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4화. 천생연분
연못이 보이는 경치를 감상하던 소평파가 힐끔 옆을 흘겨보고는 말했다.
“담력이 있다고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이 모든 건 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것으로는 대인을 죽음으로 몰 수 없을 것이니, 대인께서 원하지 않으셨다면 오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강요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소평파는 대신 말을 하는 원종을 한번 바라보더니 물었다.
“저를 죽이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진국 사신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하셨습니다. 제가 어찌 선생님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이왕 왔으니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째서 과거에 저를 해치려 하셨습니까?”
“대인을 시험하려고 일부러 한 일입니다! 만약 대인께서 그런 사소한 일도 이겨내지 못하고 죽으셨다면, 어찌 지금 여기에 서 계실 자격이 있었겠습니까. 또 저와 천하를 논할 자격도 없으셨을 겁니다.”
소평파의 두 눈이 번득였다. 가무군의 의도를 알아들은 소평파가 눈을 살짝 치켜뜨며 말했다.
“천하를 논한다고요?”
가무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서 북주에 계실 때부터 지켜보았습니다. 설마 대인께서 품고 계신 웅심(雄心)이 겨우 일개 서생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소평파는 가타부타 뭐라 하지 않고 다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서생이 결코 천하다 생각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대체 천하에 대해 논할 것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구성이 쓰러지지 않으면, 태평천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가무군의 그 한마디는 그야말로 놀라운 말이었다. 소평파는 매우 놀라며 돌연 가무군을 돌아보며 위아래로 훑더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입니까?”
가무군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 천하에서 호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인과 저뿐입니다! 만약 저희 둘이 손을 잡는다면,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평파는 내심 매우 놀랐다.
“당신 같은 일개 범부가 감히 구성과 대립하겠다는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 선생님은 줄곧 야심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런 웅심을 품게 되신 겁니까?”
가무군이 입을 열어 자신의 잘려나간 혀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시 원종의 등에 글을 적었다.
“이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대인께서 홀로 분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혀가 뽑힌 원한! 소평파는 두 눈을 번득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어찌 돕겠다는 말씀입니까?”
“추후, 대인께서 만약 송국을 취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가무군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소평파는 마음이 크게 동했지만, 겉으로는 냉소 지었다.
“겨우 그 정도 능력으로 구성과 대립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최선을 다해 시도해 보지 않고, 어찌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선생님과 제가 손을 잡는다면,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소평파가 가무군을 떠보았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대인 배후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표묘각의 사람 말입니다.”
소평파의 가슴이 철렁했다.
“표묘각의 사람이라니요? 선생님께서 쓸데없는 추측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재미없습니다. 설마 서신으로 보낸 내용을 공표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지금 저를 위협하시는 겁니까?”
“위협이 아닙니다. 저는 천하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구성을 쓰러뜨리고 싶을 뿐입니다. 대인 배후에 있는 사람은 분명 표묘각에서 지위가 낮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를 이용해 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소평파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누구를 말입니까?”
“전 조국 대내총관 제갈지입니다. 그는 원영기 수행자입니다. 구성이 이미 그물망을 쳐 놓았으니, 그는 언제든지 잡혀들어갈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갈지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입니다.
“원영기 수행자?”
소평파가 깜짝 놀랐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무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었다.
“그 사실을 어찌 아셨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수행계에서 세력을 일궈왔습니다. 아마 대인이 생각하는 것을 아득히 초월하는 세력일 것입니다.”
대신 말을 하고 있는 원종은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누각을 향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바로 우유도였다.
역용한 우유도는 누각 위에 서서 연못 곁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남장을 한 운희가 누각을 올랐다. 그녀는 난간에 있는 우유도 곁에 다가가더니 우유도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보고는 담담히 물었다.
“소평파가 승낙할까?”
“가무군이 보여준 능력은 바로 소평파가 원하는 거예요. 만약 그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다면, 그가 안심하고 자기 일을 할 수 있도록 뒤를 봐준다면, 소평파는 이 제안에 유혹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우리가 그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데, 심지어 그의 배후에 있는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게 도와주기까지 한다는데, 그처럼 수많은 이점을 가진 일을 승낙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다면 큰일을 이룰 수있으니, 아마 의견일치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예요.”
“소평파가 가무군을 믿을까?”
“믿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런 사람이 누군가를 쉽게 믿는 걸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요. 다만 소평파가 안심할 수 있게만 해준다면, 그걸로도 충분해요. 그렇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간단하지요. 가무군이 어떤 일에 개입했는지 그에게 알리면 돼요. 그러면 소평파는 가무군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 테니, 안심하게 되겠지요.”
