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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173화 (271/1,000)

1173화. 백지 (2)

“서로 쳐다보지 말고, 다른 사람 것을 훔쳐보지도 말고, 자기 것만 쓰도록 하시오!”

정위 휘하의 한 사람이 크게 호통쳤다.

좌우를 둘러보며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던 장로들이 고분고분해졌다. 하지만 다들 넋이 나간 얼굴로 먹물 냄새를 맡으며 눈앞에 있는 흰 종이를 바라보며 매우 곤란해하고 있었다.

뒤에 앉아 있는 각 문파의 제자들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이 비록 각 문파의 장로는 아니지만, 지금 장로들이 어떠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 것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백지를 내면 죽이겠다니, 이런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우유도가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원래 우유도는 백지를 제출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정위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한참을 고민하며 모래시계를 바라보던 우유도는 손을 뻗어 연적을 들어 벼루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먹을 들어 벼루에 갈기 시작했다.

건물 안은 매우 조용했다. 그러다 보니 우유도가 먹을 가는 소리가 유난히도 귀에 잘 들어왔다. 곧 수많은 시선이 우유도를 향했다.

자금동의 두 제자 진관과 가정걸은 고개를 쭉 내밀고 우유도를 바라보며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설마 우 장로가 정말 종문의 잘못을 적어 내려는 것일까?

뒤에 있는 곤림수도 그런 우유도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먹을 갈며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우유도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고 좌우를 둘러 보았다. 오른쪽에는 위국 영허부의 장로 천결(天缺)이 있었고, 왼쪽에는 한국 무상궁의 장로 장여정(莊如正)이 있었다. 앞에 있는 제국 현병종의 장로 철비성(鐵飛星)조차 뒤돌아 우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우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유도는 자신이 쓰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곧 우유도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뭘 그리 보십니까? 보면 베낄 수나 있습니까? 그렇게 궁금하시다면, 이 몸이 다 쓰고 보여줄 테니 그때 천천히 베끼시지요.”

그다지 좋은 말투는 아니었다. 우유도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우유도가 쓰려는 것은 다른 장로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금동의 약점이나 단점을 다른 문파의 장로들에게 보여줘서 좋을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쓰는 것을 만약 다른 사람이 베껴 쓰기라도 한다면, 좋은 일을 당할 리 없었다. 예를 들어 우리 문파 내부에 있는 제자들이 게으르다, 뭐 이런 것은 많은 장로들이 쉽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문파에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걸 몇 명이 사용했을 경우에는 그저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만약 여기 있는 수많은 장로가 똑같이 쓴다면, 어쩌면 같이 재수 없는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표묘각의 위협을 피해가기 위해 수작을 부렸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었다.

다만,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다들 말이 없었다. 누가 베꼈단 말인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뭘 보고 베낀단 말인가?

더욱이 다른 사람들은 우유도의 서슴없는 말투에 화가 났다. 정위가 막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우유도는 뭐 하는 놈이길래 이처럼 자신들에게 불손한 말을 내뱉는단 말인가?

만약 이런 곳이 아니었다면, 성격 있는 사람은 진작에 뛰쳐나가 우유도와 누구 주먹이 더 강한지 겨루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로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우유도가 다시 정면을 보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정위에게 물었다.

“정 각주님, 비밀을 지켜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다른 사람이 훔쳐봐도 된단 말입니까?”

정위는 조용히 무표정한 얼굴로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내심 흥미가 동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정위 그 자신조차도 방금 우유도가 먹을 가는 소리에 정신이 팔렸었다.

우유도의 행동, 그리고 방금 사람들을 욕한 모습을 보고, 정위의 머릿속에 천도비경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한 보고서가 스쳐 지나갔다. 보고서를 봤을 때, 우유도가 큰 소란을 피우고 자금동에 들어가 자금동의 장로가 된 과정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과, 지금 우유도가 한 행동을 본 정위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역시 비상한 사람은 비상한 행동력이 있다는 것이다.

정위는 어리석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단지 우유도의 행동에 의한 것일 뿐, 훔쳐볼 생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물론, 우유도가 다른 사람이 혹시 자신이 적은 것을 훔쳐볼까 봐 우려하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자금동에 이 사실을 전할까 봐 우려한 것이다.

정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수하가 입을 열어 다시 경고하며 소리쳤다.

“다시 말하겠소. 고개를 돌리지 마시오. 주위를 살피지 마시오. 다른 사람의 것을 보지 말고, 자신의 것을 쓰는 데 집중하시오.”

머릿속으로 우유도에게 쌍욕을 퍼붓던 장로들은 분분히 다시 단정히 돌아앉아 눈앞에 있는 흰 종이를 마주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시선이 수시로 우유도에게 힐끔힐끔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표묘각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저 힐끗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힐끗힐끗 살펴보며, 내용을 적기 시작한 사람이 있는지 계속해서 관찰했다.

