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화. 방울을 풀기 위해서는 방울을 묶은 사람이 필요하지요
“너희도 물러가라!”
란 귀비가 다시 곁에 있는 내시들에게 말했다. 내시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공손하게 물러났다.
그런데도 가무군은 입을 열지 않고 란 귀비 좌우에 있는 수호 법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들도 물러나세요!”
란 귀비가 손짓했다. 한 여수행자가 말했다.
“마마, 가 선생님의 곁에 수행자가 있습니다. 물러나려면 같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녀는 원종을 빤히 바라보며,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란 귀비는 우습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저 사람은 가무군의 입을 대신하는 자였다. 만약 저자가 물러간다면, 어찌 소통한단 말인가. 귀비가 여수행자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송국의 귀빈이 어찌 본궁에게 해를 끼치겠나요. 물러나세요.”
여자 수호 법사는 귀비가 갑자기 왜 이렇게 외부인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물러나기 전에 당부를 잊지 않았다.
“마마,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늦지 않게 신호를 주십시오.”
가무군 곁에서 모든 안배를 직접 확인한 원종만이, 이 혀 없는 놈이 얼마나 교활한지 알 수 있었다. 가무군은 두 모녀의 심리상태를 십분 활용해 상황을 여기까지 진전시켰다.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샅샅이 파악한 것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물러나자, 가무군이 뒤돌아 밖을 바라보았다. 수행자들은 그저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만 적당히 떨어져 있을 뿐, 화단 위에 서서 대청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란 귀비가 다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선생님, 공주에게 진심으로 해줄 말이 있다고 하셨지요.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가무군이 원종에 등에 대고 손을 놀렸다.
‘누군가 엿듣는다면, 바로 알려주시오!’
원종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무군이 두 모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가무군은 태숙환아 혼자 있을 때 해야 할 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모녀가 같이 있으니, 당연히 들려줄 말을 바꿔야 했다. 만약 이 정도 임기응변 능력도 없다면, 그 정도 담력도 없다면, 이 흙탕물에 쉽게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가무군이 원종의 입을 빌려 한 첫마디는 이러했다.
“방울을 풀기 위해서는 방울을 묶은 사람이 필요하지요!”
“방울을 풀기 위해서는 방울을 묶은 사람이 필요하다라….”
란 귀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소문을 들으니, 공주님께 치욕을 안긴 사람이 지금 폐하 곁에 있는 총신(寵臣) 소평파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건 란 귀비가 뭐라 할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주제에 관해서 이야기하자, 태숙환아는 뭔가 자극을 받은 듯, 열 손가락을 꽉 움켜쥐었다.
가무군은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공주님의 청백지신이 진장공에게 짓밟혔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것은 헛소문에 불과하지요.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을 겁니다. 마마와 공주님은 그에 대해 변론을 하셔야지, 어찌 다른 사람이 비방하도록 그냥 놔둔단 말입니까?”
란 귀비의 얼굴에 비통함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을 본궁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다만 소문이 이미 퍼질 대로 퍼졌으니, 본궁이 어찌 변론한단 말입니까?”
“방울을 풀기 위해서는 방울을 묶은 사람이 필요한 법입니다. 소평파가 그 헛소문을 없앨 수 있습니다. 소평파가 공주님의 청백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란 귀비가 활력이 돋는 얼굴로 말했다.
“어찌 말입니까?”
“공주님께서 치욕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계책을 세운 사람이 소평파입니다. 그 내막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소평파입니다. 만약 소평파가 나서서, 공주님께서는 단지 서병관에 갇혀 있었을 뿐, 진장공과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공주님께 어떠한 결함도 없다고 한다면…. 아마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평파가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헛소문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입니다!”
“아!”
란 귀비는 크게 놀란 듯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무군의 말을 들은 그녀는 마치 대오각성한 듯 그 즉시 깨달음을 얻었다. 하마터면 크게 기쁜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추태를 보인 것이다.
양손을 가슴 앞에 맞잡은 그녀는 최대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마음속으로는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서성였다.
‘맞다. 이처럼 좋은 방법을 왜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온종일 울상을 짓고 있을 게 아니라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세상엔 나보다 똑똑한 자들이 참으로 많거늘! 혼자 고민하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고명한 사람을 찾아 해결 방법을 강구했어야 했다. 언제 세상이 불쌍한 척한다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준다던가?’
하지만, 한쪽에 있던 태숙환아는 가무군의 말을 듣고 멍해졌다. 소평파에게 시집을 가라고?
“마마!”
이때, 대청 밖에서 긴장한 얼굴로 내부를 주시하던 수행자들이 다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란 귀비의 탄성을 듣고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안 것이다. 이에 놀란 수행자들은 즉시 가무군을 포위했다.
