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화. 필사(必死)!
해가 졌다. 영왕 호진이 왕부로 돌아왔다. 소유아가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그와 같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야, 십칠 황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현미도 죽었고요. 무심 선생님은 효월각에 붙잡혀 갔다면서요?”
호진은 걸어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이 정말 빠른 것 같소. 맞소.”
확인했다. 소유아는 고민이 많았다. 자신과 무심의 과거에 대한 고민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심이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혹시라도 고문을 받는 와중에 그녀와의 과거 일을 발설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그녀에겐 이미 가족이 있었다. 호진은 그녀를 정말 잘 대해주었고, 괜찮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갑작스럽게 뒤집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왕야, 무심 선생님께서는 어쨌든 왕야의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에요.”
소유아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호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서더니 그가 물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오?”
소유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리를 따진다면, 그분을 모른 척해서는 안 돼요!”
호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아, 내가 그 이치를 모르겠소. 소식을 듣고 바로 상소를 올렸소. 난 부황께 말씀드리길, 부디 이번 일에 손을 써주시길 간청했소. 아마 다른 황족들도 그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우선은 그에게 빚진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음으로는 부황의 눈에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다들 그건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오. 이런 일은 우리가 간청한다고 소용이 있는 것이 아니오. 사실 다들 열일곱째와 현미가 어찌 된 것인지 알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이번 일이 공개적으로 공표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먼저 언급하지 않으려 할 것이오. 그것이 금기를 범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오. 효월각이 제경에서 손을 썼지만, 성 안에 어떠한 소란도 없었소. 황궁의 묵인 없이 가능하겠소? 그러니 누가 나서서 이 부끄러운 천을 거둬 내려 하겠소?”
“황궁이 어째서 묵인했겠소? 당신도 알겠지만, 지금은 후진국과 힘을 합쳐야 할 때요. 대국이 중요한 것이오. 누군가 개인의 감정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유아, 당신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오. 다만, 이번 일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려운 상황은 아닐 수도 있소. 어쨌든 무심 선생은 귀의의 제자요. 아마 귀의도 그냥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오. 또 한 가지, 지금 전세가 우리에게 불리하오. 나라를 지키지 못한다면, 사람을 어찌 지킨단 말이오? 지금은 다사다난한 시기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침묵을 지키시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소유아의 얼굴에는 침울함과 무력함이 가득했다.
* * *
“현미가 죽었다고?”
한창 공사 중인 곳, 태학이 들어설 곳이었다. 일하는 일꾼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소평파는 소식을 듣고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빨리…. 하지만 서문청공을 죽이지 않았군. 현미는 죽었고 말이야. 원래라면 효월각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어!”
“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모릅니다. 지금 알 수 있는 소식은 이게 다입니다.”
소평파가 탄식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현미는 말이다. 내정의 고수였다. 지금껏 적지 않은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지. 하지만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군. 그녀가 이런 횡액을 당하리라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녀가 위국이라는 부유한 나라에서 자란 것과 연관이 있겠지.”
이것이 바로 소평파가 과거 위국에 의탁하지 않은 원인 중 하나였다. 위국은 너무 풍요로웠고, 그에 비해 국력은 다소 불안정했다. 당연히 침략당하기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위국이 지금까지 그 풍요로움을 유지한 것에는 그녀의 공을 부정할 수 없으니, 여자 중에서는 불세출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위국 백성은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전쟁이 위국을 휩쓸고 지나갔고, 백성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바쁠 터….”
“백성은 쉽게 잊는 존재들이다. 눈앞의 평온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지. 그러니 현미의 대단함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그녀는 별다른 야심조차 없었다. 그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올라섰을 뿐이다. 사실 진작에 손을 놓았어야 했다. 계속 뒤에서 위국을 도운 것이 오히려 동생을 망쳤구나.”
“공과는 후인들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 한 시대의 여걸이 과거가 되었구나!”
소평파가 뒷짐을 지고 담담히 말하는 모습을 보고, 소삼성은 소평파가 감개무량해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소삼성이 조심스럽게 당부했다.
“공자님, 서문청공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금단방 제일의 고수입니다! 대공자 옆에 믿을만한 호위가 부족합니다. 마침 그가 지금 위험한 지경에 처해있으니, 만약 지금 그를 구한다면….”
소평파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는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위국이 멸망한 것이 나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그가 내게 원한을 품지 않은 것만 해도 이미 감지덕지한 상황이다. 그가 내게 고마움을 표할 일은 꿈도 꾸지 말아라. 그와 같은 사람의 성격으로는, 이런 풍운에 뛰어들지 말았어야 했다. 그 경지가 아무리 높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냐. 그자는 이미 끝났다. 결국은 스스로 죽음으로 향하게 될 것이니, 누구도 그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유아 쪽이 걱정되는구나. 그 무심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말이다. 귀의가 나서서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 * *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송국 승상부의 아담한 거처,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위충이 가무군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제경에서 들려온 소식을 전해 들었다. 현미가 죽었다. 덩달아 서문청공 또한 위험에 처해있었다.
