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3화. 드디어 나타나다
그들은 잠시 담소를 나누다가 목진과 함께 태창 원장과 북명룡곤한테 다가갔다.
목진은 낯익은 두 사람을 보자 감개무량했다. 북창령원을 떠났을 때까지만 해도 지존경에 이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앳된 소년이었는데 지금은 대천세계의 최정예급 강자로 거듭났다.
“원장님과 용곤 선배님을 뵙습니다.”
목진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는 비록 상대방보다 실력이 훨씬 뛰어나지만 자신을 보살펴준 두 사람을 더없이 존경했다.
특히, 북명룡곤에게는 뇌신체를 전수받았으니 말이다. 뇌신체는 한때, 목진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던 단체 신술이었다.
태창 원장과 북명룡곤은 목진의 겸손한 태도에 흐뭇하게 웃었다. 목진은 엄청난 성과를 이뤘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지 않고 여전히 겸손했다.
심창생, 이현통, 온청선, 엽경령 등도 어느새 다가왔는데 서로 담소를 나누었고,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목진 오라버니!”
순아가 두 눈을 끔벅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목진은 문득 북창령원에 막 입학했을 때, 백의를 입고 머리를 높게 묶은 채 억울한 표정을 짓기만 하던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순아야!”
어느새 그날의 소녀는 예쁘장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전 이제 아이가 아니에요!”
목진이 그때처럼 순아의 머리를 흐트러트리자 순아는 괜히 목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잠시 후, 목진은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당천아를 발견했는데 장발을 묶은 그녀는 전과 달리 훨씬 차분해 보였다.
“네가 옥패를 부순 덕분에 내가 공간 흔적을 발견하고 제때 찾아올 수 있었어.”
목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당천하는 생긋 웃으며 함께 서 있는 목진과 낙리를 쓰윽 훑었는데 눈부시게 빛나는 두 사람한테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고마웠어. 네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 만황령원은 멸망했을지도 몰라.”
당천아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황령원은 북창대륙에 오기 전, 이미 학생들을 많이 잃었기에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이에 목진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목진 오라버니, 이제 북창령원을 떠날 건가요?”
순아의 질문에 다들 고개를 돌리자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북창령원을 쓰윽 살폈다.
“대천세계 내부의 마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북창대륙에 남아있을 거야.”
목진의 말에 북창령원에는 다시 경천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이에 목진은 가볍게 웃었는데 갑자기 차가운 손이 그의 손을 꼭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는 이것이 대전을 치르기 전, 마지막 평화로운 나날이란 걸 잘 알았다.
둘만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낙리는 목진의 몸에 느긋하게 기대고 있었는데 커다란 눈을 끔벅이는 것이 여간 아름답지 않았다.
목진은 품에 안긴 여인의 여리여리한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때 낙리가 서서히 눈을 뜨더니 조금 부끄러운 듯 목진을 바라봤다.
“나쁜 놈, 결혼식을 올리고 한다더니…….”
낙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하고는 괜히 목진을 꼬집었다.
이에 목진은 머쓱하게 웃으며 낙리를 더 꽉 껴안았고 낙리도 얼굴을 파묻은 채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남자가 좋아 여자가 좋아?”
목진은 멈칫하더니 상냥하게 웃으며 답했다.
“난 여자가 좋아. 여자아이를 낳으면 분명 너처럼 예쁠 거야.”
“그럼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
낙리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목진의 목을 껴안으며 말했다. 이에 목진은 잠시 고민하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한 글자씩 정해볼까?”
“내 이름이 ‘진’인 것으로 보아 부모님께서는 내가 먼지처럼 수수하길 원하셨던 것 같아. 그래야 무사히 평생을 보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목진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낙리의 반듯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한테 딸이 생기면 저 하늘의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아가길 원해. 그래서 난 이름에 ‘운’이 들어갔으면 좋겠어.”
목진의 말에 낙리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역외사족이 대천세계에서 영원히 물러나 이곳이 영원히 밝고 아름다웠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언젠가 여자아이를 낳으면 이름에 ‘희’자를 넣을 거야.”
‘희’란 빛을 의미했다.
“그럼 우리 딸을 낳으면 목운희(牧雲熙)라고 하자. 그리고 아들은 목토(牧土)나 목석(牧石)이라고 하면 돼. 아들 이름은 대충 지어도 돼.”
목진이 가볍게 웃으며 한 말에 낙리는 괜히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아들을 그렇게 무시하면 어떡해?”
“그런데 목운희란 이름은 마음에 들어.”
낙리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목진을 바라보았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목진은 낙리의 모습을 보고는 언젠가 생길 아이에 대한 기분 좋은 상상에 빠졌다.
그런데 천사신이 이를 망치려 하고 있으니…….
목진은 바로 살기를 품었다. 그럼 천사신을 없애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북황의 언덕 깊숙한 곳에 놓인 두 채의 연꽃대에 여러 해 동안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두 사람이 서서히 눈을 떴는데 뒤쪽에 무한의 영광이 폭발하며 북황의 언덕 전체에 휘몰아쳤다.
깊숙한 곳에서 아른거리는 두 채의 오래된 허상은 신비롭고도 오래된 기운을 내뿜었다.
그중 하나는 만 장의 빛을 발했는데 빛이 닿은 곳은 견고하기 그지없었고 다른 한 허상은 무궁무진한 영력을 내뿜는 것이 영원히 고갈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무한광명체와 태령성체(太靈聖體)였다.
목진은 열심히 수련한 끝에 드디어 두 원시 법신을 수련해냈다.
이와 동시에, 북창령원에 있던 목진도 이를 느끼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
그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고개를 휙 돌려 대천세계 밖, 마역 쪽을 쳐다봤다.
