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8화. 성의를 보여라.
조경의 두 눈이 서서히 켜졌다. 마치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우유도가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 이미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실 진작부터 깨달았어야 했다. 다만 그전에는 살고 싶은 마음이 큰 나머지, 의심이 들어도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우유도가 이토록 직설적으로 밝히니 꿈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유도, 감히 요호와 붙어먹다니!”
조경이 크게 분노하며 소리쳤다.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째서 호족의 함정에 빠졌는지 깨달았다. 배후에 우유도가 있었다.
우유도는 조경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장난을 치며 말했다.
“붙어먹었다니, 그 얼마나 천박한 말이야. 물론,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겠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사실 붙어먹은 거로 치면, 난 이제 호족과 방금 붙어먹은 것이고. 네놈하고 한 짓이 진짜로 붙어먹은 것이지. 이봐 조 장로. 당당한 만수문의 장로가, 만수문을 속이고 외부인과 결탁했으면서, 날 지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유도는 말하면서 조경의 수염을 유심히 보며, 마치 털을 선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 가닥씩 뜯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 손에 떨어진 사람이 여기서 이처럼 거만하게 굴다니? 빌어야지. 내게 살려달라고 빌어봐. 만약 날 기쁘게 하면, 당연히 풀어줄 거야.”
수염이 한 가닥 한 가닥 쥐어뜯기고 있었지만, 조경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몸과 마음이 받는 고통은 그깟 수염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뽑히고 있는 수염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우유도가 수염을 가지고 놀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내버려 두고는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유도, 그제 내가 널 협박한 것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그런 말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딱 하나만 묻겠어. 잘못했어?”
그 질문을 하는 우유도의 두 눈은 매우 깨끗하고 진지했다.
“내가….”
조경은 말문이 막혔다가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했네……. 뭘 어쩌란 말인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사죄해야지. 그렇지 않아?”
“하! 그래 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 뜸 들이지 말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사죄하지 않고, 내게 굴복하지 않으니, 네놈을 어찌 살려둘까?”
만수문의 두 제자는 간절한 눈빛으로 조경을 바라보았다. 제발 조경이 우유도에게 잘못했다고 빌기를 바라는 모습이었다.
흑의 남자 일행은 뭐하러 이렇게 질질 끄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호기심 가득 우유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경이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말했다.
“좋아. 내 목숨을 살려주면, 네 수족이 되어주겠다. 어찌해야 안심하겠는가. 조건이나 요구사항이 있으면 마음껏 말해보게.”
“그렇지, 이래야 협상을 할 수 있지 않겠어? 물론, 말로 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지. 성의를 보여야겠지.”
우유도의 말투와 태도는 확실히 협상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매달려 있는 세 사람의 마음속에 희망이 생겨났다.
조경이 떨리는 마음으로 물었다.
“어떤 성의를 원하는가?”
“저들 셋을 먼저 풀어줄 수 있소?”
우유도가 뒤돌아 손짓하며 말했다.
흑의 남자가 끄덕였다. 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는 뒤돌아 끄덕였다.
조경 일행을 감시하던 두 늙은이가 한쪽 벽에 걸려있는 밧줄을 풀었다. 가느다란 덩굴을 엮어 만든 밧줄 같았다.
밧줄이 풀리자, 세 사람이 땅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처음부터 높게 매달려 있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이미 고문을 받아 몸이 정상이 아니다 보니,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졌고, 곧 발버둥 쳐서 자리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오래 매달려 있다 보니, 두 팔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쓱쓱.
갑자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유도가 검을 잡고 검집으로 바닥에 글을 적는 소리였다.
‘흑모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글을 적은 우유도가 다시 검집을 회수해 두 손을 짚고 서서는 바닥에 적혀있는 세 글자를 향해 턱짓하고는 물었다.
“알겠어? 성의를 보여,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죄해.”
글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라고?
“우유도, 이게 무슨 뜻인가?”
“정말로 모르는 모양이네?”
우유도가 뒤에 있는 흑의 남자를 가리키고는 말했다.
“여기 이쪽이 호족의 족장이지. 여기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안 보여?”
그래서? 조경 일행은 이해할 수 없어 우유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흑의 남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신을 왜 끌어들인단 말인가.
“네놈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호족을 죽였지? 어떤 일은 일단 저질렀다 하면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거야. 내가 지금 너희를 도와주고 있는 거야. 너희의 혈채를 씻어주고 있는 거지. 빨리 고개를 숙이고 사죄해. 성의를 보이란 말이야. 이쪽이 만족해야, 네놈들을 위해 뭐라 말이라도 붙여볼 거 아니야.”
세 사람은 흑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과연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바닥의 ‘흑모란’이라는 세 글자를 보았다. 곧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다만 깨달은 것은 깨달은 것이고, 세 사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습이었다.
“서화, 네 사부가 아직 체면을 내려놓지 못한 것 같군. 네가 먼저 시작해 보는 건 어떤가?”
우유도가 눈치를 주었다.
서화는 우유도의 의도를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사부를 한번 보았다. 그는 글자 앞에 무릎을 꿇고 ‘흑모란’ 세 글자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땅에 댔다.
