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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994화 (93/1,000)

994화. 고마워해야 마땅하지!

나무 위,

표묘각의 사람들은 다들 차가운 눈으로 방관하고 있었다.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물론, 표묘각의 수행자들이 아무리 실력이 강하다 해도,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이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이기지는 못할 터였다. 현재 천도비경에 들어온 표묘각의 수행자들은 당연히 그 인원이 칠국의 수행자들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표묘각의 사람들은 마치 벌레처럼 미천한 것을 지켜보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구숙(九叔)!”

한 기운종의 제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는 비통함이 가득했다.

안다! 태숙산악도 그 말투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더는 버티기 어렵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기분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싸운다면 전멸이라는 결과밖에 남지 않는다!

“가자!”

태숙산악이 비통하게 소리쳤다. 드디어 철수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태숙산악이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거대한 무형의 망치가 나타났다. 곧 망치가 천둥소리를 내며 휘둘러졌고, 그를 포위 공격하던 사람들은 빠르게 물러났다.

쾅!

망치가 수많은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자, 태숙산악이 신속하게 몸을 빼냈다.

얼마 남지 않은 진국 수행자들 또한 황급히 후퇴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저항이 강하지 않은 곳을 뚫으려 했고, 한곳으로 몰려들게 되었다. 이는 자금동이 있는 방향이었다. 다들 싸우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금동 쪽의 저항이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진국은 백여 명만이 남은 상태로 자금동 쪽의 방어를 뚫어냈다. 물론, 이들은 자금동이 고의로 뚫려준 것임을 모르고 있었다. 다른 나라들도 이를 알 수 없었다. 각자 피비린내를 풍기며 치열히 싸우고 있었으니, 게다가 자금동 사람들도 어느 정도 손해를 봤으니, 이게 연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마치 자금동의 필사적인 방어가 더욱 필사적인 진국의 수행자들에 의해 뚫린 것처럼 보였다. 다들 안타까움에 눈을 번득였다. 조금이면 저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고, 그러면 막대한 영종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 한 사람이 즉시 소리쳤다.

“쫓아라!”

다만 눈앞에서 진국을 놓쳤음에도 엄입은 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그가 손짓하자, 아래 있는 자금동의 제자 중에 상황을 알고 있는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며 크게 소리쳤다.

“쫓지 마라!”

“쫓지 마라!”

그 소리가 끊임없이 퍼져나가니, 이미 뒤를 쫓고 있던 사람조차도 자신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자금동의 사람들이 소리친 것을 확인한, 소요궁과 영검산이 먼저 멈춰 섰다. 이들은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다.

곧이어, 제국과 위국 사람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멈춰 섰다. 이들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싸움을 시작했고, 어리둥절한 상태로 진국 수행자들을 맞상대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 전투를 멈추라니? 이들은 자금동이 왜 저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처음에도 자금동이 상황을 정확히 알고 이들을 이곳으로 이끌어 왔듯이, 지금도 무슨 연유가 있어 자금동이 행동을 멈췄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즉, 지금 상황에 대해서 자금동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저리 외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한 순간, 더는 쫓을 수도 없게 되었다. 진국 잔당은 이미 기회를 잡고 빠르게 도망쳐 버렸다.

사실, 뒤에서 은은히 들리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본 태숙산악도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으니, 저들이 쫓아왔다면 자신들을 전멸시키고, 물건을 빼앗아 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런데 이렇게 놓아 주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뛰어와서, 어리둥절하게 싸움을 하고는, 또 어리둥절하게 저들이 도망가게 그냥 놓아줬다.

그렇게 이상하고도 기이하게 싸움이 끝나버렸다. 결국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볼 여유가 생겼다. 소요궁의 장로 산해가 가장 먼저 다가와 물었다.

“엄 형, 대체 어떻게 된 거요? 다짜고짜 싸우자고 하더니, 왜 또 다짜고짜 싸움을 멈추라 한 것이요?”

엄입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뭐가 무슨 소리란 말이오?”

책임자들이 다들 다가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국 잔당이 빠져나간 곳을 가리키며 산해가 물었다.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조금만 더 압박하면 저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소. 그런데 뒤를 쫓지 말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엄입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뒤를 따르고 싶으면 가시오. 내가 언제 그대들을 막았다고 이러시오! 마침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오. 자금동 제자들에게 뒤를 쫓지 말라고 했지. 당신들에게 한 말도 아닌데, 왜들 멈추셨소?”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엄입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차며 말했다.

“나 엄입에게 여러분들을 호령할 위엄이 있는 줄 몰랐구려.”

“모르는 척하지 마시오!”

위국 수정각의 장로 요선정이 소리쳤다.

“우리가 다 장님인 줄 아시오? 방금 자금동의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저들을 놓아줄 생각이었던 것처럼 그들을 추격하지 않고 풀어주었소. 그러니 저들을 보내주려는 게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오? 당신은 분명 저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놔두었소!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오?”

엄입이 냉소 지으며 손짓하자, 한 봇짐을 짊어진 제자가 다가와 뒤돌았다.

엄입이 든 검이 번쩍하자, 봇짐이 갈라졌고, 그 안에서 후두두 떨어진 것은 흙이었다.

다들 그 안에 영종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저 흙덩이라니! 사람들은 더욱 어리둥절하며 엄입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납검한 엄입이 허허 웃었다.

