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8화. 북황의 언덕
다들 경외의 뜻이 담긴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는데 목봉이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봉은 이내 감탄했다. 북령경을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목진은 평범한 소년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엄청난 대륙의 패주가 되었으니, 자신보다 훨씬 훌륭했다.
목봉은 왠지 으쓱했다. 자신은 더없이 평범한 사람이지만 아들은 엄청난 강자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아버지도 목부에 계세요.”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목봉한테 말을 건넸다. 한 달 전, 그는 목봉을 목부로 모시고 왔다. 이곳이 백령대륙보다 훨씬 안전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목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와 아들은 북황의 언덕에 가 힘겨운 싸움을 벌일 텐데 도움은 되지 못해도 적어도 짐은 덜어줘야 한다고 여겼다.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대신, 어머니와 낙리를 잘 지켜주거라. 이건 사내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다.”
목봉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목봉은 실력이 막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만큼은 누구보다 강했다. 아내 없이 홀로 목진한테 온갖 정성을 쏟아부으며 키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목진이 좋은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목봉 덕분이었다.
“이만 떠납시다.”
목진의 말에 청연정과 낙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진 등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만다라와 구유는 서로 마주 보더니 이내 정색했다. 그들도 이번 북황의 언덕에서 벌어질 일이 대천세계의 생사가 달린 중대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 * *
이와 동시에, 대천세계의 곳곳에서 웅장한 영력들이 솟구쳐 엄청난 기세를 자랑했다.
그들은 전부 북황의 언덕으로 향했다.
대천세계의 무한의 화역은 적색 대륙으로 온도가 높아 열기에 이글거렸으며 수많은 화산이 분출해 암장이 하천처럼 사방에 흘러내렸다.
한편, 대륙의 중심에 화산들이 연결되어 지극히 웅장한 도성을 이뤘는데 연꽃처럼 생긴 것이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도성의 높이 솟아오른 석대에 누군가 뒷짐을 쥔 채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남다른 기품을 자랑하는 염제 소염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륙 외부를 살폈는데 공간이 계속 일그러지며 도천의 마의 기운을 방출했다. 그 속에서 살기 가득하면서 탐욕스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역외사족이 무한의 화역을 강적으로 여기는 것 같구나.”
염제 뒤에 서 있던 백발노인은 이내 정색하며 입을 열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염제의 스승인 약진이었다.
“곧 대천 맹약이 열릴 텐데 역외사족이 이곳에 대거 출몰한 것을 보면 소염의 발목을 잡으려는 것 같군요.”
옆에 서 있던 늘씬한 여인도 덩달아 입을 열었다. 채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무척 요염하게 생겼는데 목소리까지 절세의 요물이었다.
그녀는 바로 무한의 화역의 안주인 중 한 명인 채린(彩鱗)이었다.
“저러는 걸 보니 역외사족에서 북황의 언덕에 손을 쓸 것이 분명하군요.”
그때 또 한 명의 절세의 미인이 입을 열었는데 그녀는 연두색 치마를 입은 단아한 여인으로 무한의 화역의 또 다른 안주인인 소훈아였다.
두 아내의 말에 염제도 동의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부단히 요동치는 마의 기운을 살폈다.
“내 명을 전하라. 무한의 화역은 1급 경계 태세를 취하고 모든 천지존은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하도록 하라.”
잇따라 뒤쪽에 불꽃이 번쩍이더니 누군가 소염의 명을 전하러 갔다.
쿠쿵!
그런데 그때, 허공에 갑자기 거대한 균열이 일더니 수많은 마영이 벌떼처럼 나타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마영 세 개가 균열을 비집고 나오자 염제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32개 종족의 족장 중 세 명밖에 오지 않다니, 역외사족이 나를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닌가 싶네.”
* * *
무경에서 태연하게 상황을 살피던 무조 임동은 앞쪽 공간에 균열이 일더니 그 속에서 수많은 마영들과 함께 거대한 마영 세 개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그의 뒤쪽에도 아름다운 여인이 두 명 서 있었는데 왼쪽에 서 있는 여인은 하얀색 치마를 입고 청색 장검을 쥐고 있는 것이 꼭 월궁의 여신 같았다.
