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4화. 돌봐주다
영호추는 곧 안에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두 사람은 대청을 가로질러 후당으로 나와 내원의 정원을 천천히 거닐었다. 밖에 있는 사람의 이목을 피해 영호추가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성경에 가서 혼인을 올려야 합니다. 가기 전에 장문인께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추가했다.
“원래는 장문인과 같이 성경에 가고 싶었지만, 빙설성지 쪽에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영호추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는 자네 장문인으로 남기 어려울 것 같네. 자네를 파문시키도록 하겠네.”
천영이 멈칫하더니 영호추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설마 영호 형은 저 천영을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까? 비록 제가 풍류하다고는 하지만, 배은망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호 형도 저를 돕지 않으셨겠지요. 제게 보답할 기회를 주십시오.”
영호추가 발걸음을 멈추고 뒷짐 지며 말했다.
“보답? 자네가 설락아를 취하고, 저 높이 올라갔으니, 나는 원래 자네를 위해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하지만 왜인지 기뻐할 수가 없군.”
천영이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이것이 화인지 복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영호추가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자네는 수많은 벌과 나비를 끌어들이는 향기를 지니고 있네. 그러니 앞으로도 자네의 향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네에게 끌려들겠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용모입니다.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자해라도 해야 합니까?”
“이번 일이 얼마나 흉험한지 아는가? 그나마 설락아가 자네를 지키고자 했으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직 살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어찌 하필 건드려도 그녀를 건드린 것인가. 그런 여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네.”
“제가 언제 그녀를 건드렸다고 그러십니까.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누가 그녀를 빙설각의 각주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럼 그냥 즐기고 말 것이지. 혼인을 해? 자네, 감당할 수 있겠는가?”
천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즐기라니, 영호 형, 그게 말입니까? 설마 영호 형 눈에는 제가 여자를 가지고 노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여기저기 꽃을 꺾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내가 볼 때 비슷해 보이는군그래.”
천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사 제가 그렇다 한들, 이제 뭘 어쩐단 말입니까? 이런 일은 원래부터 남자가 이길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들의 눈에는 당연히 제가 그녀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이제 저들의 추측이 진실이 돼서는 안 됩니다. 이제 와 혼인을 하지 않으면, 더 빨리 죽을 뿐입니다.”
“됐네, 이제 와 어쩌겠는가. 운명에 맡겨야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 같군. 최소한 앞으로 다른 여자를 건드리고 다니지는 못할 것이고, 다른 여자도 감히 자네에게 다가오지 못하겠지.”
천영은 자조하는 미소를 짓더니 소매에서 두꺼운 전표를 꺼내 영호추에게 건넸다. 영호추가 깜짝 놀라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큰 은혜에는 인사치레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돈 나갈 곳이 많아 형편이 곤궁합니다. 겨우 십만 냥에 불과할 뿐이니, 받아 주십시오. 은혜는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갚겠습니다.”
영호추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 돈이 어디서 났는가? 설락아가 준 것인가?”
“이 정도 돈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째, 제가 기둥서방 같아서 이 돈이 불쾌하십니까?”
“여자가 준 돈을 내게 주는 것인가? 자네가 보기에 내가 이 돈을 받을 것 같은가?”
“아이고, 받아 주십시오. 그냥 제가 몸을 팔아 번 돈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천영은 영호추의 손을 잡아 그 손에 돈을 쥐여주었다.
영호추는 손에 들어온 전표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어째 이 돈을 들고 있으니 여기저기가 거북한 느낌이었다.
“이미 이렇게 되었습니다. 인제 와서 따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성경에 간다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평생 나오지 못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혹시 제가 도와드릴 것이 있으면 말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쪽에서는 자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 우리는 최대한 적게 만나는 것이 좋겠네.”
“숨길 수 있겠습니까? 빙설성지가 이미 저를 찾아냈으니, 다른 것이라고 못 찾아내겠습니까? 아마 저와 천지문의 관계를 이미 수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 겁니다.”
“지금 자네가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가? 천지문이 진국 제일 문파가 되게 도와줄 수 있는가, 아니면 내 경지를 폭등시켜줄 수 있는가, 아니면 나를 천하의 가장 부유한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가?”
천영이 잠시 고민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영호 형에게 제일 문파의 이름을 주어도, 그만한 기반이 없으니 아마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인제 보니, 저는 그냥 돈을 조금 쥐여주는 것 말고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영호 형의 의형제가 지금 성경에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유도?”
“맞습니다. 성경 단련의 사람들은 다들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설락아를 이용해서 그를 좀 돌보아 주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영호추는 망설였다. 만약 정말 설락아가 도와준다면, 어쩌면 우유도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도 우유도에게 어느 정도 보답을 한 것이라 할 수도 있었다.
“괜찮겠는가?”
“안 될 건 무엇입니까. 저도 경솔하게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 상황을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요. 영호 형, 우유도가 지금 성경에 있어 우리 둘의 관계를 아직 모르니, 서신을 한 통 써주십시오. 그걸로 우리 둘의 관계를 증명한다면, 나중에 성경에 들어갔을 때 기회를 봐서 우유도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영호추는 고민했다. 원강은 아마 자신과 천영의 관계에 대해서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경에 갇혀 있는 우유도는 모를 가능성이 컸다. 단지 영호추는 이 서신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천영이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장문인,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밖에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으니, 곧 떠나야 합니다.”
