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0화. 유언
“진천 선배님, 봉인은 언제 시작하나요?”
“대천화마진은 천 년에 한 번 순환하는데 아직 몇 시진 남았단다. 새로운 순환이 시작하게 되면 우리가 힘을 주입해 봉인을 강화할 수 있단다.”
진천의 말을 들은 목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앉아 때가 되기만 기다리려 했는데 검은색 도포를 입은 백발의 불사의 주인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저기…….”
불사의 주인은 목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창로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목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경험이 풍부한 진천마저 불사의 주인을 선배님이라 부르는지라 목진도 당연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허허.”
불사의 주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가 만고불후신의 인정을 받고 그 주인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한 번 봐도 될까?”
목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움직였는데 등에서 유리의 빛이 발하더니 그 속에 조용히 앉아있는 투명한 존재가 아른거렸다. 녀석은 조용히 앉아있을 뿐인데도 만고의 세월의 기운을 방출했다. 마치 영생불멸할 것만 같았다.
다들 목진의 뒤쪽에 나타난 오래된 존재를 바라보더니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만고불후신은 상고의 대전을 치른 뒤로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마하천만 언짢은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불사의 주인은 투명한 허상을 한참 쳐다보더니 안색이 훨씬 밝아져 목진한테 말을 건넸다.
“내가 만고불후신을 다시 볼 수 있을 줄이야…….”
말을 마친 그는 목진한테 인사를 올리려 했는데, 불사의 주인이 갑자기 그에게 절을 했다. 목진은 순간 어쩔 바를 몰랐다. 대천세계에서 그의 절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다.
“그러지 마세요.”
목진이 씁쓸하게 웃으며 한 말에 불사의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후대제께서는 만고불후신한테 새로운 주인이 생기면 그를 주인으로 모시라고 하셨단다.”
그의 말에 다들 깜짝 놀랐다. 심지어 진천과 청삼검성마저 흠칫 놀라 목진을 쳐다봤다.
불사의 주인은 불후대제의 직속 부하로 그를 신처럼 받들어 모셨고 그가 남긴 계승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극강의 실력자로 거듭나 대천세계의 핵심 역량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목진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면 그 휘하의 실력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세력 못지않을 것이고 5대 고족도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하천은 순간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목진이 정말 불사의 주인을 부하로 두면 부도신족이 아니라도 마하고족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왠지 화가 났다. 그것은 전부 마하고족이 누려야 할 것들인데 지금은 전부 목진이 차지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서천전황도 눈가를 파르르 떨며 목진을 바라고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목진은 이미 성급 후기나 다름없는 실력자가 되어 언젠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강자가 되어 두 번째 무조가 될 가능성이 파다했다.
목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불후대제께서 그런 유언을 남기셨을 줄 몰랐다. 그런데 목진은 금세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사의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저를 너무 높이 평가하시네요. 저는 선배님들이 북황의 언덕을 지키시는 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참 어린 제가 참견할 자격은 없는 것 같네요. 그러니 저를 주인으로 모시라는 불후대체의 말씀은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선배님들은 대천세계의 평화를 수호하는 데 전력을 다하시면 될 것 같아요.”
북황의 언덕을 지키는 이들의 실력은 막강해 누구든 그들을 휘하에 두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목진은 바보가 아니었다. 아무리 불후대제의 유언이 있다고 해도 그가 강제로 그들을 거느리려 하면 오히려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다.
목진의 말에 불사의 주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목진이 뭘 걱정하는 지 바로 알아챘다. 목진은 아직 그들의 주인이 되기에는 실력이 조금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가 언젠가 불후대제만큼 강해지면 그들은 자연스레 그를 주인으로 모시려 할 것이다.
이렇게 대전은 다시 조용해졌는데 다들 경외의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봤다.
그 사이 세 시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때 북황의 언덕의 파괴된 대지가 갑자기 격렬하게 진동했다.
크으으으!
대지의 깊숙한 곳에서 포효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는데 파멸의 힘이 깃든 포효는 하늘과 땅을 비틀고 뒤집을 것만 같았다.