그리고 반대편 여인은 푸른색 장발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지녔는데 그녀가 방출한 무한의 한기에 세상 만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이러한 한기 때문인지 여인은 여전히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여인은 무경의 안주인인 능청죽과 응환환(應歡歡)이었다.
“빙령족의 천지존을 전부 데려왔어.”
응환환의 차가운 목소리와 더불어 능청죽의 부드러운 목소리도 덩달아 들려왔다.
“무경 휘하의 모든 천지존은 싸울 준비를 마쳤어.”
이에 무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여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또 함께 악마들과 싸우게 될 줄은 몰랐어.”
“걱정하지 마. 변고가 생기면 이번에는 내가 너를 구해줄게.”
능청죽이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무조는 금세 시들시들해졌다.
“제발 부탁인데 더는 그러지 마. 난 절대 감당 못 해.”
“그렇게 싫어? 나도 그때 너더러 나를 구하라고 한 적 없었어.”
능청죽이 피식 웃자 옆에 서 있던 응환환도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무조는 무안한 듯 어깨를 들썩이기만 했다.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무조는 고개를 들고 무경에 찾아온 세 명의 큰 마영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는데 벼락이 번쩍이는 지팡이가 나타났다.
“걱정 마. 이번에는 아무도 너희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말을 마친 무조는 강력하기 그지없는 파동을 내뿜기 시작했다.
* * *
북황대륙에 있는 북황의 언덕은 대천세계의 중심 구역에 존재하는 곳으로 상고 시기, 가장 번화하고 강대한 곳이었다. 그러나 역외사족의 침략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다행히 불후대제가 제 때에 나서 대천세계의 각 세력, 종족, 개인 등과 대천 맹약을 체결해 대천궁을 만든 덕분에 역외사족은 열세에 처하기 시작했다.
역외사족과 대천세계의 결전은 북황대륙에서 펼쳐졌는데 불후대제와 천사신의 대결로 인해 북황대륙은 산산이 조각났고 나머지 지역은 현재의 북황의 언덕이 되었다.
다행히 천사신은 봉인되었고 북황의 언덕은 불후대제의 직속 부하인 수호자 부대가 지키도록 했으며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됐다. 하긴, 아무리 천지존이라도 이토록 위험한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고 스스로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대신 대천 맹약의 날이 되면 대천궁에서는 대천첩을 날려 대천세계의 천지존들을 이곳에 모아 불후대제께서 남기신 봉인으로 천사신의 남아있는 흔적을 지우곤 했다.
대천세계의 일반 세력과 사람들은 대천 맹약을 접할 기회조차 없어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천 년에 한 번 열리는 이 행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이는 대천세계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행사로 자칫 잘못하면 파멸의 재앙이 닥칠 수도 있었다.
천사신은 대천세계의 악몽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수만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수많은 서적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불후대제는 목숨을 바치면서 겨우 녀석을 봉인했는데 만약 그가 봉인을 뚫고 도망이라도 가면 큰일이었다. 대천세계에는 이제 불후대제 같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 * *
“여기가 북황의 언덕인가요?”
세 갈래 빛줄기가 공간 난류와 강풍 무리를 가르며 비행하더니 부서진 대륙을 발견했다.
만신창이 된 땅은 암홍색으로 변했고 멀리 떨어졌는데도 처참한 기운이 강력하게 느껴졌다.
세 갈래 빛줄기가 영광을 거두자 모습이 드러났는데 바로 목진, 청연정, 낙리였다.
목진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부서진 대륙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말로만 듣던 불후대제와 천사신의 결전의 땅이 무척 궁금했었다.
이에 옆에 서 있는 청연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뜩 경계하며 북황의 언덕을 살폈다. 그녀는 파손된 대륙에 지극히 무서운 기운이 남아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급 대종사인 그녀도 압박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서운 곳이군요.”
목진은 이내 감탄하며 암홍색 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북황의 언덕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위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그윽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는 되었다.
