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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663화 (762/1,000)

1663화. 남명의 의탁

진경.

남명이 도착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숨어 지켜보기만 하기를 한참, 주변을 주의 깊게 관찰한 남명은 망설임 끝에 결국은 소평파를 찾아가기로 했다.

남명은 옷을 갈아입었고, 전처럼 소삼성이 소평파의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 안에서 익숙한 두 사람이 만났다.

소평파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포권을 했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오셔서 멀리 마중 나가지 못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남명은 그를 힐끗 바라보고는 서탁을 돌아, 평소 소평파가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서탁 위에 아직 먹이 다 마르지 않은 문서들을 확인하더니, 다시 서탁 위에 던져 놓았다.

그 후, 남명은 서탁 위 붓걸이에 걸린 붓을 들고 한참을 또 살펴보았다.

소평파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즉각 서탁 앞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분부가 있으시기에 이렇게 찾아오셨습니까?”

툭-

남명은 다시 서탁 위에 붓을 던졌다. 붓에 묻은 먹물은 서탁을 더럽혔다. 그러나 남명은 천연덕스레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입을 열었다.

“내가 널 찾아온 건 네게 의탁하기 위해서다. 나를 위해 적당히 숨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줘야겠다.”

멈칫하던 소평파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게 의탁한다니요? 장난이 심하십니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그냥 하셔도 됩니다. 주의 깊게 경청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명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내가 제갈지와 만난 일이 들통났다. 더는 무변각에 머물 수 없고, 당장 다른 곳에 가도 되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너한테 올 수밖에 없었고, 이건 제갈지의 뜻이기도 하다.”

“들통나다니요? 제갈지와 만남은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또 제갈지의 뜻이라니요?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평파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얼마나 더 확실히 설명해야 한단 말이냐? 네 머리가 그 정도로 형편없단 말이더냐?”

소평파는 손사래를 치며 설명했다.

“정말 이해가 안 가서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남명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다.

“제갈지 그 자라 새끼가 감시당하는 줄도 모르고 날 찾아왔다.”

그는 곧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소평파는 들으면 들을수록 눈이 커지더니 다 들은 후엔 안색이 급변했다. 그리고 조급하게 물었다.

“그럼 당장이라도 숨어야지 여긴 왜 온 겁니까?”

남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예전에는 내게 좀 와달라고 그리 빌더니, 이제는 나를 쫓아내려는 것이냐, 아니면 토사구팽하려는 것이냐?”

쾅!

그대로 서탁을 치며 일어난 남명이 소평파의 멱살을 잡아챘다.

“만약 네가 내 신분을 저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내가 지금 이 지경에 처할 일도 없었겠지? 잘 들어라. 내가 죽으면, 너도 도망칠 수 없을 거다.”

소평파는 잠시 발버둥 치더니 두 손으로 남명의 손을 떼려고 해보았다. 하지만 힘이 모자라 떼어내지 못하고, 결국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소평파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오해하셨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건 확인하셨습니까? 확신이 없는 상황에 여길 찾아오신다면 우리 모두 끝장입니다!”

“흥! 그건 걱정할 것 없다. 확실히 확인한 후에야 여길 찾아왔다.”

남명이 냉소를 치며 그를 밀치곤, 뒷짐을 지고 서재를 서성였다.

뒤이어 소평파가 물었다.

“우리가 연락한 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부리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너와 연락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설사 알고 있다 해도 다들 나와 한배를 탄 사람들이지. 비밀을 지키진 못할망정, 입을 나불거릴 사람은 없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소평파는 비로소 안심했다.

이내 소평파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서탁을 돌아 방금 남명이 앉았던 곳에 앉았다. 한참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하던 그가 갑자기 탁자를 내리치며 이를 갈았다.

쾅!

“우리가 당했습니다!”

느긋하게 서성이던 남명이 멈칫하더니 즉각 서탁으로 다가갔다. 방금 전과 비교해 자리만 바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무슨 뜻이냐?”

소평파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우리와 연합한 저쪽의 계략에 걸려들었습니다. 제갈지는 고의로 자신을 노출한 것입니다!”

남명이 두 손을 서탁 위에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저쪽? 제갈지가 속한 그쪽 말이냐?”

“그들 말고 누가 제갈지를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남명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네 오해일 거다.”

소평파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쪽에서 백천곡의 제자를 붙잡았다. 고문을 통해 진실을 들었지, 아마 제갈지 쪽과는 무관할 것이다.”

‘또 뭐라고…….’

소평파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남 대각주님, 머리를 좀 쓰실 수 없으십니까? 제갈지가 각주님께 의탁하러 가다니요. 또 무변각에 비호를 부탁하다니요. 그게 말이나 됩니까?

저쪽에서 한발 먼저 제갈지를 빼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 그를 다시 돌려준단 말입니까?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만약 저쪽에서 수작을 부리려 했다면 누군가 제갈지의 흔적을 발견하게 하는 방법은 널렸습니다. 폭로할 생각만 있다면 그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속아 넘어가고도,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다니. 소평파는 남명이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도림이 지켜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진작 누군가에게 목숨을 잃었을 게 뻔했다.

겨우 이 정도 머리로 암중에 표묘각에서 수작을 부렸다니. 이런 사람과 손을 잡고 일을 진행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양손을 서탁에 올린 남명은 정신이 멍해졌다. 하지만 곧 뭔가를 깨달은 그가 이를 드러내고 흉악한 얼굴로 분노를 토해냈다.

“개자식, 감히 나를 물 먹여!”

소평파는 창밖을 한번 보곤 손을 들어 그에게 경고했다.

“조용히 하십시오.”

남명도 창밖을 한번 보고는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그들이 누구란 말이냐. 말해 보거라!”

