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군-962화 (61/1,000)

962화. 저를 위해 여기에 왔다고 느껴요

상숙청은 흐느끼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상청종이 그저 제게 둘러댄 것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를 잘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저는 그를 데리고 산에서 내려왔어요. 비록 이유가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마치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무엇인가가 저를 이끈 것 같았어요. 설사 그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왠지 그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산에서 내려와 그가 어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해도, 항상 그에게 눈길을 빼앗겼어요. 항상 그를 돌아보았어요. 마치 제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무리 사람이 많은 곳이라 해도, 제가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그가 있는 곳을 바로 찾을 수 있었어요.”

“남녀수수불친(*男女授受不親: 남녀 사이에 직접 물건을 주고받지 않고, 타인을 통해 전달해야 한다는 뜻으로서, 남녀 사이가 유별남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말처럼, 저도 제가 가족이 아닌 남자와 둘만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가족이 아닌 남자의 머리를 빗겨 줄 거라고 상상도 못 해봤어요. 그런 일을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하지만 도야 앞에서는, 설사 익숙한 사람이 아니어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실제로, 도야의 머리를 빗겨 주는 일은 아주 편안했고, 불편하지 않았어요.”

“매번 머리를 빗겨 줄 때, 기이한 느낌을 받곤 했어요. 저를 등지고 앉아있는 그의 등을 볼 때면, 저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지 나를 등지고 있을 뿐, 나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빗을 들고 찾아가면, 항상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곤 했지요. 마치 아침이면 제가 반드시 그 옆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미소였어요.”

“머리를 빗겨 줄 때, 그는 가끔씩 눈을 떴어요. 사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자신의 머리를 보며 가끔 저도 쳐다보곤 했어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고 또 미소를 짓곤 했지요. 처음에는 부끄러워 눈을 피했지만, 언젠가부터 우린 그렇게 서로를 계속해서 바라보게 되었어요. 그가 가끔 눈을 뜨고 거울 안에 있는 저를 볼 때면, 저도 거울 안에 있는 그를 보았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저와 그 사람 사이에는 항상 거울이 있었어요.

그가 거울을 통해 절 볼 때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길 바랐어요. 언젠가부터 내가 바로 뒤에 있다고, 거울 속의 내가 아니라, 직접 뒤돌아 현실 속의 나를 봐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거울 안의 내 모습을 보고 나면, 차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도야의 눈에, 제 얼굴이 어떻게 비칠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오빠만 제 마음을 알았을까요? 아니요. 몽산명 장군님도 이미 알고 계셨지요. 몽산명 장군님도 제게 몰래 도야를 포기할 것을, 은근히 암시하곤 했었어요. 그런데, 전 이상하게 도야를 포기하지 못했어요. 그가 계속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왠지 그가 저를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그가 저를 위해 여기 왔다는 강렬한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 어떤 말에도 제가 가진 그 느낌은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설사 그가 다른 여자와 한 쌍이 되는 것을 보아도, 여전히 그 느낌은 제게 남아있어요.”

“오라버니, 이런 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에요. 도대체 왜 이런지 저도 알 수 없어요. 어쩌면 제 착각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착각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아요. 어쩌면 전 부모님이 그를 제게 보내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가끔 들어요.”

남약정은 멍청한 얼굴로 상숙청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어째 꿈같은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심지어 상숙청의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니 상조종은 오죽할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상조종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상숙청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미친 것일까? 어째 정에 너무 깊이 빠져 미친 것 같았다.

조금 정신을 차린 상조종이 노파심에 타일렀다.

“청아야, 정신 차려라. 그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희망은 품지 말아라. 나도 네가 그와 이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일이야. 더는 쓸데없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라. 도야는 그래도 된다, 설사 팔십까지 기다려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청아야. 이미 너는 늙은 아가씨구나.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평생을 망칠 수도 있단 말이다. 어째서 말을 안 듣는 것이냐? 좋다. 하나만 물어보마. 거울을 들어 네 얼굴을 보고, 네 얼굴을 만져 보아라. 그러고서도 감히 그를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남약정마저 상조종의 말에 흠칫했다. 너무나 무정하고, 너무나 매정한 말이었다. 상조종은 지금껏 상숙청의 외모를 갖고 이러쿵저러쿵 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누가 상숙청의 외모를 갖고 뭐라 한다면, 반드시 그를 크게 혼내주거나,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면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며 소리 높여 항의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런 상조종이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정말 마음을 독하게 먹은 모양이었다. 가능하다면 고함을 질러서라도 상숙청을 일깨우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상숙청은 상조종의 말에 크게 상처 입고 크게 소리쳤다.

“그만 하세요.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이대로 평생 지낼 거예요. 만약 제가 여기 있는 게 싫다면 언제든지 저를 쫓아내세요. 오라버니가 왕야니까,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겠지요!”

“청이 너…. 오늘 부모님을 대신해서 그 버릇을 고쳐줘야겠구나!”

상조종의 얼굴이 험하게 변했다. 그 순간, 남약정이 급히 상조종의 허리를 붙잡고 만류했다. 한편으로는 상숙청에게 소리쳤다.