“자신이 가무군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소평파는 가무군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고 믿게 될 거예요. 그렇게 안전한 상황에서 소평파가 가무군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끌리지 않을 수 없지요. 소평파는 가무군과 협조할 거예요. 잊지 마세요. 가무군은 표묘각의 사람을 죽였어요. 그리고 사실 제가 말한 것들이 진실이기도 하지요. 가무군은 소평파를 팔아넘기지 못할 거에요.”
운희가 냉소 지었다.
“한 사람은 표묘각 몰래 표묘각 내부인과 내통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드러낼 수 없지. 또 한 사람은 표묘각의 사람을 죽였으니 마찬가지로 그 사실을 드러낼 수 없고 말이야. 그야말로 ‘천생연분’인 두 사람이군.”
운희가 뒤돌아 우유도를 보고 말했다.
“지금까지 소평파를 꺼리지 않았어? 그에게 이처럼 큰 약점을 쥐여주어도 괜찮겠어?”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소평파가 알게 되었을 때, 제가 그 정도 약점을 신경이나 쓸 것 같나요? 이미 인간계에서 필요한 준비는 끝났어요. 소평파가 제 적수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제가 필요로 하니, 저자를 들어 쓰는 것이지요. 그뿐이에요. 그는 바둑판을 벗어날 자격이 없어요. 벗어나면 그건 곧 죽음을 의미하지요!”
* * *
자부의 연회는 아주 성대했다. 주빈이 같이 즐긴 후에, 소평파는 부인과 같이 작별을 고했다.
진국 사신관으로 돌아가는 도중,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태숙환아는 남편의 안색이 이상할 정도로 무거운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소평파가 태숙환아의 옥수를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같은 시각 자부의 깊숙한 곳,
손님을 배웅한 가무군은 자신이 대화할 때 사용하는 판자를 돌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는 우유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원종의 등에 손을 들어 글을 적어나갔다.
다만 원종은 바로 입을 열지 않고, ‘큼큼’하는 헛기침을 먼저 내뱉었다.
앉아있던 우유도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원종이 있는 것을 보고는, 찔리는 마음에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운희와 가무군은 그 모습을 보고 다소 놀랐다. 이 장면이 참으로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제야 원종이 입을 열었다.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소평파는 이미 저와 손을 잡기로 약속했습니다.”
우유도가 미소지었다.
“사소한 일이니, 선생님께서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예상했던 일입니다.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제가 오래 머무를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전 돌아가서 선생님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유도는 포권을 했다. 그 방향이 원종에게 많이 치우쳐져 있었다. 그리고는 배웅할 필요 없다고 손짓했다.
우유도는 뒤돌아 그대로 운희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위충의 곁을 지나갈 때 그를 한번 돌아보았을 뿐, 처음부터 끝까지 위충과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가무군의 눈빛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사실 그가 소평파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소평파에게 시킨 일을 돌아보면서, 가무군은 남주 쪽이 이미 성경과 싸우고 있음을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겨우 남주를 가지고, 그 정도의 능력과 수완을 발휘할 수 있다니, 가무군은 감히 믿을 수 없었다…….
우유도가 남주로 돌아갔다.
반면, 소평파는 급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송경에서 며칠을 더 머물며, 몇 번이나 대학자 방장거를 방문했다.
방장거는 소평파의 요청을 거절했다. 소평파는 그 어미와 형제를 죽인 적이 있어 부덕한 사람이니, 따르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악명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소평파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를 방문했다.
결국, 가무군이 나섰다. 송국 승상의 힘은 방장거가 감히 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방장거가 대학자이기는 했지만, 무욕한 성인은 아니었다. 가족의 생활이 걸려 있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 * *
진경,
집으로 돌아온 소평파는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도 앞에 서서 무변사막의 한 위치를 가늠해 본 후에 벽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서재 밖에 걸려 있는 방울이 울렸다.
곧 소삼성이 성큼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어떤 분부가 있으십니까?”
“지배인에게 전해라, 그에게 사흘 후, 오후, 성 남쪽 십이 리 밖에 있는 낭호(狼湖) 중앙에 있는 섬에서 만나자고 말이다. 만약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도 전해라!”
소삼성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소평파의 의지가 굳건한 것을 보고는 명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계획대로, 사흘 후,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
변장한 소평파가 성 남쪽 십이 리 밖에 있는 호숫가에 나타났다. 소평파는 단 한 사람의 호위만을 대동하고 있었다.
호숫가에 있는 한 어부를 찾아, 소평파는 어부에게 돈을 쥐여주고 홀로 고깃배에 올랐다. 호위를 호숫가에 남긴 소평파는 어부가 모는 고깃배를 타고 천천히 호수 중앙에 있는 섬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