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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672화 (771/1,000)

1672화. 은희 부인

누군가 태도를 마중 나와 성전 뒤편으로 안내했다. 나추는 마침 한 정자 안에서 제자 육지장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평소에 무표정하기만 하던 나추가 태도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태도는 대단한 능력은 없어도 본분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추는 다시 바둑판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태도(泰度)야, 무슨 일이길래 반드시 나를 봐야겠다고 한 것이냐?”

태도는 육지장을 한번 보고는 그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육 선생님, 잠시 자리를 비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던 육지장은 순간 멈칫하며 말문이 막혔다. 상당히 의외였다. 물론 태도가 대나성지에서 경력이 오래된 사람이기는 했지만,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추 앞이기에 육지장이 나추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나추도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 역시 육지장에게 눈짓을 주고 있었다.

이에 육지장은 바둑알을 내려놓고 일어나 태도를 스쳐가며, 자신도 모르게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앉아라.”

나추가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제가 어찌 감히!”

태도가 허리를 숙이며 완곡히 사양했다.

나추는 담담한 미소를 보였다.

“넌 오래도록 날 섬겼다. 외부인도 없으니, 법도에 얽매일 필요 없다.”

태도는 본분에 충실하고 별다른 야심이 없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나추를 섬겨온 사람이었다. 나추는 태도에게 비교적 관대했다. 심지어 평소엔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태도는 늘 겸허했다. 나추의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태도가 그래도 감히 앉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추도 더 강요하진 않았다.

“자, 이제 너와 나 둘뿐이구나.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태도(泰度)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존의 명에 따라 외부 순찰을 돌고 귀환하던 중,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부인을 만나 뵈었습니다.”

나추가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미처 반응을 보이지 못한 것이었다.

“부인? 어느 부인이기에 네가 그리 놀라워한단 말이냐?”

태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희 부인이십니다.”

나추의 동공이 빠르게 수축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태도 앞으로 다가가 그를 마주 보고 섰다.

“태도야,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소신도 이미 작고하신 부인을 뵌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건 부인이 소신을 통해 보내신 서신…….”

태도가 양손으로 서신을 올린 후, 허리를 굽힌 채 더 자세히 보고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은 서신에 고정돼 있었다. 법안으로 자세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그는 아직도 무량원에서 하마터면 큰 함정에 빠져 큰일을 당할 뻔한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윽고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나추가 서신을 펼쳤다.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를 꺼내니, 곧바로 지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황택사지의 지도였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종이 뒷장에 글자가 적힌 흔적을 발견했다. 종이를 뒤집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그곳에 적혀 있었다. 아주 익숙한 필적이었다.

서신의 내용을 모두 읽은 후, 나추는 입술을 오므리며 천천히 서신을 접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태도야. 또 두 사람이 부인을 봤다고 했느냐?”

“네, 바로 대전 밖에 있습니다. 소신이 그들을 여기까지 직접 데리고 왔으며 누구와 만나고 교류하는 것도 엄금했습니다.”

“잘했다. 그 두 사람은 여기 남겨둬라. 넌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 넌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잘 알 것이다. 이번 일은 잊어라. 난 어떤 유언비어도 듣고 싶지 않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거라.”

“알겠습니다!”

태도가 포권을 하고 몇 걸음 물러나더니, 완전히 뒤돌아 떠나갔다.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나추는 다시 서신을 펼쳤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는 다시 서신을 뒤집어 지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드디어 이 지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도는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나방비를 그곳으로 보내라고 한 지점이었다.

은희는 서신에 딸을 보고 싶으니, 나추에게 온정을 베풀어 딸을 볼 기회를 한 번만 달라고 적었다. 지도에 적힌 곳에서 딸을 기다릴 것이라며, 만나고자 하는 시간이 적혀 있었다.

파사삭-

서신은 가루가 되었다. 나추의 호흡도 다소 거칠어졌다.

전에 그는 은희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만 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태도가 직접 목격하고, 은희의 필적도 확인했다.

은희는 과연 살아있는 것이 맞았다.

과거 은희의 수안만을 파냈다. 그때는 그렇게 하면 그녀가 죽을 줄 알았다. 그러므로 더는 손을 쓰지 않았다. 결국 그때 손을 독하게 쓰지 않아 이런 후환을 남긴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 이상, 그는 나방비에게 모친이 호족이란 사실을 알려줄 리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나머지 팔성에게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그럼 다른 문제가 생기거나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팔성은 분명 그에게 호족을 토벌하라고 압박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호족이 어디 마음만으로 토벌할 수 있던가.

일단 그 약점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들은 분명 끊임없이 그걸 가지고 유언비어를 만들어 낼 테니 후환도 끊임이 없을 터였다.

“은희야, 은희야. 어째서 나타난 것이냐!”

흉악한 얼굴의 나추가 홀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성전을 나선 태도는 두 수행원을 남겨두고 떠났다. 두 수행원을 그곳에 멀뚱히 남겨두고 혼자만 산을 내려간 것이었다.