“군주님, 일단 돌아가시지요!”

상숙청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뒤돌아섰다. 하지만 문턱을 넘어설 때 또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군정대사(軍政大事)에 대해서는 제가 참여할 게 아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요. 그러니 지금 하는 그 결정이 옳은 것인지 저는 몰라요. 수많은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에 제가 간섭할 수도 없겠지요. 하지만 당부하건대, 너무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른 사람의 능력은 몰라도, 도야의 능력이 어떤지는 알고 있어요…. 도야는 분명 살아 돌아올 거에요. 그러니 자중하세요. 너무 극단적으로 일을 처리했다가, 수습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는 눈물을 닦으며 떠나갔다.

지금까지, 도야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이렇게 진지하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이처럼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참으로 매정하고,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뿐이었다.

한편, 상조종은 정말 화가 났다. 마치 소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그처럼 똑똑하던 아이가, 어찌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인가. 어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남약정은 상조종을 붙잡고 좋은 말로 다독였다.

“왕야, 너무 화내지 마십시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젊은 아가씨가 아닙니까. 감정적일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랑에 처음 눈을 떴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감정이 앞서 있는 상태니, 지금은 뭐라 해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이 약이니,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조종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사랑에 눈을 떠? 저 모습이 사랑에 눈을 뜬 사람으로 보이시오? 이미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소! 나는 저 아이가 도야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급기야 현실 세계에서 도피하게 된 건 아닌지, 오히려 그게 걱정이 되오! 아래 있는 병사 중에서도 살육의 공포 때문에 이런 증상이 나타난 적이 있소.

현실을 보지 못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병이 있다고 소리치며,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지. 적병에 대한 환상을 보고, 적병이 어디에나 있다고 착각을 하곤 했어. 그 병사와 지금 상숙청의 증상이 아주 비슷하지. 내가 본 적이 있소.”

“어….”

남약정이 흠칫했다. 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곧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법사님을 불러 군주님을 진찰하게 하겠습니다.”

상조종이 끄덕였다. 그리고 또 급히 당부했다.

“자극하지 마시오. 진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는 안 될 것이오.”

남약정이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군주님의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 * *

처마 아래, 계단 위,

나조가 술병을 껴안고 취해 앉아있었다. 나조는 며칠 동안 씻지도 않은 것인지, 아주 더러운 모습이었고, 수염 또한 덥수룩하게 자라있었다.

풍관아는 난처한 얼굴로, 그런 나조의 팔을 붙잡고 몇 번이나 일으키고자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몇몇 환관들이 근처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대내총관 막고 또한 계단 앞에 서서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나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위풍당당하던 송국 대도독이 이런 지경이 되다니.

이번에 막고는 벌써 세 번째 나조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황제 목탁진의 어명을 받고 온 것이었다.

아무리 상황 때문에 나조의 직위를 해제했다고는 하지만, 현재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쟁이 매우 치열하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일로 나조가 정신이 망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승패는 병가에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 전장에서 어찌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전에도 나조는 몇 번 패배를 겪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전의를 가다듬었고, 다시 승리를 끌어냈다. 그렇게 하여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러니 비록 이번의 패배가 치명적이라 하더라도, 이 한 번의 패배로 나조가 이렇게 무너질 리 없었다.

전쟁은 지금 중지됐지만, 언젠가 해동될 날이 다가올 터였다. 그러니 그때가 되면, 나조에게도 다시 기회가 오는 셈이었다.

사실 조정의 다른 사람들도, 나조가 아닌 다른 장수가 성공적으로 금작을 막아설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조가 사령관으로 있을 때, 최소한 금작을 이기진 못해도, 금작의 병력을 막아설 수 있었다. 그나마 위태위태한 전장의 상황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드시 새로운 사령관을 부임시켜야 한다면, 나조가 아닌 다른 누가 된다 한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사령관을 바꾼 이후, 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게 된다면, 그건 사령관을 잘못 바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황제 목탁진은 다시 나조를 기용해야만 했다. 그러니 나조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아직 기회가 남아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전쟁이 다시 시작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부분에 대해 나조는 준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알리기 위해 막고가 나조를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거나하게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두 번째 왔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다. 이제 세 번째 찾아왔는데, 나조는 여전히 이런 모습이었다.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황제를 대신해 나조를 다독이고 싶었지만, 나조에게 입을 열 기회조차 없었다. 지금 나조의 상태는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대총관님, 최근 이이의 심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나조를 깨울 수 없자, 풍관아가 계단을 내려와 난처한 얼굴로 설명했다. 막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찌 이런단 말입니까? 깨어나면 부인께서 잘 다독여 주십시오. 아직 젊으니, 한 번의 실패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여러 전장에서 패배도 몇 번 경험해본 장군이지 않습니까. 부인께서는 폐하께서 여전히 대도독을 생각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 달라고, 장군께 전해 주십시오.”

풍관아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꼭 전하겠습니다.”

“하아!”

막고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나조가 계속 이런 상황이라면, 어찌 전장에 나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