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주재-988화 (987/1,000)

988화. 마재(魔災)

“이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놓고 몰래 도망가려 한 건가?”

한기 어린 목소리가 들리며 낙리가 모습을 드러내 차가운 시선으로 녀석을 쳐다봤다.

“정말 예쁘장하게 생겼군. 내 손에 잡히면 자네 몸이 성치만은 않을 것이네!”

현마제는 낙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정색했다. 그는 오래된 족자에서 지극히 무서운 파동을 느꼈지만 낙리는 아니었다. 하여 낙리만 포획하면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슉!

생각을 마친 현마제는 수많은 마영을 이루며 손을 휘둘렀는데 진득한 마의 기운이 홍류를 이뤄 낙리에게 향했다.

그런데 낙리는 현마제의 공격에 조용히 서서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기만 했다.

위잉!

태령고도가 파르르 떨리더니 한 갈래 빛이 내려앉았다. 화려한 빛에 깃든 영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했다. 현마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쿵!

영광에 적중한 현마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도천의 마의 기운을 방출했다. 그러나 태령고도는 태령고체처럼 무한의 영력이 깃들어 있어 1각도 안 돼 녀석은 반항을 포기하고 절망스러운 듯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잠시 후, 현마제는 웅장한 영광의 공격에 육신이 폭발해 사망했다.

허공에 서 있던 낙리는 무덤덤하게 서서 상황을 살폈다. 태령고도에는 무한의 영력이 깃들어 있어 아무리 성급 초기의 강자라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현마제 따위가 어찌 그 상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광경에 역외사족의 강자들은 화들짝 놀라 도망갔고 일전에 도성에 갇혔던 대천세계의 강자들은 이때다 싶어 추격전을 벌였다.

낙리는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심되어 다른 쪽을 바라봤는데 그쪽에도 경천의 영력 파동이 일었다. 임정과 소소도 다른 두 마제와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과정은 반나절 만에 끝났는데, 역외사족의 정예급 강자들은 전부 죽었고 나머지는 해당 대륙의 강자들만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여 낙리는 나머지 역외사족의 강자들을 대륙 사람들한테 맡기고 순찰대와 함께 마재(魔災)가 일어난 다른 대륙으로 향했다.

보름 동안, 낙리와 임정, 소소가 이끄는 순찰대는 한시도 쉬지 않고 전장을 돌며 마재(魔災)를 잠재웠다. 그들 덕분에 마재는 제법 사라졌지만 새로운 마재가 여전히 생겨나곤 했다.

* * *

풍유대륙(風幽大陸)은 어느새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산맥이 와르르 무너져 꼭 멸망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한편, 산꼭대기에 서 있는 낙리는 만신창이가 된 대륙을 살피더니 이내 정색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고 중상을 입은 대천세계의 강자들도 상당했다.

그들은 겨우 마재(魔災)를 잠재웠다.

“대장, 풍유대륙에 있는 역외사족을 전부 내쫓았어.”

임정과 소소가 신속하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그동안 대전을 거치면서 두 사람은 앳된 모습을 벗어던지고 한결 성숙해졌다. 특히, 임정의 변화가 상당히 뚜렷했다.

그녀는 보름 동안, 열 명도 넘는 마제를 죽였다.

“수고했어.”

낙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보름 동안, 역외사족을 상대하는 일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잠시 쉴래?”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낙리의 말에 소소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왜? 또 새로운 마재가 있어?”

이에 임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낙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물었다.

“그게 어딘데?”

“북창대륙이야. 그곳의 마제는 최고 등급이라 상당히 위험하다고 들었어.”

소소와 임정이 서로 마주 보며 한 말에 낙리는 멈칫하더니 이내 정색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북창대륙?”

“이런, 북창령원이야!”

북창대륙은 번화한 모습을 잃은 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창대륙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마재(魔災)는 역시나 북창대륙에도 강림했다.