태도의 마음에 서글픈 바람이 불었다. 두 수하의 결말이 훤히 보였다. 그도 가능하다면 그들을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추의 반응을 보고, 더더욱 비밀에 부치려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태도를 살려준 것만 해도 큰 은혜를 베푼 것이니, 더는 사정할 여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태도(泰度)의 추측대로 두 수하는 처리되었다. 두 사람은 까닭도 모른 채 죽었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보면 안 되는 사람을 봤기 때문이었다.

* * *

천도봉, 표묘각.

한 집사가 빠르게 대전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 악광명은 성경에 간 관계로 지금은 이 집사가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각주님, 만수문의 전서입니다!”

서탁에 앉아 머리가 빠지게 고민하던 곽공이 짜증 가득한 얼굴을 들었다. 이내 그는 냉소를 지었다.

“흐흐……. 만수문의 감찰 인원은 성경에 있지 않더냐? 만수문은 또 무슨 난리를 피우는 것이냐? 말해봐라, 또 뭘 찾았다더냐?”

집사가 다급히 말했다.

“감찰 일이 아닙니다. 접몽환계에서 성나찰의 흔적을 발견했답니다!”

“뭐라?”

곽공이 경악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집사는 다시 최대한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만수문이 접몽환계에서 성나찰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곽공은 상대의 손에서 서신을 빼앗듯이 가져왔다. 내용을 살피던 그가 희한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냉소를 보였다.

“정말 신기하군. 아직 혼란이 모자란다는 것인가 이건.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성나찰이 이런 시기에 나타나 한발 걸치다니. 그야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그렇다고 누군가 성나찰하고 붙어먹은 건 아닐 것 아니냐?”

곽공은 서신을 들고 한참 고민했다. 사실 그조차 성나찰이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또 식견을 넓힐 기회도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벗어날 수도 없이 수많은 일에 묶인 몸이었다.

“지금 당장 이 소식을 성경으로 보내라.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결국 곽공은 서신을 다시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 * *

천남성지 내부.

밀서를 받은 남도림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제자 청구는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밀서는 그가 가져온 것으로, 제국 현병종의 감찰 인원이 보내온 밀서였다.

현병종의 감찰 인원은 남도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성경 밖 감찰 인원이었다. 성경 안은 연국의 자금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현병종은 제갈지에게 밀고한 자의 윗선과 홍운법의 배후에 있던 윗선을 찾아냈다. 홍운법의 죽음도 남명과 연관된 것 같았다.

하지만 현병종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이대로 계속 파고 들어가도 되는지 다급히 밀서를 보내 확인하고자 한 것이었다.

진위는 알 수 없었으나 거짓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청구는 옆에서 조용히 탄식했다. 홍운법의 죽음도 남명의 짓이라니, 사부의 아들은 대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짓을 했단 말인가. 아마 부친을 화병으로 죽일 생각이었나? 친아들조차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로 인해 이들 제자의 처지가 더욱 난처해졌다. 누가 수작을 부린 건지, 최근 각 문파의 감찰 인원들은 다들 혁혁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 여파로 표묘각의 인심이 흉흉해지고 있었으나 현병종도 매우 곤란하던 참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익명으로 두 단서를 보냈다. 그 단서를 따라 조사해보니 남명에까지 닿았다. 이제는 진퇴양난이었다. 직접 보고해야만 했다.

“망할 놈!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

굳은 목소리로 일갈하던 남도림이 손에든 밀서를 구기며 물었다.

청구는 약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현병종에서도 주제를 알면,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도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단서를 파고들면 내 망할 아들놈을 찾을 수도 있단 말이냐?”

“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청구의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그도 도저히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사부는 남명이 다른 사람 손에 잡히게 놓아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직접 움직일 가능성까지 있었다.

간단한 이치였다. 최근 표묘각은 마치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체 같았다. 이 일도 오래 숨기지는 못할 것이었다. 심지어 이것도 현병종이 찾아낸 단서였다. 숨길 수 없다면, 반드시 조사해야 했다.

하지만 조사를 한다 해도 한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제갈지가 남명과 같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아무나 간다고 처리할 수 없었다. 즉, 구성 중 한 사람이 직접 움직여야 할지도 몰랐다.

전에 팔성이 남도림을 제외하고 움직인 선례가 있었다. 남도림은 두 번 다시 다른 사람이 개입하게 둘 리가 없었다. 설사 문호를 정리한다고 해도, 그건 남도림이 직접 해야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의 손에 잡혀 든다면, 말하면 안 되는 것을 발설할지 누가 알까. 최소한 붙잡힌 후에 남도림의 체면을 깎는 일은 없어야 했다.

죽더라도 깔끔히 죽어야 했다. 어쨌든 남도림의 아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죽기 싫어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이게 할 순 없었다. 그건 남도림의 치욕이었다.

“넌 집을 잘 보고 있거라. 내가 직접 움직여서 상황을 봐야겠다.”

남도림은 그대로 날아올랐다. 과연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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