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7화. 새로운 황제가 자네의 학생이네
“살아남아?”
해무극은 다소 자조적으로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가시지요. 경성 안이 곧 소란스러워질 테니, 더는 지체하면 안 됩니다. 경성을 떠나 일단 몸을 숨기시지요. 일단 눈앞에 들이닥친 소나기를 피해야 합니다.”
해무극은 뒤돌아 상유란을 바라보았다.
“아들이 무능하여, 어머님을 모시고 유랑하게 되었습니다.”
상유란이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목숨을 잃어버린 것보다는 낫구나.”
“태후마마께서는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노신이 사람을 시켜 태후마마를 공주님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분이 아무리 불만이 많다 한들, 자신의 친모를 박대하진 않으실 겁니다. 당연히 천하를 유랑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상유란이 침묵했다. 해무극이 지궁 안을 뒤돌아보고는 제갈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안에 있는 물건은 나중에 이곳에 오는 사람에게 가지라고 하면 되겠구나. 저걸 가져가는 것은 오히려 짐이 되고, 미련을 갖게 할 것 같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이미 더는 경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서 노신이 저들을 죽인 것입니다. 물건은 저들이 가져갔으니, 폐하께서는 안에서 필요한 물건을 챙기시면 됩니다.”
해무극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갈지의 의도를 깨달은 것이다…….
* * *
해무극과 상유란은 제갈지의 인도 아래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있게 되었다. 그 후, 제갈지는 삼대 문파의 다른 태상 장로들을 지궁 안으로 다시금 ‘모셔’ 들어갔다. 태상 장로들이 지궁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쿵’하고 문이 닫혔고, 안에 들어간 사람을 나중에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이 지나, 삼대 문파의 다른 제자들이 지궁으로 직접 찾아왔다. 각 문파의 고위층들이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며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텅텅 빈 지궁의 보고였다.
그들은 해무극을 찾아가 물었지만, 해무극은 모른다고 잡아떼며, 매우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해무극은 삼대 문파의 장문인들이 보고를 열라고 자신들을 협박한 후, 물건을 확인하더니 자신들을 그곳에서 쫓아냈다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도 삼대 문파의 고위층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삼대 문파의 제자들은 정신이 멍해졌다. 그들은 싸우는 소리 같은 것을 듣지 못했다. 당연히 해무극이 그들 고수를 죽였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결국, 삼대 문파의 장문인들과 고위층들이 자신들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을 버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국 경성이 혼란에 휩싸였다. 조국의 정예병력과 삼대 문파의 고위 수행자들이 대부분 전멸당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경성을 지키던 병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고, 어떠한 저항의 의지도 찾을 수 없었다.
조국의 수행 문파들도 이미 대부분 살길을 찾아, 도망갈 곳은 도망가고, 효월각에 붙을 곳은 붙은 상태였다. 삼대 문파의 제자들도 그들의 고위층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적군이 도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도망쳐 버렸다. 수행자의 도움이 없이 경성을 어찌 지키겠는가?
효월각이 이끄는 반란군이 도착하자, 아주 쉽게 성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조국의 백관들은 황궁 밖에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옥창이 이끄는 대군은 그대로 황궁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국 황제 해무극은 이미 사라진 후였고, 후궁의 수많은 미인은 이미 모두 목이 매달려 죽어 있었다.
수많은 후궁의 침궁에는 목매달려 죽은 사람이 가득했다. 생전에는 꽃처럼 아름다웠을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다들 거무죽죽한 얼굴로 혀를 내밀고 목이 걸려 있었다.
생전에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이 역력했다. 아마도 누군가 그들에게 죽으라고 하니, 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생전의 부귀영화가 지금, 이 순간 대들보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똥오줌이 흘러내려 악취 또한 가득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옥창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이 목매달려 죽은 광경을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몸을 돌려 그곳을 벗어나며 그는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 외에도, 조국 경성에는 차마 목을 매달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효월각이 쳐들어와도, 혹여나 살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효월각은 그럴 수 없었다. ‘깨끗한 청소’가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니 아주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금주부성, 자사부가 매우 바빠졌다.
주인이 돌아왔다. 당연히 깨끗이 청소하고 건물을 수리해야 했다.
자사부 밖에 한 대의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에서 소박한 옷차림을 한 부인이 내렸다. 그 옆에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있는 하인이 따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여월이 치마를 움켜쥐고 빠르게 뛰쳐나왔다. 그리고 마차와 그 곁에 있는 노부인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 노부인을 살펴보았는데, 그녀의 복장에 매우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해여월은 빠르게 내려가 노부인을 보고 다소 억지스러운 웃음을 보였다.
“어머니!”
그렇다. 평민이나 입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는 노부인은 바로 조국 태후 상유란이었다.
상유란이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다가 어느 순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갑자기 비통해하며 말했다.
