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9화. 지선원앙 불선선
외원에 있는 정자로 사환려가 천천히 다가왔다. 사여래 옆에 있던 왕존이 즉시 정자를 나가 그곳에서 멀어졌다. 부녀만의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정자 안에 들어간 사환려는 부친 앞에 섰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딸을 본 사여래의 안색이 복잡했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경에 돌아와서 어째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느냐?”
사환려가 고개 숙이고 말했다.
“집이요? 제게 집이 어디 있나요? 진작에 사라졌어요.”
사여래가 얼굴을 씰룩이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혼례가 끝난 후, 나와 같이 집에 돌아가자꾸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적성성에 일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 볼게요.”
“무슨 일이 있단 말이냐? 설사 일이 있다 해도, 일단 미뤄놓거라. 아니면 향명에게 처리하게 하면 된다.”
사환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격정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뭘 하죠? 치욕을 자초하라는 건가요? 나보고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보고 어머니라고 부르란 말인가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행동할 수 있지만, 저는 그러지 못하겠어요!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지만, 제게 어머니는 한 사람뿐이에요!”
사여래가 분노하며 호통쳤다.
“무엄하구나! 나는 네 아비다. 그 무슨 말버릇이냐!”
사환려는 두말하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사여래는 그 모습을 두고 보지 않고 즉시 손을 뻗어 사환려의 팔을 붙잡았다.
사환려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사여래는 그저 한 손으로 붙잡고 사환려가 발버둥 치게 놔두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왕존은 저들 부녀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즉시 고개를 돌려 못 본 척했다.
사환려는 더는 발버둥 쳐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버둥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사여래가 천천히 말했다.
“계집애야, 네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네가 밖에서 주워들은 소문을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사환려가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제 두 눈으로 그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어머니를 막아서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는 것을 보았어요. 당시 어머니가 얼마나 비천하게 살았는지 아세요? 그때, 그 여자가 어머니에게 죽음을 자초한다고 경고했었죠. 그 장면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어요. 아니면 제가 본 것과 들은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요?”
사여래가 깊은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했지만, 네 어미를 정말로 죽인 사람은 아니다. 계집애야. 네가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이 진실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라. 나와 돌아가자. 그녀와 좋은 관계를 맺어서 네게 나쁠 것이 없다.”
“그때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때 떠나기 싫다고 울면서 매달렸지만, 아버지는 저를 기어이 내보내셨어요. 절 혼자 외롭게 적성성으로 내보냈지요. 이제는 제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니, 또 저보고 돌아오라고 하는군요. 도대체 저보고 뭘 어쩌라는 거지요? 그때는 제가 방해되니까 밖으로 쫓아내더니,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저를 이용하려고 불러들이시는 건가요?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사여래가 사환려의 팔을 강하게 몇 번 잡아당기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때 네 어미에게 문제가 생기고, 너도 어떻게 될까 봐 너를 밖으로 보낸 것이다. 그녀와 혼인을 한 것도 모두 네 안전을 위해서란 말이다! 모르겠느냐?”
사환려가 눈시울을 붉히며 사여래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제 어머니를 죽인 흉수가 대나성지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건가요? 그런가요?”
“과한 생각이다!”
사환려가 갑자기 격하게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사여래가 갑자기 사환려의 팔을 놓아주었다.
놓친 것이 아니었다. 사여래는 말이 안 통하는 사환려의 행동에 분노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후, 곧 자신이 너무 강하게 붙잡아, 딸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팔을 풀어준 것이다.
사환려는 확실히 팔이 아팠다. 하지만, 풀려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욱신욱신 아려오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잡은 채,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뛰고 있었다.
상처받고 뛰쳐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보고 사여래는 더욱더 가슴 아팠다.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고, 가슴은 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사여래는 마음 같아서는 딸과 다 터놓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딸아이에게 알려줄 수 없는 사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지금 알려줄 수는 없었다. 지금 알려주어 봤자 딸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맹목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딸을 위험에 빠뜨릴 뿐이었다.
딸이 떠나가는 것을 보던 사여래는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깨어나,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여기저기에서 빙설성지의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익숙한 얼굴도 끼어있었다. 우유도!
사여래는 우유도가 언제 여기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방금 있었던 일을 목도한 것 같았다. 우유도는 눈을 끔뻑거리며 사여래가 있는 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시지요.”
앞에서 우유도를 안내하는 사람이 이야기하자, 우유도가 끄덕이며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사여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정자를 벗어났다.
왕존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둘이 장원의 대문을 빠져나왔을 때, 그는 부녀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건 그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우유도가 어찌 그 안에 있는 것입니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네.”
사여래는 지금 그 일을 깊이 생각할 심정이 아니었다. 딸 때문에 속이 엉망이었다.
대문을 나서 산을 내려갈 때, 사여래가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아름답게 장식된 장원을 둘러 보았다.
그처럼 행복해 보이는 분위기를 보며 사여래는 매우 서글퍼졌다. 그는 자신의 딸이 이런 분위기 속에 있으면서, 또 직접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어떤 심정일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딸아이는 이미 혼인 적령기를 지난 지 오래였다. 이미 늙은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딸아이를 감히 시집보낼 수 없었다.