“이곳은 천사신이 봉인된 곳이란다. 너무 강대한 존재라 봉인되었다고 해도 남아있는 기운이 스며져 나온단다. 불후대제께서 친 영진 덕분에 그 기운은 제대로 제압되었지, 아무리 성급이라도 이곳에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할 거란다.”
청연정의 말에 목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려고 했는데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한 무리가 영력 파동을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는데 전부 천지존이었다.
대천 맹약의 날에 가까워질수록 대천첩을 받은 강자들이 점차 이곳에 모여들었다.
한편, 상대방도 목진 등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경외의 뜻을 담아 가볍게 인사를 하더니 북황의 언덕으로 향했다.
“내가 제법 유명해졌나 보네?”
목진은 상대방의 태도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들도 목진 등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저들은 분명 정 이모한테 인사를 올린 것인데 네가 왜 우쭐거리는 거야?”
옆에 서 있던 낙리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목진이 괜히 쏘아보자 그녀는 깔깔 웃었는데 그 모습에 목진은 왠지 마음이 근질거렸다.
“목진이 대천세계의 유명 인사가 된 것만은 사실이구나. 대천세계의 천지존들은 마하고족의 일로 마하천이 만고불후신의 주인이 된 너한테 꼼짝도 못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단다.”
청연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목진은 껄껄 웃기만 했다.
“우리도 이만 내려가요.”
말을 마친 목진과 낙리, 청연정은 함께 북황의 언덕으로 향했다. 곧 도착할 무렵, 그들은 갑자기 멈칫하더니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북황의 언덕 위쪽 하늘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그가 마음을 잘못 먹으면 무한의 힘이 날아와 그를 완전히 없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심하거라, 이건 불후대제께서 남긴 봉인 영진이란다.”
청연정은 이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봉인 영진은 천사신을 봉인했을 뿐만 아니라 북황의 언덕 외부에 보호막을 형성해 역외사족이 접근하지 않도록 막고 있단다. 접근하면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그저 긴장을 풀고 영력으로 육신을 보호하면서 진입하면 된단다.”
이에 목진이 바로 영력을 끌어올려 육신을 감싸자 무서운 압박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목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참으로 무서운 힘이군요. 이렇게 강력한 호위 영진이 있는데 역외사족에서 어찌 감히 여기까지 찾아온단 말인가요?”
목진이 이내 감탄하며 한 말에 청연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답했다.
“역외사족은 괴이하기 그지없단다. 봉인 영진의 힘이 엄청나긴 하지만 녀석들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단다.”
목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북황의 언덕에 진입한 그는 아래쪽을 쓰윽 훑더니 흠칫 놀랐다.
부서진 대지에 무덤을 이룬 산맥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들은 상고의 대전에서 사망한 강자들이란다.”
청연정은 어느새 숙연해졌고 목진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이곳에서 사망한 이들은 생전에 분명 대천세계의 정예급 강자였을 것이다. 무덤이 이렇게나 많은 것만 봐도 상고의 대전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대천세계에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을지 충분히 상상되었다.
그들은 전부 대천세계를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들이었고 존중받아 마땅했다.
슉!
그때 멀리서 두 갈래 회색빛이 날아오더니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목진 등한테 인사를 올렸는데 내뿜는 영력 파동으로 보아 전부 영급 천지존이었다.
“청연정 대장로님, 목진 부주님과 낙리 성녀를 뵙습니다.”
목진은 회색 도포를 입은 두 사람의 가슴팍에 새겨진 황량한 무덤을 보고는 바로 그 정체를 파악했다. 그들은 북황의 언덕의 수호 부대였다.
그들은 불후대제의 직속 부하로 불후대제께서 사망한 뒤, 북황의 언덕에 남아 여태껏 이곳의 봉인을 지키고 있었다.
실력으로 따지면 5대 고족이라도 수호자 부대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절대 북황의 땅을 떠나지 않아 대천세계의 세력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목진은 그들의 희생에 자연스레 경외의 마음을 품고 공손하게 인사를 나눴다.
“우리를 따르시죠.”
두 사람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지만 목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서서 북황의 언덕의 깊숙한 곳으로 향했고 목진 등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