“목진아, 왜 그래?”
낙리도 바로 목진의 표정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천사신이…… 나타났어.”
목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짙은 살기가 깃들었다.
이와 동시에, 대천세계 변경의 한 도성에 있던 염제와 무조도 꼭 감았던 눈을 떴다.
그들은 화염과 웅장한 영력이 깃든 눈으로 서로를 보더니 이내 살기를 내뿜었다.
그들이 내뿜은 살기가 어느새 도성 전체를 휘감자 다들 흠칫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 염제와 무조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슉!
소훈아, 채린, 응환환, 능청죽 등 무한의 화역과 무경의 안주인들도 염제와 무조 뒤쪽에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여인들의 질문에 염제와 무조는 이내 정색하며 답했다.
“천사신이 나타났으니 공격을 멈추고 최고 수준의 경계 태세를 취하라고 전하거라.”
그들의 말에 다들 흠칫 놀라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 사람들은 역외사족이 너무 미워 저도 모르게 화가 났고 또 다른 이들은 두려워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천사신은 5년 동안 철저히 종적을 감췄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천세계 사람들한테 무한한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나타나자 일부 강자들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이제 천사신이 언제 올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차피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한편, 염제와 무조는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봤는데 그들의 시선은 공간을 뚫고 암흑의 끝자락에 닿을 것만 같았다.
어둠이 요동치는 곳에 있던 무한의 마의 기운은 어느덧 흑운이 되었고 그 위에 하얀색 도포를 입은 사내가 뒷짐을 쥔 채 서 있었다. 그는 괴이할 정도의 자비로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의 미간에 있는 세 개의 눈은 모두 떠 있었고 사악한 빛이 아른거렸다.
그가 고개를 가볍게 들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염제, 무조 쪽을 바라봤는데 세 사람이 눈을 마주치자 주위의 공간이 미친 듯이 요동쳤고 무형의 압박감이 주위 천만리를 휩쓸었다.
“오랜만이구나.”
말을 마친 천사신은 길쭉한 손가락으로 두 사람을 가리키며 가볍게 내리찍었다.
“내가 찾아가는 날이 곧 대천세계의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염제와 무조의 시선에서 금세 사라졌다.
“천사신은 내일 대천세계에 찾아오겠군.”
염제와 무조는 영광이 가신 눈으로 허무한 공간을 바라보더니 눈빛이 점차 예리해졌다.
“그날이 드디어 왔군.”
네 명의 안주인들도 안색이 확 어두워진 채 중얼거렸다.
“목진은 어떻게 됐대?”
소훈아의 나지막한 질문에 염제는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역시나 우리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어.”
염제와 무조도 일전에 원만의 파동이 형성된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목진이 내뿜은 것이 틀림없었다.
네 명의 안주인들은 안색이 밝아졌다. 목진이 목표를 달성했다면 대천세계가 역외사족을 상대할 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9목 사신의 전성기 때의 실력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확인해 봅시다.”
염제와 무조는 고개를 들고 허공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듯 말했다.
북창령원에 있는 목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낙리한테 손을 건넸다.
“우리도 이제 가봐야 해. 내일이 바로 대천세계의 운명이 갈리는 날이 될 거야.”
이에 낙리도 이내 정색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잇따라 목진이 옷깃을 휘날리자 영무가 서서히 흩어졌다. 그는 낙리와 함께 하늘 높이 떠올랐다.
북창령원 학생들도 무언가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부디 승리하세요!”
북창령원 광장에 서 있던 심창생, 이현통, 온청선, 당천아 등도 고개를 들고 허공에 떠 있는 목진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목진아, 부디 잘하고 와! 우리는 술상을 차리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들은 목진이 대천세계를 위해 싸우러 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목진은 그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는 낙리한테 말을 건넸다.
“너를 위해서, 언젠가 우리와 함께할 내 딸 목운희를 위하여…….”
“난 절대 패배하지 않을 거야.”
* * *
대천세계와 마역의 접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하늘은 한껏 어두워졌으며 공간마저 불안정해 균열이 일었다.
반년 동안, 대전 쌍방은 이곳을 전장으로 삼고 수많은 강자를 파견해 대결을 펼쳤다. 이에 사망자들도 제법 많아져 그곳은 상당히 처참해 보였다.
이 대륙은 대천세계와 역외사족의 가장 중요한 전장이라 다들 영마대륙(靈魔大陸)이라 불렀다.
한편, 대륙 곳곳에는 악마의 입처럼 깊숙한 균열이 잔뜩 생겼고 그 속에서 솟구쳐나온 홍류가 암석을 때리며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를 냈다.
영마대륙의 한쪽은 마역이었고 다른 한쪽은 대천세계였다.
반년 사이, 이곳은 전쟁이 멈출 날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피로 물들여진 대륙은 괴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다들 이것이 폭풍전야란 걸 잘 알았다.
이 고비만 넘으면 대천세계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수많은 생명체가 죽을 것이다.
하여 다들 밀법으로 영력 광막을 형성해 영마대륙을 비췄고 대천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고개를 들고 거대한 영력 광막 속 영마대륙을 바라봤다.
그들은 눈가를 파르르 떨며 거대한 영력 광막을 보더니 부단히 기도했다.
대천세계가 부디 대결에서 이기도록 말이다.
영마대륙의 동쪽에 영광이 요동치더니 수많은 빛줄기가 솟구쳤다.
대천세계의 정예급 강자 대부분이 영마대륙에 모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영마대륙의 서쪽에도 마의 기운이 요동쳤고 두꺼운 마운이 하늘을 가렸다. 지옥에서 기어 나온 수라들은 대천세계를 모조리 파괴할 것만 같은 사악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