“월아야, 조국이 망했구나!”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해여월은 이미 경성이 점령당한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전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멈칫하더니 순식간에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그녀의 모친을 껴안았다. 두 여인이 같이 울었다.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꺼이꺼이 울었다.
* * *
멀지 않은 곳, 길이 꺾이는 곳에 있는 객잔의 창문,
눈썹을 정리하고, 수염을 깨끗이 깎고, 얼굴을 살짝 어둡게 화장한 남자가 멀리서 두 모녀의 상봉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모든 시시비비가 마치 한순간의 꿈과 같았다.
그 남자는 바로 망국의 황제 해무극이었다. 앞으로 그는 해무극이라 불릴 수도 없었다.
그 옆에는 두 눈에 정광이 가득한 늙은이가 있었다. 검소한 옷차림에 곧은 허리를 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조국 대내총관 제갈지라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얼굴에 가득했던 주름은 보이지 않았고, 허리도 더 이상 굽지 않았다. 늙고 노쇠한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목소리조차도 바뀌었다. 곁에 있던 그가 말했다.
“주인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제 떠나시지요.”
해무극은 두 눈을 떴다.
먼 곳, 입구에 있던 모녀가 같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장포를 펄럭이며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멀어져 갔다.
“옥 팔찌와 금잔이 가득하면 무엇하나, 속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객일 뿐인 것을…….”
* * *
무력(武歷) 오백삼십삼 년 초. 조국이 멸망했다!
조국의 영토는 둘로 나뉘었고, 연국이 일부분을 가져가게 되었고, 대부분은 조국 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반란군은 경성을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고 국호를 진(秦)이라 했다!
표묘각에서 보낸 사람은 진국신기 상경을 확인하고, 진을 나라로 인정했다.
새로운 황제는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꺼내 선조들에게 고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효월각이 삼백 년 전에 멸망한 전진(前秦)의 여당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천하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그 후 사람들은 새로운 진나라를 후진(後秦)이라 불렀다!
* * *
자금동의 장문인 궁임책이 돌아왔다. 드디어 적적한 산속에서 우유도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미소를 주고받았다. 우유도는 손을 뻗어 정자로 가기를 청했다.
정자에 앉은 후, 궁임책이 정원 입구에 있는 편액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초려별원’(草廬別院)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궁임책은 재밌다는 생각에 웃으며 말했다.
“아주 화끈하군, 동의를 얻지도 않았는데, 초려산장을 여기로 옮겨오다니 말이야.”
우유도가 손짓하자, 차를 따르던 관방의가 옆으로 비켜섰고, 우유도가 일어나 직접 차를 따라 손님을 접대하며 미소지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궁임책은 더는 우유도와 농담하지 않고 물었다.
“그래, 부상은 어떠한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우유도는 궁임책 앞에 찻잔을 놓아 주었다. 궁임책은 손가락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들었겠지만 효월각이 전진의 여당이라고 하는군.”
우유도가 끄덕였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는 소식이었습니다. 정말로 상상도 못 했습니다.”
궁임책이 감개무량하다는 듯이 말했다.
“삼백 년을 기다렸다고 하는군. 바로 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말이야. 정말이지, 누가 그럴 거라 생각이나 했을까.”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찻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새롭게 후진의 황제가 된 사람이 자네의 학생이라고 하던데. 감상이 어떠한가?”
우유도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과거, 옥창이 그를 효월각의 각주라고 소개했을 때,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황제의 재목이 아닙니다. 아마 앞으로 후진의 조정을 좌지우지할 사람은 옥창일 것입니다!”
궁임책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이제 와 후진의 조정을 누가 좌지우지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네. 아무튼, 효월각은 얼마 전까지 조국 백성이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하려 하겠지. 조국의 영토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곤 하나, 아직 백성들의 마음까진 얻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그러니 그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지. 당분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 할 것이니,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야. 이번에 겪은 연국의 고난이 어떻게든 지나갔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고 말이지.”
마지막 그 말을 할 때, 궁임책은 감개무량했다.
과거, 나라가 망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조국의 거대한 영토를 집어삼켰다. 그러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당분간은 주위 모든 상황이 연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진은 내정에 바쁠 것이고, 한국과 송국은 서로 싸우느라 연국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지금 연국의 상황은 매우 좋았다.
우유도가 천천히 차를 음미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에 연국의 전화위복에 남주가 공이 가장 큽니다.”
“…….”
우유도의 말에 궁임책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우유도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남주의 동정서벌이 없었다면, 또 남주가 연국 군대의 군심을 하나로 모으지 못했다면, 또 남주의 전략 전술이 없었다면, 망하는 것은 조국이 아니라 연국이었을 것이다. 결국, 궁임책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확실히 그렇지, 하지만 소요궁과 영검산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네, 오히려 자네들을 찾아가 복수하려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