먹을 다 간 우유도는 붓을 들어 먹을 묻혔다. 그렇게 살짝 망설이던 우유도는 붓을 놀려 거침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우유도에게 몰렸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내심 속으로 혀를 차며, 외부인은 역시 외부인이라며, 믿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압박을 살짝 가했다고 바로 자금동에게 칼질을 해버리다니!

다들 우유도가 중간에 자금동에 합류한 사람임을 모르지 않았다. 인제 보니 우유도는 역시 자금동의 생사에 관심이 없는 듯했다.

자금동의 두 제자는 우유도가 글을 적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우 장로가 종문을 팔아먹었음을 깨달았다. 현장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 우 장로가 가장 먼저 종문을 팔아먹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분노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 시선을 의식한 우유도는 잠시 멈칫하더니, 종이를 살짝 접어 자신이 적는 것을 가리며 계속해서 내용을 적어 나갔다.

소인배군! 장로들은 속으로 불만을 표했다. 이를 본 정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군가 시작을 끊었다. 특히 그 시작이 우유도였다. 효월각의 심일도, 만수문의 조경, 사해의 부화, 단무상, 홍개천, 낭량공 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먹을 갈고 내용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 또한, 결국 어쩔 수 없이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나머지 장로들은 비록 우유도를 욕하고, 종문을 팔아넘긴 우유도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그 자신 또한 가만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거센 압박을 받는 상황이었으니, 이들 또한 어쩔 수 없이 고분고분 종이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의 행동은 사실 우유도의 행동과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 봤자 먼저 적고 나중에 적고의 차이일 뿐이었다.

한 시진의 시간,

정위는 탁자에 있는 모래시계를 확인했다. 그 시간 동안 정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시켜 서적을 가져오게 했고, 그 자리에서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며 서책을 읽었고, 가끔 아래 현장을 살펴보기도 했다. 마치 시험장의 감독관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에 뒤에 앉아 있는 각 문파의 제자들은 자신들 문파의 장로가 다들 종문을 팔아넘기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해도, 그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적지 않으면? 아마 죽을 것이다. 이미 성경에 들어왔으니 어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성경에 오자마자 발가벗겨졌다. 그리고는 이처럼 극도로 난처한 일을 지시했다. 그야말로 숨 쉴 겨를도 없었다. 이들은 곧 있을 단련에 대해서 크게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휘리릭!

적지 않은 사람이 우유도를 힐끗 바라보았다. 저놈은 이미 한 장을 가득 채운 후 옆에 뒤집어 놓더니, 두 번째 장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종이를 접어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사람이 혀를 찼다. 한 장으로 부족하다니, 도대체 자금동의 얼마나 많은 죄상을 밝히려는 것인가?

정위가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보며, 내심 매우 만족해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런 일을 주관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을 보면 당연히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유도의 태도에 크게 만족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옳은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니, 나방비가 우유도를 지목해 불러온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정위는 당연히 성경 명단이 어째서 수정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나성지 쪽의 나방비가 갑자기 자금동의 제자 한 명을 우유도로 바꾸어 버렸다. 당시 이 때문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장로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규정에 장로들이 참여할 수 없다는 말도 없었다. 단지 이렇듯 아래에서 올려보낸 명단을 이랬다저랬다 하며 바꾸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각 문파에서 잘못한 것도 없으니, 자칫하면 표묘각 측의 횡포로 보일 수도 있었다.

다만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겨우 명단의 이름 하나 가지고 나방비와 대립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변경된 명단이 각 성지에 통보되었을 때, 무슨 심리인지, 다들 하나씩 이름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이 되니, 명단에 있는 문파 중 아홉 개 문파에 변화가 생겼다. 결국은 공정성을 위해, 상부에서 표묘각에 지시를 내렸고, 표묘각은 다른 모든 문파의 명단을 모두 수정해야 했다. 대외적으로는 당연히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릴 리 없었다. 다만 표묘각이 각 문파의 명단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고 통보할 뿐이었다….

하나둘 내용을 다 적은 사람이 생겨났다.

절반이 넘는 사람이 내용을 다 적었음에도, 우유도는 여전히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벌써 세 번째 장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이 탄식을 내뱉었다. 자금동은 정말 어쩌다가 저런 쓰레기를 받아들였는지, 이건 지금 자금동을 죽음으로 등 떠미는 것이 아닌가?

두 눈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두 자금동의 제자들은, 각자 마음속에 울분이 치솟았다. 자신들이 저런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다니.

곤림수조차 눈살을 찌푸렸다. 우유도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숨길 수 없었다. 대충 체면만 차리면 충분했다. 아무리 사문을 팔아넘긴다고 해도, 저렇게 철저하게 팔아넘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지금 이건 자금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인가, 아니면 철저하게 자금동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사매이자 부인이 아직 자금동의 손에 있었다. 그는 우유도가 이런 일을 벌였다가 자금동이 그녀의 사매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 걱정되었다.

하지만 우유도의 진지한 태도 덕분에 심일도 등 사람들은 자신이 없어졌다. 정말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 맞단 말인가? 덕분에 이들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이 적어 넣었다. 그렇게 망설이며 붓을 들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여전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우유도를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우유도는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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