북창대륙의 세력들은 집결 지점을 몇 군데 정하고 함께 역외사족을 상대하기는 했지만, 이곳에 온 역외사족의 실력이 막강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북창령원이 그중 하나의 집결 장소였다.

* * *

거대한 영진이 북창령원 전체를 감싸고 있었는데 웅장한 영광을 발하는 강대한 영진에 다들 안전감을 느꼈다.

그러나 북창령원 내부는 제법 떠들썩했다. 북창령원에는 북창대륙의 여러 세력이 모였을 뿐만 아니라 북창령원과 함께 5대원으로 불렸던 다른 4대 령원도 이곳에 모였다.

다른 4대 령원이 속한 대륙도 마제의 침략으로 다들 몰래 세운 전송 영진을 통해 북창령원으로 피난을 왔다.

그런데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창대륙에도 마재가 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여러 지역의 세력이 한곳에 모였고 북창령원은 시끌벅적했다.

한편, 북창령원의 고요한 호수 주위에는 수련대가 잔뜩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학생들이 머무는 숙소가 있었다.

“낙신회 회원들은 듣거라, 낙신회의 빈 숙소를 청소해 4대 령원 학생들한테 넘기거라. 우리는 비록 경쟁 상대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는 서로 도와야 한다.”

호수 옆에 놓인 커다란 암석 주위에 소년, 소녀들이 잔뜩 모여있었는데 다들 암석 위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청순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낙신회를 누가 만들었는지를 절대 잊지 마. 목진 선배와 낙리 선배는 졸업해 이곳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낙신회는 그들이 만든 것이니 절대 그들의 체면을 깎는 일을 해서는 안 돼.”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소년, 소녀들을 바라봤다.

“그럼요, 순아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낙신회가 그리 속 좁은 곳도 아니고 다른 령원 학생들을 잘 도와줄게요.”

“우리가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북창령원을 지켜낼 수 있으니까요!”

소녀의 말에 다들 손을 휘두르며 흥분한 얼굴로 외쳤다.

이에 순아는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한 무리가 상황을 살피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순아 이 녀석, 정말 잘하는구나. 목진과 낙리가 봤으면 깜짝 놀랐을 거야. 그들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가 지금은 낙신회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회장이 되었으니까 말이야.”

기품이 남다른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순아는 이제 영진 종사가 되었고 태창 원장님이 그녀를 위해 영진원까지 열었다고 들었어. 지금은 순아가 직접 학생들의 영진을 가르치고 있다지? 참 대단한 아이야. 우리는 녀석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해.”

옆에 서 있던 강인하게 생긴 사내도 이내 감탄했다.

“그런 말 좀 그만해. 너희가 지금 같은 시기에 북창령원에 돌아올 줄 몰랐어.”

그들 옆에 서 있던 수려한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놀랄 법도 했으니, 두 사내는 북창령원을 휩쓸었던 심창생과 이현통이었다.

그들도 졸업하자마자 대천세계로 향했고 지금은 지지존 대원만급 강자가 되었다. 천지존까지는 한 보 차이라 이 정도 성과도 대단했다.

“북창령원의 학생이었던 우리가 이곳에 마재가 일어났다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을까?”

심창생이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이현통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엽경령, 너야말로 계속 북창령원에 있더니 지금은 부원장이 됐구나.”

“난 너희처럼 큰 야망이 없어. 난 북창령원에 있는 게 좋아.”

엽경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심창생과 이현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북창령원에 남아있는 것도 좋긴 하지. 적어도 순수한 마음만은 보존할 수 있으니 말이야.”

두 사람은 지금까지 대천세계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듯 표정이 복잡미묘해졌다.

“어머, 북창령원에 와서 아주 감개무량한가 보구나.”

그때, 누군가의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고 심창생 등이 고개를 돌려보니 두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한 사람은 보라색 바지를 입고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낸 온청선이었고, 그 옆에 서 있는 아리따운 여인은 만황령원의 부원장인 당천아였다.

“온청선…….”

이현통은 흠칫 놀라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온가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온 거야?”