“사실 내가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은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점령하기 위함이었소. 이제 우리가 여기를 점령했으니, 출구가 열리면 바로 나갈 수 있소. 나도 더는 여러분들을 속이지 않겠소. 이번에 우리 자금동은 아주 운이 나빴지. 이렇게 난리를 피웠는데도, 영종을 얼마 수확하지 못했소. 이제 일등은 기대도 하지 않소.

그러니 진국의 영종을 얻어도 우리로서는 별 이익이 없다고 할 수 있소. 어차피 그걸 얻어봤자 간신히 꼴찌만 면할 뿐이지, 죽어도 표묘각의 상금을 탈 수는 없게 됐으니 말이오. 그러니 지금 쓸데없는 일에 우리 자금동의 제자를 밀어 넣을 필요 있겠소? 적을 저지하라고? 저지하고 죽으란 말이오? 내가 미쳤다고 그러겠소!”

사람들은 드디어 엄입의 의도를 조금 깨달았다. 천화교의 장로 전복성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꼴찌는 면할 수 있지 않소! 게다가 진국이 가진 영종이 적지 않을 테니, 일등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상금은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오!”

엄입이 ‘흐흐’ 웃었다.

“많이 얻기는 개뿔. 당신들이 나 혼자 독식하도록 내버려 두겠소? 다들 공평하게 나눠 가지면 결과가 달라질 것은 뭐요!”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더욱 깊이 깨달았다. 이 자라 새끼는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득을 취하는 것마저 망쳐버렸다! 그저 자신들이 안전하게 출구 밖으로 나가기 위해, 다른 나라를 이용한 것이었다.

소요궁의 산해가 갑자기 손을 썼다. 자금동의 다른 제자가 메고 있던 봇짐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도 흙더미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엄입이 그런 산해를 흘겨보며 경고했다.

“나와 반목하지 않으려면, 우리 제자들을 건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산해와 저풍평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들은 같은 편이었다. 같이 손을 잡아 성적을 내야 했다. 자금동의 수확이 적다면, 그건 온 연국의 등수가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들은 결국, 엄입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연합한다고 해도 성적에 따라서 서로 가져가는 것이 달랐다. 공헌이 많으면 당연히 많이 가져갔다. 하지만 진국의 영종을 균등하게 나눈다면, 자금동의 공헌도를 높일 수 없었다. 당연히 목숨 걸고 다른 사람 좋은 일 해줄 필요가 없었다.

한국과 송국 사람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들 엄입을 죽어라 저주했다. 진국에게 크게 당한 이들은 큰 손실을 보았고, 눈앞에서 그 원한을 갚을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다. 엄입이 진국을 도망가게 놔두었다!

현병종의 장로 유흥고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입, 여기서 싸움이 있다는 것은 어찌 알았소?”

엄입이 하하 웃었다.

“여기 마침 내가 심어놓은 사람이 있었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 마시오. 말하지 않을 것이니.”

대악산의 장로, 조병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영종을 빼앗을 생각도 없으면서, 왜 우리를 데리고 와서 개뿔 이유 없는 싸움을 시킨 것이오? 이렇게 의미 없이 제자를 희생하는 것이 무슨 의미요? 이게 당신이 말한 좋은 일이오?”

엄입이 즉시 마주 소리쳤다.

“조병, 머리에 문제가 있소?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소?”

“뭐가 어디란 말이오? 여긴 오래된 숲이 아니오?”

“그렇소!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지, 아까 내가 말했지 않소? 출구에서 가장 가까우니,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오.”

조병은 말문이 막혔다. 말문이 막힌 사람들을 향해, 엄입은 삿대질하며 말했다.

“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다들 모르는 것이오? 이제 이 출구는 우리 사람들이 막고 있으니, 일단 출구가 열리면, 우리는 언제든지 나갈 수 있소. 저 안에 숨어서 다른 사람 안색이나 살필 필요 없다는 말이오. 이래도 내가 당신들을 이용했다 생각할 수 있소? 우리가 출구 근처에 자리 잡게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이익을 당신들에게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소.”

“출구 근처를 장악할 기회가 생겼는데, 빨리 쟁취하지 않고 놓치란 말이오? 이게 좋은 일이 아니면 뭐가 좋은 일이오? 그런데도 나를 탓하다니! 당신들은 내게 고마워해야 마땅하오!”

사람들은 엄입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뛰어왔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다들 그 전처럼 확신 없이 버티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엄입은 뒤돌아 한국과 송국을 바라보았다.

“씨여 형, 정 형은 내게 더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 그들을 향해 유쾌한 얼굴로 한쪽 눈을 깜빡였다.

한국, 송국 사람들은 처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때에 도움을 준 것을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엄입의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고는 즉시 뭔가를 깨닫고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엄입은 진, 한, 송국 이들 세 나라가 힘을 크게 소비한 이후에 손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런 후에 이들을 모두 전멸시키고, 이들 손에 있는 영종을 모두 빼앗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한, 송국은 엄입에게 고마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전에 엄입이 진국을 놓아줬다는 불만은 그 즉시 사라졌다. 만약 엄입이 나쁜 마음을 먹고 있었다면, 이들 두 나라의 세력은 지금 여기 서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연, 위, 제국의 사람들도 얼굴이 어두워졌다. 엄입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저 개자식은 자신이 얻을 수 없는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지 않겠다는 심보가 분명했다.

그렇게, 출구 일대의 몇몇 세력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안에 있던 사람만 바뀌었을 뿐, 진형은 그대로였다.

다만 출구 일대에 자리 잡은 자들은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해의 요마귀괴와 도망간 진국 잔당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전히 그들 두 세력이 가진 영종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으니, 여전히 그들을 쳐서 적지 않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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