“대충대충 하지 말고 성의를 보이란 말이야. 또 입으로는 이렇게 말해. 흑모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계속 입을 놀려, 멈추지 마.”
“흑모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흑모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서화는 우유도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하며 소리쳤다.
우유도는 다시 옆에 있는 다른 만수문 제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 제자 또한 서화가 하는 대로 따라 했다.
“흑모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조경은 좌우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던 사람이었다. 그런 조경에게 이런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조경은 차라리 비겁하고, 후안무치한 일을 하는 것이 낫지, 잘못을 시인하며 절을 하는 일은 도저히 하기 어려웠다.
우유도는 천천히 다가가 조경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그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조 장로, 혹시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야? 이건 다 당신을 위한 거야. 모르겠어? 지금이 어느 때야, 굽힐 때는 굽힐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알겠어? 내가 지금 다 당신을 위해서 이러고 있으니,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여기에 온 것을 헛고생으로 만들지 말란 말이야. 물론, 죽고 싶다면 상관없지만 말이야.”
조경은 땅에 적혀있는 글자를 한번 보고, 흑의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우유도를 보며 마치 이게 소용이 있느냐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유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조경은 이를 악물었다. 곧 결심을 내린 조경은 천천히 방향을 잡고 무릎을 꿇고는 ‘흑모란’이라고 적혀있는 글자를 향해 절을 하며 말했다.
“흑모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경은 우유도를 저주하며 이곳에서 살아나가기만 하면, 언젠가는 이 원한을 갚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것도 나름 굽힐 때는 굽히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계속해서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다는 목소리가 지하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눈앞에 세 사람이 허공을 향해, 바닥에 쓰여있는 세 글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는 광경을 보고 호족의 사람들은 서로서로 바라보았다. 어째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일 같아 보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했다. 세 사람에게서 그 많은 수안을 찾아냈을 때, 만약 우유도가 사전에 단단히 당부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그 자리에서 세 사람을 죽여 버렸을 것이다.
흑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우유도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아무리 고문해도 조경의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름 강골이라 본 것이다. 그런 사람이 우유도가 와서 말 몇 마디 하니, 강골이 연골이 되어 버렸는지 절을 하며 잘못을 인정하다니.
우유도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우유도는 그렇게 서서 담담히 서 있었다.
우유도의 귓가에 그 이름과 잘못했다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우유도의 머릿속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과의 기억이 바로 어제 일처럼 뚜렷하게 떠올랐다.
푸른 바다에서, 그 여자는 뭐라 중얼거리더니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수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그 여자는 조용히 우유도의 품에 안겨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렇게 우유도는 선수에서 그녀를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여인의 장발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마지막에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우유도는 그녀를 안고 바다를 보여주었다. 운명은 왕왕 바다처럼 요동치고는 했다.
그 따뜻하던 여인의 몸이 우유도의 품에서 서서히 온기를 잃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느낌을 느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유도는 그 느낌을 아주 확실하게 느꼈었다.
사람이 죽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서서히 잃어 가는 느낌. 개인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
강호의 피바람은 이미 한참 전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유도는 강호를 종횡무진하며 그 사이사이 끼어들어 오는 온정이 싫었다. 온정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었고, 정리하려고 해도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했다. 아주 곤란했다.
우유도는 차라리 서로 속고 속이며, 피바람 사이에 목숨 걸고 싸울지언정, 그런 온정 때문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우유도는 먼 과거에 겪어보았다. 또 뼛속 깊이 깨달았었다. 우유도는 이성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강호의 사람은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이성을 잃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우유도는 계획을 세워 놓았었다. 그녀에게 배에서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녀는 우유도에게 문제가 생길까 봐, 우유도를 구하기 위해서 우유도를 가장해서 적을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결국,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 업혀 돌아왔을 때는 겨우 마지막 숨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우유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죽어가는 그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유도는 제경에 가서 계략을 펼쳤고, 호랑이가 있는 산을 향해 갈 믿음과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한 여자의 목숨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으니, 우유도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심지어 그 여자는 죽어가면서까지도 우유도에게 과거 그녀를 모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 원수의 신분과 지위가 높아 우유도를 난처하게 할까 봐서였다.
그때, 우유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중에 목숨을 잃어, 다시는 누구인지 모르게 될까 봐 그녀의 시신을 안고 있는 와중에 뒤에 있는 사람을 추궁했다.
당시 뒤에 있는 사람은 우유도에게 두 사람의 이름을 알려주었고, 그중에 한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조경이었다.
하지만 마치 사람들이 우유도를 평가하는 것과 같이, 좋게 말하면 이성적인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혈한이었다.
원숭이가 그랬었다.
‘도야는 너무 이성적이에요. 전 그렇게 하지 못하겠어요!’
우유도는 분명 진작에 그 두 사람을 처리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을 끌었다. 이는 빠르게 복수를 끝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충 복수하는 건 남자답지 않았다. 지금까지 초려산장에 혼자 버려진, 무덤 안에 있는 사람의 원한을 갚지 않았다. 모두 우유도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