딸아이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여래는 그 남자를 죽였다.
지금까지,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는 남자를 얼마나 죽였는지 몰랐다.
대나성지에서도 딸아이의 혼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심지어 조건이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 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여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거절했다.
사여래가 남자를 죽이고, 거절한 이유는, 그들의 배후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여래의 힘으로도 배후를 확인할 수 없는 자들이었으니, 그 목적이 순수하다고 볼 수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접근하게 한 게 분명했다. 사여래는 그처럼 나쁜 마음을 가진 남자들이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많이 알아 역효과가 나오기도 한다. 사여래는 그 때문에 딸이 자신을 더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우유도는 사여래의 일을 목격한 후, 태연하게 그 자리를 떠나 설락아를 만났고, 천영을 만났다.
천영을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몇 번 더 돌아보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과 같이 확실히 미남이었다. 설락아의 마음을 흔든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을 만난 후, 우유도는 당연히 축하 인사를 했다. 천영도 마찬가지로 우유도를 치하했다. 명성을 오래전부터 들어왔다느니 하는 말이었다. 우유도는 당연히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곁에 있는 천영 때문인지, 설락아는 과거보다 우유도를 예의 있게 대해주었다.
그렇게 안부를 주고받은 후에 우유도가 말했다.
“두 분께서 혹시 소인께 어떤 분부가 있으십니까?”
“분부라니요. 그냥 우 형을 만나보고 싶었을 뿐이오. 아, 영호 형이 우 형에게 전달해 달라는 서신을 가져왔소.”
그리고 천영은 소매에서 서신을 꺼내 우유도에게 전했다.
우유도는 퍽 의외였다. 영호추가 먼저 자신에게 연락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성경 내부로 서신을 보내다니.
원래는 서신을 받아 품에 넣으려고 했는데, 천영이 지금 내용을 확인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우유도가 서신을 열어 내용을 확인할 때, 천영은 죽통을 가져오게 하더니 그 자리에서 족자를 꺼내 설락아와 같이 각자 한쪽을 잡고 펼쳐 보았다.
서신을 확인한 우유도는 잠시 사색에 잠겼다. 어쩐지 원강이 영호추에게 천영의 일을 물었을 때, 영호추가 답장하지 않더라니. 천영을 통해서 자신에게 서신을 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서신에서는 상황이 허락할 경우, 천영의 도움을 받으라고 되어있었다. 영호추와 천영의 관계가 이 정도로 친하단 말인가?
물론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천영이 설파파의 사위가 되었으니, 정말 자신을 도울 힘이 있을 수도 있었다.
“지선원앙 불선선이라….”
그림의 한쪽을 들고 있던 설락아는 조용히 여백의 글을 읊조렸다. 내용을 음미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 넋이 나가 보이기도 했다. 그 글귀가 마침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한편,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던 천영이 탄식을 내뱉고는 말했다.
“대단하군. 우 형의 솜씨는 과연 훌륭한 것 같소. 좋은 그림이오.”
서신을 접어 소매에 넣은 우유도가 연신 겸손해하며 말했다.
“남들 앞에 내놓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다만 성경 안에 있어 드릴 것이 없는 터라, 어쩔 수 없이 못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마음만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군.”
설락아는 그림에서 눈을 떼고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좋은 그림이야. 마음에 들어.”
“아닙니다. 아닙니다. 두 분께서 마음에 들어 하신다니, 제 영광입니다.”
“우 형과 처음 만난 것이니,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눠도 되겠소?”
천영이 갑자기 설락아에게 말했다.
외부인이 있으니, 설락아는 당연히 천영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녀는 우유도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요.”
우유도도 또한 포권을 하며 배웅했다. 설락아는 그림을 말아, 직접 규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이 없자, 천영이 말했다.
“우 형, 해야 할 말은 아마 영호 형이 그 서신 안에 다 적어 놓았을 것이오.”
“앞으로 성경에서 천 형께 신세를 많이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천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내가 어찌 알겠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어차피 영호 형의 부탁을 받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말일 뿐이오.”
그 말을 들은 우유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이 천 선생님을 언급한 것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만?”
천영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영호 형은 여기저기 지인이 많지 않소. 어찌 모든 사람을 다 언급했겠소.”
“하긴, 그 말이 맞습니다.”
우유도가 연신 끄덕였다. 하지만 곧이어 또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빙설각 각주와 인연을 맺은 것을 보면, 그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 믿을 수 없을 지경이지요. 어쩌다가 이런 기연을 얻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천영은 무척 곤란하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인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겠소. 한마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지.”
“한마디로 다 말하기 어렵다라. 그렇군요. 천 형….”
우유도가 정자 안에서 일어났다.
“곧 혼례가 치러질 것입니다. 분명 다른 일도 많으시겠지요. 저도 더는 시간을 뺏지 않겠습니다. 잠시 후 오늘 저녁에 천 형의 혼례에 참석할 때 뵙겠습니다.”
천영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나도 마침 거처로 돌아가 혼례를 준비할 참이었소. 같이 나갑시다.”
“하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