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6화. 들어올 자격이 없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관극태가 소매에서 서신을 하나 꺼내 풍관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걸 보아라, 연국 용친왕이, 남주의 상조종이 보낸 친필 서한이다. 우리 능소각에게 사람을 내놓으라는구나. 바로 너를 말이다!”
풍관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신을 받아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서신을 읽어 내려갈수록 얼굴이 굳어졌다.
상조종은 서신에 원강과 풍관아의 관계에 대해서 대놓고 밝히고 있었다. 서신에는 풍관아가 원강을 미혹해 나조를 돕게 했고, 이에 원강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위해 행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이후, 서신은 풍관아도 원강처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 마치고 있었다. 즉, 이 서신은 능소각에게 풍관아의 연금을 풀고, 그녀를 남주로 보내라는 의미였다.
다만 서신 말미에는 추가로 덧붙인 말이 있었다.
사실 그 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풍관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래서 만약 능소각이 풍관아를 풀어주지 않는다면, 그건 원강을 농락한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릴 농락한다면 남주는 천하에 풍관아와 원강의 관계를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서신을 모두 읽은 풍관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관극태가 물었다.
“서신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더냐? 너는 나조와 부부 사이일 때, 혹시 원강과 통정하였느냐?”
풍관아의 두 눈에 비통함이 어렸다. 하지만 그녀는 납치당했다고 변명하지도, 누군가가 약을 탔다고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건 제 일이에요.”
관극태가 분노했다.
“이걸 너 혼자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네가 누구의 돌봄을 받았는지 모른단 말이냐? 네 조부가 누구인지 생각해보아라. 네 조부는 능소각의 전임 장문인이다. 네가 이처럼 추잡스러운 짓을 벌였으니, 만약 남주가 이 일을 공개한다면, 우리 능소각의 체면이 어찌 되겠느냐? 만약 너를 처벌하지 않으면, 능소각의 풍문이 어찌 되겠느냐?”
풍관아는 매우 수치스럽다는 듯, 분노하며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능소각이 저를 오랫동안 키워주셨으니, 저를 처벌한다 해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극태는 크게 분노했지만, 풍관아를 어쩌지 못한 채 소매를 한번 휘젓고는 그곳을 떠나갔다.
한 장로가 풍관아에게 다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관아야, 정말 나조를 돕고 싶은 것이냐?”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에게 빚을 진 것이에요.”
“하아,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 원강이 이미 나조를 도와 병력을 옮기게 도와주었다.”
“대체 그가 어떻게 도운 것이죠?”
“그에겐 사갈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그는 무변사막을 넘어 제국으로…….”
장로가 지금 상황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사갈을 이용해서? 풍관아가 멈칫했다. 원강에게 그런 능력이?
장로가 다시 당부했다.
“원강은 상조종의 수하라 할 수 있다. 이제 상조종이 우리에게 엄포를 놓았으니, 일단 상조종이 명령을 내리면,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나조의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만약 정말 나조를 돕고 싶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네가 그리 고집을 부리니, 우리가 너를 어찌 막겠느냐. 능소각이 너를 키워주었으니, 너도 능소각의 체면을 생각해줄 수 있겠느냐?”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장로의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능소각은 더는 너를 어쩌지 못하겠다. 이처럼 네가 능소각을 업신여기니, 너를 능소각에 남겨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능소각이 너를 구속한다는 오해를 더는 받기가 힘들구나. 차라리 이곳에서 떠나거라.”
풍관아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떻게 떠나야 할까? 이대로 능소각이 그녀를 쫓아냈다고 할 순 없었다. 이 또한 능소각의 풍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결국, 그녀가 직접 글을 남겼다.
정자 안에서, 풍관아는 글을 다 적고 붓을 내려놓으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녀가 적은 글은, 그녀가 직접 능소각을 벗어났다는 내용의 문서였다. 자신은 자신의 영욕과 행복을 위해 미안하지만 능소각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며, 이제 앞으로 그녀의 생사, 화복과 영욕은 능소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능소각의 잘못은 거기에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그녀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택한 것이라 적혀 있었으니,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능소각에게 영향이 미치진 않을 것이었다. 이젠 원강과의 일이 밝혀진다 한들, 풍관아가 홀로 떠안아야할 일이었다.
그녀의 지장이 찍힌 문서를 받아든 한 장로는 다른 장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자가 풍관아를 보며 말했다.
“능소각은 네게 인의를 다했다.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하든 능소각은 신경 쓰지 않겠다. 앞으로는 스스로 살길을 도모하거라.”
두 장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받아내고는 별말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갔다. 장로들은 이 문서를 종문에 가지고 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이건 풍관아가 알아서 능소각과 인연을 끊겠다고 한 것이었다!
정자 안에 있는 풍관아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물론, 이런 서신을 적은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았다. 사실 능소각의 잘못은 정말로 이 서신처럼,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은 기막힌 운명의 장난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고, 그 운명을 풍관아가 택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운명에 의해 바람처럼 휘날리게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
사실 능소각은 진작부터 그녀에게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나조가 있을 때조차도 능소각은 이미 부부에게 크게 분노했었다.