원종은 즉시 사주를 경계했다. 하지만 가무군은 여유로워 보였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져도, 아주 담담할 뿐이었다. 그는 란 귀비의 반응을 살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하던 원종은 가무군의 모습을 보며, 크게 문제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대담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표묘각에 가서 혀가 뽑힌 사람이라 그런지, 그 배짱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수행자들이 뛰어들어가자, 밖에서 대기하던 곽문상 등의 사람들은 당황했다. 곧 그들 또한 혹시나 문제가 생겼을까 봐 뒤따라 뛰쳐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이 들어와서 보니 평화로웠고, 아무 문제 없었다. 이들 수행자가 어째서 이리 긴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밖에서 뛰어들어온 맥덕만도 긴장했다. 그는 까치발을 하고 안쪽을 살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가무군이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가무군의 대담함과 지략, 그리고 그의 성품을 봤을 때, 그가 터무니없는 짓을 벌일 리는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를 이곳으로 들여 보내준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무군이 만약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맥덕만은 분명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된다는 점이었다. 승상이 분노할 테고, 그렇게 되면 맥덕만의 집안이 망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니 출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당연히 맥덕만은 긴장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단의 사람들이 우당탕 안으로 뛰어들어오니, 란 귀비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이 서둘러 가무군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한 수행자가 물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란 귀비는 자신의 추태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황당하군! 가 선생님은 귀빈이에요. 무슨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죠? 다들 물러나세요. 지금 당장!”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모여있으니, 가무군에게 어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을까. 이런 이야기는 대놓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무군이 사람들을 물려 달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다.
란 귀비는 아직 가무군에게 좀 더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니 혹시 상대방이 지금 상황에 기분이 나빠져, 이대로 떠나버릴까 봐 걱정되었다. 만약 가무군이 떠나면, 누굴 찾아 이 의혹을 풀 수 있단 말인가.
눈앞의 가무군은 란 귀비가 본 적이 없는 고명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야말로 연신 손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쫓아낼 정도였다.
결국,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멍해졌다. 다시금 물러가라고 명하는 란 귀비의 목소리에 분노가 담겼다.
“귀빈께 무례를 범하지 마세요. 지금 가 선생님께서는 공주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으니, 어서 물러가세요!”
아무 일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수행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자신들이 괜한 일을 만든 느낌이었다. 그렇게 수행자들이 천천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곽문상과 늙은 내시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물러갔다.
란 귀비는 수행자들에게는 과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침없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저 멀리 꺼지거라!”
란 귀비는 가무군에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러한 것을 말하지 않은 이치를 알고 있었다. 확실히 많은 사람에게 알릴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내시들과 궁녀들 또한 당황하며 다급히 물러갔다.
입구의 맥덕만이 힐끗 살펴보았지만, 확실히 별일이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물러갔다. 여전히 심장이 다소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외부인이 없는 것을 확인한 란 귀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무지한 것들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가무군은 언짢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은 당연히 그렇지 않을 때였다. 정말로 기분이 상해 떠나버린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헛수고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무군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선생님, 과연 대인의 풍모가 있으시군요.”
란 귀비가 아부를 떨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진심은 담은 아부였다. 방금 눈앞의 벙어리가 긴급한 상황에서 얼마나 담담한지 보았기 때문이다. 그 풍모가 확실히 남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란 귀비는 가무군에게 더욱 믿음이 갔다. 확실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방금 소란 덕분에 란 귀비도 이전보다 냉정해질 수 있었다. 조금 전에는 너무 일찍 기뻐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일단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 진정을 시킨 후에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했다.
“선생님의 방법은 참으로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소평파가 승낙하겠습니까?”
가무군이 눈을 지긋이 뜨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원종의 등에 얹힌 손이 연달아 빠르게 움직였다.
“군주의 봉록을 먹는 신하는, 군주의 짐을 나눠서 져야 하는 법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계획이 그에게서 나왔고, 공주님을 지금의 처지에 처하게 했으니, 그 죄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주님의 시름을 덜어 드리고, 폐하를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그것은 황족을 모욕하는 것이며, 폐하의 권위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또 어찌 충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은 청백지신입니다. 또 청백지신이셔야 합니다. 그건절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 폐하께서 승낙하시면, 소평파가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소평파도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폐하를 위해 계책을 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공주님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폐하의 신임을 얻을 것이니, 소평파의 장래 또한 밝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계획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주님께서는 청백지신을 증명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며, 폐하는 공주님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으니 좋은 일이며, 소평파 또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니 좋은 일입니다. 심지어 폐하께서 허락하시면, 소평파가 이를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출세에 목이 마른 소평파가 어찌 폐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겠습니까? 진국에서 얻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면, 다른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정도로 초탈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조차 않았겠지요.”
“게다가 이 일은 마마께도 큰 이득이 되는 일입니다! 공주님이 명성을 되찾는 것이 어찌 공주님의 일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주님의 명성 회복은 당연히 마마의 위신 회복에도 도움이 됩니다. 게다가 지금 소평파는 황제의 신임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 소평파가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앞으로 권세가 크게 성할 것이고, 마마께 큰 힘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사위가 국가의 중신이니, 누가 감히 마마를 업신여기겠습니까?”
란 귀비의 두 눈이 번뜩였다. 마지막 그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후궁에서 지내며 그녀는 오랜 세월 권세를 잃은 후였다. 지금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천한 년들에게 자신이 짓밟히는 것이었다.
황궁에서 권세를 잃은 여인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 안에 있는 그녀가 가장 확실히 알았다. 여인이 여인을 상대할 때, 그 악독함은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란 귀비를 짓밟아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을 개돼지만도 못하게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들이 기르는 개에게조차 짓밟히는 처지가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렇다 해서 란 귀비가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이 동한다고 해도, 현실의 어려움은 직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