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6화. 권주를 마다하다니
현미가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하지만 여전히 냉궁 안에서는 현승천의 고함소리가 새어 나왔다.
“현미, 죽은 후에 현 가의 조상들을 무슨 낯짝으로 볼지 두고 보겠다. 천벌을 받을 것이다. 더러운….”
그렇게 냉궁을 나섰을 때, 곧 몇 사람이 현미에게 다가왔다. 영허부의 장문인 상임선(常臨仙), 수정각의 장문인 장봉(藏丰), 대악산의 장문인 낙언진(駱言眞)이었다.
위국 삼대 문파의 장문인이 모두 도착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은 더는 종문에만 있을 수 없어, 다들 분분히 위국의 중추로 달려와 상황을 지켜보고자 한 것이다.
도착한 사람 중에는 위국의 어사대부 금영찬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영찬이 이번 숙청을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소평파가 문관들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지만, 문관들의 우두머리까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금영찬에 대한 계획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사건이 있던 날, 금영찬은 의논할 일이 있어 천미부의 현미를 찾아갔었고,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양측이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눈 후 현미가 물었다.
“후진은 뭐라고 했소?”
금영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진에 있는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후진군은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끌고 있으며, 지원을 오려는 모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흥!”
현미가 냉소를 지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고 하다니, 그냥 놔둘 수 없지. 지금 당장 모든 곡식의 판매로를 끊어 버리고, 오늘부터 위국에서 나오는 모든 곡식을 단 한 알도 후진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오. 명을 어기는 자는 구족을 멸할 것이오!”
“잠깐!”
금영찬이 명을 받으려는 그때, 영허부의 장문인 상임선이 손을 들어 저지하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 지금은 우리가 후진에 부탁하는 처지요.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지 마시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후진 쪽 상황은 이미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국 시절부터 전화의 피해를 심하게 받은 곳이 바로 지금의 후진입니다. 저들은 충분한 곡식을 수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장 상황을 안정시킬 곡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도 곡식으로 술을 담가 수익을 내는 돈줄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는 돈 또한 저들에게 급히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곡식이 없는 상황에서 어찌 저들이 곡식을 팔아 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저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제가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우리로부터 곡식을 마음껏 사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안심하고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이지요. 이것 또한 다 제가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들에게 곡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곡식 가격이 오르지 않도록 통제까지 했지요. 저들에게 큰 이익을 준 것입니다. 우리 위국에게 이익을 취했으면서, 위국의 위기에 수수방관하려 하다니, 세상에 그렇게 좋은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 위국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돈은 쉽게 벌더니, 그 욕심이 끝이 없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손은 커져만 갔지요. 지금 후진 내부의 상황은 돈으로 각 업계를 빠르게 발전시키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곡식은 항상 우리를 통해 쉽게 얻어왔으니, 이제 와 아무도 농사를 지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위국이 후진의 곡식 가격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면 손해만 보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각 업계로 진출해 돈을 벌어 그 돈으로 곡식을 사는 것이 나은 상황이지요.”
“물론 후진 조정 또한 이를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밭과 논을 개간했고, 사람들에게 명해 농사를 지으라고 했지요. 하지만 그 말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곡식값을 우리가 통제하고 있었으니, 농사를 지어도 손해를 보는 상황이 지속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무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았고, 그렇게 정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논과 밭이 황폐해졌습니다.”
“후진 내부의 곡식 공급이 아국의 통제하에 있으니, 저들이 가지고 있는 곡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제가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지금 위국이 저들의 곡식 공급을 끊어 버리면, 후진은 석 달 안에 난리가 날 것입니다. 각국 중에서 오직 우리 위국만이 충분한 여분의 곡식이 있어 소란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저들이 이제 와 논과 밭을 회복하려 한다 해도 그럴 시간이 있겠습니까?”
“사실 이건 다른 것을 위해 준비한 한 수였습니다. 다만 진국이 이미 아국에 밀고 들어왔고, 그 때문에 지금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저는 후진에게 경고할 것입니다. 우리가 후진에 난리를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단 위국이 진국의 손에 들어가면, 후진에 충분한 곡식이 공급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창 혼란스러운 후진은 진국에게 아주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으로 보이겠지요. 후진이 그것을 두려워할지 말지 지켜봐야겠습니다. 또 감히 후진이 더는 늦장을 부릴 배짱이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현미가 진작부터 준비가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삼대 문파의 장문인은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현미를 바라보는 그들의 두 눈에서 빛이라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기쁨의 빛 말이다.
과거, 현미는 후진과 친선 우호를 맺기 위해 일견 비정상적으로 보일 만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진국이 범과 이리와 같은 마음으로 위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일단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후진에 대량의 곡식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매우 강력히 의견을 피력했었다. 다만, 그 당시에 삼대 문파는 그 결정에 다소 불만이 있었다.