검은색 광장에 세워진 동관들도 파르르 떨리더니 그 속에서 영력 빛줄기가 솟구쳤다가 빠르게 이어졌다. 1각도 안 되는 사이, 북황의 언덕의 위쪽 하늘에 위력이 상당하면서 오래된 영진이 형성되었다.
이와 동시에, 범음과 함께 무한의 힘이 닿아 미친 듯이 요동치던 대지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때 대천궁에 앉아있던 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강력한 위압감이 형성되었다.
“여러분, 이제 때가 되었으니 영진으로 천사신의 마지막 생명 흔적을 없앱시다!”
“알겠네!”
대전에 모인 천지존들은 한기 어린 눈빛으로 검은색 광장 쪽을 노려보며 외쳤다.
쿠쿵!
북황의 언덕은 부단히 떨렸고 검은색 광장에 놓인 동관이 내뿜은 빛줄기는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서로 이어져 위쪽 하늘에 엄청난 위력을 지닌 영진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아득히 먼 영진에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무서운 힘을 느꼈다. 이는 성급 후기라도 감히 덤비지 못할 정도의 힘이었다.
어느새 광막이 형성되더니 빠르게 퍼져 북황의 언덕 전체를 감싸 가장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한 듯했다.
그때 대천궁에 앉아있던 진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대천궁 너머 북황의 언덕에 형성된 거대한 영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각자 다른 동관을 책임질 것이고, 내가 하명하면 영력을 전부 주입하면 되네!”
진천의 웅장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자 목진 등은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바로 동관 앞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드넓은 검은색 대지에 서 있었고 대지에 박힌 동관에 사람이 한 명씩 나타났다.
목진은 동관에 앉아 고개를 들고 허공에 형성된 거대한 영진을 살피고는 한껏 정색했다. 영진에 깃든 힘이 조금만 스며져 나와도 체내의 영력이 무질서해질 것 같았다.
“그 힘은 성급을 훨씬 초월했어…….”
목진은 이내 중얼거렸다. 대천화마진은 불후대제의 생명으로 만들어진 영진으로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저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진천도 검은색 대지의 중심에 박힌 동관 옆에 나타나자마자 영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영진에 깃든 웅장한 힘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것은 대천화마진이 곧 순환을 마쳐가기 때문인데 순환을 마치면 바로 강대한 영력을 주입해 다시 대천화마진을 가동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환을 시작해야 천사신의 남아있는 생명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다.
북황의 언덕을 완벽히 감싼 영진이 발하는 빛이 점차 어두워졌다.
그러다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영진이 발하는 영광이 완전히 사라졌다.
쿵!
그때 북황의 언덕의 대지가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균열이 일었고 그 속에서 마의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잇따라 하늘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마의 기운이 닿은 곳은 천지의 영력마저 오염되었다.
마의 기운에 닿은 천지존 한 명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검은색 가루가 되어 영원히 사라졌다.
목진 등은 순간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다들 균열에서 스며져 나온 마의 기운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 몰랐다.
크으으으!
대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나지막한 비명이 들리자 목진 등은 고개를 숙여 지하의 상황을 자세히 살폈는데 칠흑 같은 균열 사이로 사악하기 그지없는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영력을 주입해 대천진을 가동하게! 천사신이 봉인을 뚫고 나오면 절대 안 되네!”
진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천지존들은 흠칫 놀라더니 바로 영력을 끌어올려 동관에 주입했다.
위잉!
천지존들이 나서자 동관에서 눈부신 빛이 발하더니 대지에 닿은 곳에서 영광이 휘몰아쳐 북황의 언덕 전체를 감쌌다. 이는 광막처럼 대지를 뒤덮은 동시에 무서운 마의 기운이 스며져 나오는 것을 막았다.
쿠쿵!