“온가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데 나 한 명 빠졌다고 뭐 크게 달라질까?”

온청선은 생긋 웃으며 말하더니 당천아와 함께 엽경령한테 고개를 돌렸다.

“낙신회에서 만황령원 학생들을 거둬줘서 고마워.”

“지금은 함께 뭉쳐야 그나마 승산이 있어. 너희를 돕는 건 우리 자신을 돕는 거나 마찬가지야.”

엽경령이 손을 저으며 한 말에 온청선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승산이 많아진다고 해도 현재 북창령원에서 천지존경에 이른 사람은 용곤 대인뿐인데 마제가 이곳을 포위한 채 꼼짝도 하지 않으니 어쩐단 말인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파악한 이들은 말문이 턱 막혔다.

“순아가 학생들과 몰래 전송 영진을 구축하고 있으니 상황을 봐서 학생들을 최대한 많이 이송하는 수밖에 없어.”

엽경령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창령원이 할 수 있는 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목진과 낙리가 있었으면 제법 도움이 됐을 텐데…….”

이현통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말에 다들 조용해졌다.

“낙리에 관한 소식은 있지만 목진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5년이나 지났어.”

온청선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고 심창생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은 4, 5년 전까지만 해도 소란을 피우더니 왜 갑자기 종적을 감췄을까?”

“대천세계에 그에 관한 소문이 파다해. 일부는 목진이 역외사족이 무서워 어딘가로 숨어들었다고 하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온청선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목진은 성격상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목진은 절대 나약한 사람이 아니야. 그는 누굴 상대하든 두려워하지 않았어. 사라진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목진은 절대 소문처럼 역외사족이 두려워 도망간 것이 아니야.”

당천아가 진지하게 말했고 이현통은 한숨을 쉬었다.

“목진이 워낙 유명해져 다들 그를 질투하고 있으니 이런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이현통의 말에 다들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목진은 분명 다시 나타날 거야.”

엽경령도 목진을 굳게 믿었다. 그녀는 여러 해 전,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고 령원을 거닐던 훤칠한 소년을 떠올렸다.

그때의 목진은 아무리 강대한 적을 만나도 전혀 물러나지 않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상대하곤 했다. 그런 선한 영향력으로 목진 주위에는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고 낙신회도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여 그녀는 목진이 어떤 고난에 부딪혀도 절대 변치 않을 거라 확신했다.

목진은 반드시 다시 나타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대천세계가 들썩일 것이다.

엽경령은 멀지 않은 곳에 순아가 서 있는 거대한 암석을 바라보자 낙신회를 만들 때, 그곳에 서 있던 의기양양한 소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위잉!

그때 북창령원에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고 다들 깜짝 고개를 돌렸는데 북창령원 밖에서 마의 기운이 휘몰아쳤다.

역외사족이 드디어 공격을 개시했다.

위잉!

경보가 처량하게 북창령원에 울려 퍼지자 떠들썩했던 령원은 발칵 뒤집혔다. 다들 두려운 듯 영진 밖을 바라봤는데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들끓는 마의 기운이 몰려왔다.

“역외사족이 곧 움직일 것 같아!”

호숫가에 서서 상황을 살피던 엽경령, 심창생, 온청선 등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언니!”

순아도 어느새 달려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지 않게 잘 달래야 해. 그리고 상황이 나빠지면 전송 영진을 통해 학생들을 이곳에서 내보낼 준비를 해야 해.”

엽경령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순아한테 말을 건넸다.

북창령원은 실력이 막강한 역외사족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쌍방의 실력 차이를 잘 아는 순아는 이를 꽉 깨물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우리가 오랜만에 또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었군.”

엽경령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심창생은 이현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날의 넌 늘 나를 이기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겨뤄보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친 이현통이 영력을 끌어올리자 주위에 영력이 요동치며 옷깃이 휘날렸다.

“내가 여기 있는데 너희가 나설 필요까지 있을까?”

온청선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는 고귀한 공작처럼 여전히 눈부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