솔직히 남명이 그의 손에 들어온 지금 상황에 소평파는 순순히 알려줄 리가 있겠는가. 소평파는 급히 변명을 늘어놓았다.

“선생님은 지금 한참 격노하신 상황입니다. 정말 그들을 찾아간다면 죽음을 자초하는 겁니다. 지금 알려드리지 않는 건 다 선생님을 위해서입니다. 일단 냉정함을 되찾으시고, 진정하신 후 다시 알려드려도 늦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 그래서 누구냐?”

소평파가 다시 손사래를 쳤다.

“일단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지금 선생님께 가장 중요한 건 숨을 곳입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선생님을 어디로 모시면 좋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남명은 화를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 당장 나를 이용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겠다!”

그러자 소평파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쳤습니까? 설마 지금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당신 아버지를 포함한 구성이, 당장 천하를 들쑤시며 당신을 찾으려 할 겁니다. 이쪽은 사방에 흑수대의 이목이 깔려 있으니,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혐의가 발견된다면 어떤 처지가 될지는 더 잘 아시겠지요. 일단 떠나십시오. 나중에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제야 남명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발길을 돌렸지만, 떠나기 전 한마디 하는 건 잊지 않았다.

“그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소매를 휘날리며 서재를 벗어났다.

남명이 문밖으로 사라진 후, 소평파의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얼간이 같으니!”

머지않아 소삼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돌아갔습니다. 대 공자님, 무슨 일 때문에 온 겁니까?”

“큰일이다. 남명이 무공 절반은 잃어버리고 비 맞은 개꼴이 되어 도망쳐 왔더구나. 우리가 함정에 빠졌다…….”

소평파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내 소삼성은 경악했다.

“가무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수단을 짐작하기 어려운 자다. 나도 그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구나. 이처럼 곤란한 보물덩어리를 내게 던져주다니,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그라고 무사하지 못할 것인데 말이다!”

소평파는 다소 화가 난 모습이었다.

이후 그는 소삼성을 시켜 가무군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가무군에게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이대로 파국을 맞이할 작정이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무군의 답장을 받고난 후, 남명을 안배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얼렁뚱땅 상대에게 놀아난다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것 같았다.

사실 연달아 가무군에게 손해를 보았다. 가무군은 자신을 치고 싶으면 치면서 한마디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더욱이 그 배후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뭐라 판단을 내릴 수조차 없었다. 그는 가무군의 행동이 살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 *

천남 성전 내부.

빠르게 안으로 뛰어 들어온 제자 청구(靑九)가 보고했다.

“사부님, 성경 출입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여덟 성존께서 연달아 성경을 나가셨다고 합니다.”

직접 표묘각의 비밀문서를 살펴보며 뭔가를 찾아보고 있던 남도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의문을 표했다.

“모두 성경을 떠났단 말이냐?”

청구가 조금 머뭇거리다 답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 전 얻은 소식에 따르면, 한국 3대 문파 중 한 곳인 백천곡의 표묘각 감찰 인원이 갑자기 인원 수백을 소집해 무변각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무슨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이번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도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변각? 어째서 일찍 보고하지 않았느냐?”

청구가 다소 긴장하며 말했다.

“사제는 무변각의 각주입니다. 무변각 일은 아무래도 사제가 직접 보고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습니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남도림이 말을 마쳤을 때 이미 신영은 대전 밖으로 쏘아져 가고 있었다.

* * *

무변각.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몰랐다. 무변각을 오가는 수행자들은 갑작스럽게 모든 움직임을 통제받았다. 다들 오직 무변각에 들어갈 수만 있을 뿐, 떠날 수는 없게 되었다.

무변각을 통제한 사람들은 이정법이 데려온 수백의 백천곡 제자들이었다.

당연히 백천곡의 제자들만으론 무변각을 통제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구성 중 한 명인 독무허가 그 뒷배가 되어 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독무허는 성경을 떠나 무변각에 도착했지만, 혼자 힘으론 무변각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혼자 너무 빨리 와버렸고, 그를 따르는 세력은 아직 무변각에 도착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금시를 통해 모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정법을 만났다. 이후, 독무허의 명을 받은 이정법은 무변각을 봉쇄해 아무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수백의 인원은 독무허의 이름을 내걸고 그의 이목이 되어 무변각을 통제했다. 무변각에 있는 사람 중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통제도 수월했다.

동시에 독무허는 이정법에게 안내를 시켰다.

가장 먼저론 제갈지가 묵었던 객실로 향했다.

문까지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당연히 제갈지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그곳에 지내고 있던 손님만 대경실색했다.

곧 독무허는 무변각의 내성에 들어가 남명을 찾았지만, 마찬가지로 남명도 사라진 상황이었다. 성경으로 떠났다는 말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독무허는 남명이 정말 성경으로 향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이정법에게 이곳의 각 대 문파 상점 지배인들을 불러 모아, 무변각에 대한 통제만 더 강화했을 따름이었다.

그 후, 나머지 일곱 성존이 하나둘 도착했다.

이들도 이젠 제갈지가 도망쳤고, 남명이 사라졌단 소식을 들었다.

남명이 떠난 시간을 확인한 그들은 즉시 성경 출입구에 있는 인원에게 연락을 취해, 남명이 성경으로 돌아갔는지 확인했다.

구성 중 팔인이 이곳에 있었다. 그 규모와 기세가 떡하니 펼쳐져 있는데, 과연 무변각에 있는 사람 중 그 누가 감히 경거망동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곳은 남도림의 영역이었다. 팔성이 두렵긴 해도 내성에 있던 인원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권리를 내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팔성은 그들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 팔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독무허 혼자라고 해도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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