능소각이 목 씨 황권을 뒤엎을 때, 나조 이 개자식은 감히 목탁의 편에 섰다. 목탁이 죽고 나서도 뉘우치지 않았다. 또 풍관아는 그런 나조 편에 섰다. 저들 부부가 가진 모든 것이 누구의 도움으로 얻은 것인지도 모두 잊어버렸다.
덕분에 나중에 이익분배를 할 때, 혈신전과 열천궁이 그걸 가지고 딴지를 걸었고, 덕분에 능소각은 이익에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풍관아의 신분과 배경 때문에 그녀를 어쩌지 못한 것이다.
그 후에 오공령이 나조를 죽이고자 했고, 혈신전과 열천궁도 나조를 죽이고자 했다. 그 누가 다른 마음을 가진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그때조차도 능소각이 그 목숨을 구해주었다.
결국, 어찌 되었는가. 능소각이 나서서 지켜낸 나조가 송국에서 도망친 후에, 후진을 위해 싸우게 되었고, 능소각이 얼마나 분노했던가!
그 일은 혈신전과 열천궁이 수시로 언급하는 능소각의 약점이 되었다. 덕분에 능소각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고, 능소각 내부에서도 불만이 팽배했다. 그런데도 풍관아의 출신 배경이 있기 때문에 계속 참을 수밖에 없었다. 능소각의 고위층들은 풍관아를 함부로 대해 좋지 않은 오명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풍관아가 스스로 더러운 짓을 했다.
가무군은 남주에게 이번 일의 진실을 밝히고 사람을 요구하라고만 했다. 그저 능소각에게 귀찮은 짐을 벗어버릴 빌미를 제공하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단호와 오삼양이 내원에 들어가 정자에 다가갔다. 단호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풍 소저, 저희와 가시지요.”
풍관아는 그들을 한번 돌아보고는 그저 눈물을 흘릴 뿐 무시했다.
단호와 오삼양은 서로 눈빛을 한번 교환하고는 그대로 정자 안으로 들어가 좌우에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갔다.
풍관아가 깜짝 놀라 발버둥 치며 말했다.
“이게 뭐 하는 거죠? 나는 원강과 일이 성사된 후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그녀는 초려산장에 머물렀었기 때문에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풍관아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풍관아와 원강의 약속은 이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남주에서는 그저 능소각의 허락을 맡게 되면, 둘에게 풍관아를 데려오라고만 했다.
둘은 풍관아를 저택 앞으로 데려가 그대로 날짐승에 올라탔다. 그들을 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풍관아는 두 사람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산과 강을 건너 하루가 지나기 전에 단호와 오삼양은 임무를 완수했다. 이들은 순조롭게 남주부성의 초려별원으로 풍관아를 데려왔다.
관방의에게 사람을 인계한 후에 두 사람은 바로 그곳을 떠났다. 초려별원의 한 거처에서 금제가 풀린 풍관아는 크게 분노했다.
“당신들은 지금 사람을 납치한…….”
그렇게 크게 분노한 풍관아는 끝없이 나불거리며,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풍관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관방의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듣고만 있었다.
잠시 후, 운희가 찾아왔다. 그 뒤에 그녀를 따라 들어온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왕소였다. 우유도는 풍관아의 분노한 말들을 들은 후,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입 닥쳐라!”
풍관아가 돌아보더니 분노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누구죠?”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지금 원강이 너를 위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네년의 전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네년은 감히 여기서 화풀이를 하고 있느냐? 네년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느냐?”
목숨을 걸어? 풍관아가 다소 동요하며 말했다.
“저는 도와달라고 했지, 목숨을 걸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는 설마 원강이 사갈을 이용해 후진의 병력을 제국으로 나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풍관아는 살짝 자신감 없는 말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서요? 그게 큰 문제가 되나요?”
“멍청한 년 같으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단 말이냐? 그건 서병관을 제외한 새로운 통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병관이 중요한 핵심 통로일 수 있었던 것은, 진국과 제국, 위국 사이에 다닐 수 있는 길이 오직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강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각국이 동진하거나 서진할 때 통과할 수 있는 통로가 새로 생겨났다. 이를 진국이 두고 보겠느냐? 서병관만 지키면 안심할 수 있었는데, 새로운 통로가 생겼으니 진국이 분노하지 않겠느냐? 게다가 다른 통로와 달리, 이 통로는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죽이려 들지 않겠느냐? 한 사람을 죽여 나라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데, 그 짓을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결국, 누가 제국을 차지하든지 간에, 그 누구든지 간에, 언제든지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통로를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 네년의 나조를 도우려고, 원강은 목숨을 내던졌다. 네년 때문에 죽게 생겼다는 말이다. 그러니 네가 여기서 소란을 피울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이냐? 만약 원강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너는 여기 안에 들어올 자격조차 없었다! 이곳은 개나 소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풍관아는 드디어 진실을 깨닫고는 넋을 잃었다.
“개 같은 년! 그 안에서 고분고분 조용히 지내야 할 것이다.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운다면, 돼지우리에 처넣어버릴 것이다!”
우유도는 그 말을 남기고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