무궁무진한 마의 기운이 미친 듯이 광막을 공격해 대지가 격렬하게 떨렸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진천은 안색이 한껏 어두워져 청삼검성 및 불사의 주인과 눈을 마주치고는 웅장한 영력을 모아 거대한 지존법상을 이뤘다.
진천의 뒤쪽에는 손에 금륜을 든 거대한 허상이 나타났는데 방대한 육신에 수많은 별이 새겨진 그의 지존법신은 천륜주마신(天輪誅魔身)으로 대천세계의 99등급 지존법신 순위권 중 무려 9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청삼검성의 뒤쪽에도 거대한 청광 장검이 나타났는데 거대한 검이 파르르 떨며 형성한 도천의 검기에 천지가 반으로 갈라질 것 같았다. 이는 청검통현체(青劍通玄體)로 99등급 지존법신 순위권 중 10위를 차지했다!
그 외, 불사의 주인의 뒤쪽에는 거대한 지팡이를 쥔 허상이 나타났는데 그가 내뿜는 도천의 사망의 기운은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다름 아닌 99등급 지존법신 순위권 중 12위를 차지한 불사법신(不死法身)이었다!
성급 후기의 실력자 세 사람은 영력을 아낌없이 끌어올렸다.
쿠쿵!
웅장하기 그지없는 영력은 요동치는 바다처럼 그들이 밟고 있는 가장 큰 동관에 스며들었다.
쿵!
잇따라 대지에 박힌 모든 동관이 격렬하게 떨리더니 지극히 웅장한 영력 빛기둥이 솟구쳐 대천화마진에 스며들었다.
위잉!
수많은 영력 빛기둥이 스며들자 대천화마진은 다시 눈부신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사그라들었던 힘도 빠르게 웅장해졌다.
또한, 영진의 중심에 신비로운 빛이 모여 점차 얼룩진 장창으로 변했다.
장창에 깃든 지극히 원시적인 힘은 꼭 대천세계가 이뤄질 때, 자연스레 형성된 신비로운 힘 같았다.
그 힘을 느끼던 목진은 순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만고불후신이 무언가에 이끌린 듯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진천 등을 포함한 성급 후기의 실력자들도 오래된 장창에서 치명적인 위협감을 느끼고 흠칫 놀랐다.
장창이 그들을 목표로 삼았으면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다.
슉!
대천화마진이 파르르 떨리자 얼룩진 장창이 한 갈래 빛줄기가 되어 곧장 대지에 꽂혔다.
치익!
장창이 바로 사라지자 대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왔고 대지가 미친 듯이 진동하며 마의 기운을 방출했다. 곧 절세의 흉물이 강제로 봉인을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퍽!
마의 기운이 대지에 뒤덮인 광막에 부딪히자 대지가 격렬하게 진동해 북황의 언덕의 수많은 산맥이 와르르 무너졌지만 광막은 끝까지 버텨냈고 마의 기운은 결국 새어 나오지 못했다.
마의 기운이 점차 사그라들자 대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마안은 바깥세상을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놈들, 내가 봉인을 뚫고 나가면 대천세계의 모두를 내 노예로 만들 것이다!”
이에 진천, 청삼검성, 불사의 주인은 이내 정색했다.
“못 들은 척하게. 녀석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뿐이네. 우리가 대천화마진을 잘 유지해 99번째 장창이 공격을 마치면 천사신의 생명 흔적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네!”
진천의 말에 천지존들은 조금이나마 안심되어 바로 영력을 끌어올려 동관에 주입했다.
진천, 청삼검성, 불사의 주인도 서로 마주 보더니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천화마진이 다시 가동되었으니 99번째 장창이 공격을 마치면 천사신은 완전히 죽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북황의 언덕을 잘 지키기만 하면 되네.”
진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청삼검성은 고개를 들고 북황의 언덕 밖을 바라봤다.
“주위 대륙에 이동이 전해지지 않는 걸 보면 역외사족은 여기 오지 않은 것 같네.”
“저들이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네. 천사신은 저들의 최강 필살기라 분명 구하러 올 것이네!”
불사의 주인의 말에 진천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기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