다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후진의 경각심을 늦추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었던 것 같았다. 현미는 후진뿐만이 아니라, 위국 삼대 문파도 모두 속여 넘겼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한 수에 이런 전략과 전술이 숨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상시라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속인 것에 대해 삼대 문파는 어느 정도 기분 나빠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후, 지금 그들은 누구 한 사람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현미를 이해하는 마음이 먼저 생겼다.
그녀는 이처럼 큰 판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 반드시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했으며, 후진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야 했다.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면, 비밀이 누설될 가능성이 그만큼 컸다. 그리고 일단 이 정보를 후진이 알게 되면, 당연히 걸려들 리 없었다.
결국 그 덕분에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현미의 준비가 아주 큰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세 장문인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그들 세 장문인은 눈앞에 있는 현미가 현승천보다 얼마나 뛰어난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들이 원하는 속세의 대리인이었다.
다만 오히려 이런 이유 때문에, 심지어 남몰래 탄식하기도 했다. 만약 이 여자가 진작에 황위에 올랐다면, 어찌 지금 같은 결과가 있었겠는가?
상임선이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현명한 결정이시오. 상공의 말대로 합시다. 삼대 문파가 전력으로 지원하겠소. 후진의 곡식 공급을 끊어, 단 한 톨도 그들에게 흘러가지 않게 하겠소!”
수정각의 장문인 장봉과 대악산의 장문인 낙언진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력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현미는 더는 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금영찬에게 물었다.
“금 대인, 제국 쪽 상황은 어떤가요?”
금영찬이 말했다.
“노신과 세 장문인께서 상공을 방문한 것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국의 대군이 지금 빠르게 접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국 상장군 호연무한이 다급한 소식을 보내오기를, 그가 진군의 동향을 보니, 윤여의 대군이 위국을 가로질러 서병관으로 향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 윤여가 서병관을 함락시키지 못하도록 서병관의 방비를 강화하라고 전했습니다. 호연무한은 이미 제국 동부의 병력에서 기병을 모아, 우리 위국의 동북 방향으로 들어와 윤여의 대군을 막을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들 제국군이 아국 국경에 들어올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했습니다!”
“서병관!”
현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순간, 호연무한이 무슨 의도로 그런 경고를 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진국이 동사국 군대가 개입할 가능성을 억제하고자 한 것이다. 정말 진국이 서병관 공략에 성공한다면, 현미가 후진에 부린 수작이 효과를 잃을 것이 분명했다. 현미가 그 즉시 말했다.
“호연무한이 전장을 보는 안목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절대 간과할 수 없습니다. 지금 즉시 전령을 보내 협조하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금영찬이 대답하더니, 갑자기 다소 망설이며 말했다.
“상공, 사실 제국 조정에서 또 다른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이는 연혼(*聯婚: 혼인)에 대한 문의였습니다. 제국의 뜻은 지금 상황이 매우 긴박하니, 더는 늦출 수 없다는 의견입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면서 조용히 서문청공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 말이 나오자, 상임선, 장봉, 낙언진의 시선도 모두 자기도 모르게 서문청공에게로 향했다.
서문청공은 사람들의 반응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마 뭔가 자신에게 숨기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연혼에 관련된 일에 설마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현미는 세 명의 군주를 제국에 보내 화친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그건 그도 아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은 서문청공에게 숨기고 있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문청공을 속이고 있는 사람 중에는 현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요. 그 일은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지요.”
“알겠습니다. 노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금영찬이 포권을 하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다시 서문청공을 한번 바라보고는 곧 몸을 돌려 떠나갔다.
* * *
밤이 깊었다.
현미의 침궁 안이 수증기로 자욱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현미가 꽃잎이 가득한 욕조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에 고통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침궁 밖,
활검(闊劍)을 등에 멘 서문청공이 처마 밑에서 싸늘한 두 눈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안에서 목욕을 하는 사람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다. 그는 그렇게 한시도 방심하지 않고, 항상 그녀를 수호하고, 보호했다.
침궁의 문이 열렸고, 궁녀들이 목욕에 사용된 잡다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다. 그중에 한 궁녀가 밖에 있는 내시와 호위들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내시와 시위들이 분분히 침궁에서 멀어졌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서문청공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주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떠난 것 같았다.
정상이 아니었다. 서문청공은 즉시 입구에 다가가 안을 향해 소리높여 말했다.
“현미.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요?”
“들어오세요.”
현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문청공이 막 방 안에 들어왔을 때, 현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문을 닫아 주세요.”
서문청공이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도 현미가 시키는 대로 뒤돌아 문을 닫고는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층층이 달린 비단 장막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자, 화장대 앞에서 목욕을 마친 현미가 장발을 등 뒤로 늘어뜨리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현미는 아주 얇은 비단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덕분에 등불 아래 현미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미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본 서문청공은 다소 쑥스러워하며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