가무군은 그런 위충을 보고서는, ‘필사(必死)’라는 두 글자를 써서 위충에게 보여주었다. 그 뜻을 위충이 어찌 모를까. 서문청공이 반드시 죽을 테니,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포기할 위충이 아니었다. 위충은 그 글자를 보고서도 여전히 가무군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금 위충은 가무군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가무군은 송국의 힘을 동원할 수 있었다. 상청종의 실력으로는 효월각에서 사람을 구해낼 수 없었다.
또한, 위충은 가무군에게 왜 이 같은 것을 애원하는지, 그 이유도 다 말해주었다. 그와 서문청공은 천도비경 안에서 한동안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당시 위충은 서문청공의 돌봄을 받았고, 서문청공은 그를 선대했다. 심지어 그의 말 더듬는 습관까지 고쳐주었다. 천도비경을 떠난 후에도 천도비경의 인연 때문에, 위국에서 서문청공은 위충을 줄곧 돌보아 주었다.
대놓고 말하자면, 위충은 서문청공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러니 위충 같은 성격을 지닌 자가, 서문청공이 비참하게 죽는 것을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부터 말을 할 수 없는 가무군은 더욱더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한편에 있는 원종과 눈빛을 교환할 뿐이었다.
* * *
한편, 상청종도 이미 송국에서 자리를 잡고 문파를 재건하고 있었다.
대형 토목공사가 진행되는 곳 근처,
상청종의 고위층들이 둘러앉았다. 그들도 현미의 부고를 들은 후, 다들 탄식을 내뱉었다.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현미는 상청종을 오랫동안 돌보아 주었고, 그런 현미가 지금 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니,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또한 상청종은 그런 현미를 돕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했다. 늦지 않게 현미의 곁을 떠난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있을 때까지 현미의 곁에 머물렀다면, 상청종은 효월각과 대립하게 됐을 것이고, 큰 횡액을 당했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
당희는 홀로 산 중턱 높은 곳에 서서 침울한 얼굴을 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 * *
밀실 내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우유도가 팔찌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옆으로 반쯤 누워 한 손으로 팔찌를 들고 빤히 바라보았다.
운희가 말했다.
“팔찌 안에 뭔가가 있어.”
“알고 있어요.”
우유도가 대답하고는 다시 빤히 팔찌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팔찌 외에 다른 말은 없던가요?”
“곽만은 어떠한 추가 서신도 같이 보내오지 않았어. 그건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다만 곽만이 이 물건을 전달할 때 매우 다급했다고 해, 그 후에 바로 효월각에 붙잡혀 갔지.”
“마침 현미가 죽었을 때군요. 현미가 그 안에서 죽었고, 이 팔찌는 어떻게 보아도 연인의 물건이에요. 그리고 이 세공을 보세요. 분명 보통사람이 할 만한 물건이 아니지요. 위국 황족의 문양도 있어요. 이 물건은 아마 현미가 생전에 몸에 지니고 있던 장신구였을 가능성이 커요.”
“곽만이 다급하게 이걸 전하고, 효월각의 사람들이 그녀를 잡아갔지요. 그렇게 보면 이 물건이 바로 효월각이 원하는 물건일 수 있어요.”
“네 말을 들으니까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현미의 유품이 제 손에 들어왔지요. 이 팔찌가 그녀의 손에 도대체 몇 년 동안 걸려있었을까요? 어째 느낌이 이상하군요.”
“네 손에 들어온 이유도, 네가 사전에 안배했기 때문이잖아. 정말 손이 길기도 하지. 귀의의 제자 옆에 사람을 심어 놓다니.”
그녀도 원강의 일을 인계받고 나서야, 귀의의 제자가 세상에 나타나자마자 우유도에게 감시당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옆에 있는 유일한 심복인 여인 곽만이 우유도의 사람이라니. 안보여도 곽만보다 늦게 무심을 따르고 있었다.
원강의 일을 인계받고 나서야, 무심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우유도의 손바닥 안에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심이 뭘 하려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심지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이라도 단서가 있다면, 우유도는 사전에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일전에 곽만이 보내온 소식을 봤었다. 당시 무심이 갑자기 그 가짜 우유도가 어딜 갔는지 아느냐고 물어왔다고 했다.
운희는 그제야 우유도가 성경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우유도는 무심의 성형 의술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유도는 자신의 사망 소식이 들리자마자, 가짜 우유도는 초려별원의 사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고 답장을 했다. 그러면서 곽만에게 말하길, 진짜와 가짜가 모두 죽었으니, 성경과 얽힐 일이 없다고 진정시켰다. 또 무심도 감히 그 일을 깊게 파고들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한 가지 강조한 것은, 무심이 그 일을 그냥 잊어버리면 모를까, 일단 파고들 기미가 보이면 그 즉시 상부에 보고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무심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운희는 무심의 목숨이 사실은 줄곧 우유도의 손에 쥐어져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리미리 대비했던 것일 뿐입니다.”
이때, 갑자기 우유도가 몸을 일으켜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팔찌를 눈에 가까이 대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언가를 찾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