찬란했던 미소를 잃고 상처투성이가 될까 봐 무척 걱정했었다.
그러나 목진은 전혀 변치 않았다.
이러한 생각에 낙리는 손으로 목진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목진아,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인지 알아? 낙신족을 구한 것도 아니고 태령고족의 성녀가 된 것도 아니야…… 영로에서 널 만난 게 나의 최대의 행운이었어.”
산들바람을 느끼던 목진은 여인의 말에 순간 뭉클했다.
목진은 눈을 뜨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영력 하천 주위에 모인 앳된 청년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한테는 이제 지켜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누가 이를 파괴하려 한다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상대가 아무리 무서운 역외사족이라도 말이다.
“낙리야, 대천 맹약이 무사히 끝나면 나와 혼인하자.”
목진이 깊게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낙리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는데 그녀의 은발이 햇살에 유난히 눈부시게 빛났다.
“좋아!”
* * *
석 달은 훌쩍 지나갔다. 그사이, 대천세계의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이는 대천세계의 변방에서 계속해서 역외사족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변방을 지키는 무한의 화역과 무경에서 전쟁이 가장 많이 벌어졌다. 수많은 악마가 찾아와 미친 듯이 공격을 개시했다.
녀석들의 공격은 무한의 화역과 무경에는 전혀 타격이 없었지만 그들이 왜 이러는지 다들 바로 눈치챘다.
수만 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역외사족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깨달은 대천세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역외사족은 사악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상고 때만 해도 녀석들 때문에 대천세계는 피바다가 되었고 수많은 강자가 사망했다.
그런데 녀석들이 다시 대천세계에 쳐들어온다니 또 피바람이 불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대천세계의 모든 생명이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천세계가 곧 멸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불안해했다.
* * *
천라대륙 목부 본부의 대전 밖, 목진은 만다라와 구유를 우두머리로 한 목부 강자들을 쓰윽 훑었다. 목부는 현재 천라대륙의 진정한 패주가 되어 이 땅의 모든 세력의 인정을 받았다. 특히, 목진이 마하고족에서 겪은 일이 알려지자 천라대륙을 호시탐탐 노리던 대천세계의 정예급 세력들도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
다들 목진은 진정한 최정예급 강자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실력으로 따져도 그는 전혀 뒤처지지 않고 엄청난 뒷배 덕분에 천라대륙의 패주가 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여 오늘, 천라대륙의 각 정예급 세력의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목부는 상당히 북적거렸다.
“난 곧 북황의 언덕에 갈 것이니 너희가 천라대륙을 잘 지켜야 한다. 그러니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단다.”
목진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휘하 전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외사족은 이번 기회에 봉인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결과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목부의 주인으로서 목진은 완벽하게 준비해야 했다. 목부 휘하의 강자들이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갑자기 악마들이 찾아와도 상고의 천궁처럼 멸망의 길을 걷지 않을 것이다.
“네!”
목부의 강자들은 이내 정색하며 답했다. 그들도 최근 들어 대천세계에 떠도는 얘기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건 대천세계를 휩쓸 수도 있는 재앙이라 다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자칫 잘못하면 대천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진정한 멸망의 위기라 세력들 사이의 논쟁은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한편, 천라대륙의 정예급 세력 수장들은 엄청난 재앙이 닥치기 전에 천라대륙에 패주가 생긴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 그럼 천라대륙은 한데 뭉치지 못해 역외사족이 찾아오는 순간 바로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천라대륙 패주인 목진은 성급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전투력이 막강했고 녀석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