천영의 설득 아래 영호추는 결국 결심을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빠르게 서신을 한 통 써서 천영에게 주었다.
천영이 떠나고, 영호추는 원강의 서신을 없애버리고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천영과 우유도가 만날 것이니, 자신도 원강에게 답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
* * *
성경 출구,
일단의 사람들이 파동을 일으키며 걸어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한 여자를 호위하며 나타난 것을 보고, 마침 그곳을 순찰하던 우유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바로 그 여자를 향해 날아갔다.
우유도가 아직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여자의 호위 두 사람이 즉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서며 호통쳤다.
“누구냐!”
우유도는 호위를 사이에 두고 온화해 보이는 여인에게 포권을 했다.
“사 성주님, 오랜만입니다. 아직 헌원도를 기억하십니까?”
성경에 나타난 여인은 바로 사환려였다. 단지 외모와 품격이 당시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사실 우유도는 어느 정도 눈앞에 있는 여인을 동정했다. 아마도 평생 시집가기 힘들 수도 있었다. 빙설각의 각주 설락아와 그야말로 동병상련이었다.
심지어 설락아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았다. 설락아는 누구나 인정하는 빙설각의 각주였으며, 수행자이기도 했으니, 당연히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같이 남몰래 남자를 만나 혼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환려는 평범한 범인이었다. 적성성의 수행자들을 관리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들 수행자에게 보호받는 입장이었다. 달아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남몰래 뭔가를 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앞을 가로막자 사환려가 멈칫했다. 하지만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는, 곧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호위들을 뒤로 물렸다. 호위들이 물러나자, 천천히 앞으로 걸어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우유도이지요? 맞아. 당신이 성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백발의 노인, 적성성 사환려 아래 있는 총관 향명이 사환려를 따라 앞으로 나오더니 우유도를 빤히 바라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길을 막는 것인가?”
우유도가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길을 막은 것이 아닙니다. 성존의 명에 따라 순찰을 돌던 중, 사 성주님을 뵙고, 그대로 모른 척할 수 없어 이렇게 인사를 올리러 온 것입니다.”
사환려가 웃으며 말했다.
“향백, 긴장할 것 없어요.”
그 말이 끝났을 때, 몇 마리 날짐승이 주위 분지에 내려앉았다. 그 위에서 한 사람이 날아와 사환려에게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아가씨, 선생님께서 아가씨를 집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순간 사환려 얼굴 위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지더니 담담히 말했다.
“안 돌아갈래요. 설락아가 지금 빙설성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것이….”
사환려 앞에 있는 사람은 매우 난처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사환려는 이미 결심했다는 듯, 단호하게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 사환려에게 다시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사환려의 뒤를 따르고 있던 총관이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눈빛을 보냈다. 더는 말할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총관이 고개를 저으며 눈빛을 보내자, 그 사람 또한 사환려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곧 일단의 사람들이 날짐승을 타고 떠나갔고, 사여래가 보내온 사람만이 그곳에 남아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곳에 서서 멀어져 가는 날짐승을 보고 있는 우유도 또한 넋을 잃었다. 계획에 예상치 못한 큰 구멍이 생겼다.
사환려가 대나성지로 가지 않고 그대로 빙설성지로 가다니!
그가 알기로, 사환려는 오랫동안 적성성에 지내며 성경에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성경에서, 그것도 며칠이나 일찍 왔다면, 당연히 대나성지에 가서 그 부친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가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우유도는 성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 없었다. 게다가 성경에서 설사 사람을 모은다 한들, 지금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을 그들에게 알려준다면, 모두가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우유도는 호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족 중에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고수는 많지 않았고, 이들은 사전에 이곳저곳에 힘을 분산할 수 없었다. 사환려 곁에도 적지 않은 고수들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유도는 사전에 예상해 봤다. 사환려가 며칠이나 일찍 오니, 분명 대나성지에서 그 부친을 만날 것이라 보았다. 이미 호족의 고수들이 모여 대나성지로 가는 길목에서 준비하고 있었다.
우유도는 사환려와 동행할 변명도 생각해 놓았다. 그렇게 같이 동행하다가 호족과 같이 안팎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환려가 그대로 빙설성지로 간다니, 우유도가 심혈을 기울여 한 준비가 물거품이 되었다. 호족도 먼 거리를 달려와, 지금 열심히 준비한 것이 모두 쓸모없는 짓이 되었다.
우유도는 지금이라도 사환려와 동행할 변명을 생각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호족이 위치를 바꿔 다시 매복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고 우유도 혼자서 이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지금 사환려 곁에 있는 저 수많은 호위들은 모두 실력이 범상치 않은 자들이었다. 어찌어찌 저들을 이긴다 하더라도, 상황이 불리해지면 저들 몇 명은 반드시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려 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우유도 혼자만으로는 모두를 이곳에 붙잡아둘 수 없었다.
즉, 우유도가 사환려를 납치하려 했다는 소식이 성경 곳곳에 널리 알려지게 될 터였다.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