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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689화 (788/1,000)

1689화. 신중해야 한다

황궁.

섭정왕 호홍은 대전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이고 있었다.

이쪽에선 이미 호연무한에게 전서를 보낸 뒤 답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호연무한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부황 호운도는 호연무한에게 어명을 내리지 않았다. 호연무한에게 호홍에게 양위한다는 어명을 내리려 하지 않은 것이다.

이로 인해 호홍은 크게 불안했다. 전에 3대 문파 장문인에게 한 말은, 누이 호청청이 호연가의 며느리라는 것을 들어 그들을 속인 것일 뿐이었다.

그저 쌀이 익어 밥이 되듯, 3대 문파에게 되돌릴 기회가 없길 바랐다.

호홍이 한 말은 사실과 아주 달랐다. 호연가는 줄곧 그와 거리를 유지했으니, 암중에 연락을 취하고 말 것도 없었다. 둘 사이엔 아무것도 없었다.

호홍은 호연무한이 병권을 쥐고 있기에, 지금 상황에서 그의 태도가 자신의 생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호연무한이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걸 반대한다면, 호홍은 나락으로 추락할 터였다.

호홍은 아직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 3대 문파가 그를 지지할 수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를 폐할 수도 있었다. 그리된 후에, 3대 문파를 속인 자신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홍은 미래를 예상하면서도 모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3대 문파는 다른 사람을 지지했을 테고, 연금당한 것도 자신이었을 터였다.

호홍이 황위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데 누가 황제가 되든 후환을 남길 이유가 있을까. 지금 호홍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도박을 하고 있었다. 쌀이 익어 밥이 된다면, 호연무한도 결국 대국을 고려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전하, 전하! 경사입니다. 경사입니다!”

그때, 한 한관이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호홍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경사더냐?”

환관이 환하게 웃었다.

“공주님께서, 공주님께서 출산하셨습니다! 호연가에 시집가신 공주님께서 호연가를 위해 여아를 낳으셨습니다!”

호홍은 멈칫하며 의문을 표했다.

“아직 예정일이 남아 있지 않더냐. 어째서 지금 출산했단 말이냐?”

환관이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호연가를 포위할 당시, 공주님께서 그곳을 포위한 병사들과 몇 마디 다투신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조산하셨습니다.”

“뭐라?”

호홍은 하마터면 혼이 날아갈 뻔했다. 지금 시기가 무슨 시기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호연무한에게 간청해야 하는 시기였다. 이런 때에 자신 때문에 호연무한의 손녀에게 문제라도 생긴다면, 또 그 때문에 호연무한이 분노한다면, 그 결과는 아주 끔찍할 것이 분명했다!

경사? 이게 무슨 경사란 말인가! 호홍은 그대로 환관을 연달아 걷어찼다.

“이 빌어먹을 것들, 누가 네놈들 보고 공주를 놀라게 하라 했느냐!”

환관은 비명을 토해냈다.

잠시 후, 겨우 진정한 호홍이 숨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조산한 아이는 어떻더냐?”

환관은 다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얼굴은 이미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호연가에서 외부인 출입을 막고 있어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겠습니다.”

호홍이 소리쳤다.

“빨리 당장 3대 문파의 법사들을 보내지 않고 뭐 하느냐! 본왕의 질녀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네놈을 능지처참할 것이다!”

지금 호연가의 수행자들은 모두 3대 문파 수행자들에 의해 강제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 있었다. 군에 대한 호연가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 호연가가 경기호위대군과 손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환관은 매우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짝!

따귀 소리가 울렸다.

황후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부여잡고 울었다.

보심에게 부축받고 있는 호운도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았다. 여인의 뺨을 때리는 것조차 힘겨울 지경이었다.

황후는 무릎을 꿇고 기어와 호운도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홍아도 이런 대역죄를 짓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3대 문파의 명을 거역할 수 없지 않습니까! 폐하. 홍아를 생각해 주세요. 제국의 천하를 생각해 주세요. 상장군께 어명을 내려주세요!”

아무리 찬란한 황위도 얼마든 빼앗을 수 있었다. 황제의 옥새도 마찬가지였다. 보심이 장악했던 교사대의 통제권조차 하룻밤 사이에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호운도에게 양위의 어명을 내리게 할 수 없었다. 호운도는 죽어도 따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호운도가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면, 결과는 다소 심각해질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이야 별로 큰 문제도 아니었다. 나중에 눈치 있는 사람들로 바꿔 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호연무한은 그렇지 않았다.

호연무한이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마음대로 바꿀 수가 없었다. 이런 시기에 호연무한을 건드린다면, 제국의 군심은 완전히 끝장날 터였다.

그래서 3대 문파의 장문인들까지 호운도 설득에 나섰다. 호연무한을 잘 다독일 수만 있다면 제국의 군심을 다독이고 상황도 계속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호운도는 절대 승낙하지 않았다. 3대 문파 장문인들도 설득하지 못했고, 호홍이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호홍은 차마 호운도를 만나러 올 배짱도 없었다. 그가 호운도를 찾아온다면, 오히려 호운도를 더 격노하게 할 뿐이었다.

결국 아들을 위해 황후가 나선 것이다. 아들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황후는 이제 제국의 황태후가 되는 것이었다. 더는 궁중 여인들과 총애를 다툴 필요가 없었다. 황제조차 그녀를 보며 인사를 올려야 했다.

황후에겐 다른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실패한다면 누가 그녀의 아들을 살려두겠는가. 일단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만약 호운도가 다시 황권을 장악하거나 혹시 다른 후계자가 황위에 오르면 황후는 폐후(廢后)가 될 터였다.

황후는 평생 후궁에서 총애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것이다. 그런 최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황후 역시 여태 보고 경험한 일이 있었다. 후궁 여인들이 타인을 음해하던 계략이 얼마나 지독하고 악독했던가. 생각만으로도 오한이 들 지경이었다.

그런 후궁의 삶도 버텨왔건만, 따귀쯤이야 무엇이 대수일까. 황제가 양위한다는 칙서만 내려준다면 10대, 100대도 달갑게 맞을 수 있었다.

본래 고통을 아는 자가 사람 위의 사람이 될 수 있는 법이었다.

“두렵더냐?”

호운도는 부축을 받으며 앙천대소했다. 비통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곧 격한 기침을 뱉어냈고 보심은 급히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덕분에 기침을 멈춘 호운도는 황후의 머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덕불배위(德不配位)라,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가 모반을 일으켰구나. 이제 좀 두렵더냐? 천한 것, 짐의 상장군이 너희를 어찌할지 궁금하더냐?”

황후는 가슴이 철렁했다. 전전긍긍한 마음에선 비통한 목소리가 흘렀다.

“폐하! 폐하, 대국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꺼져라!”

호운도가 그대로 황후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옆에서 호운도를 부축하고 있는 보심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길어지면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결국 밖에 있던 수행자들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다급히 황후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씩씩거리던 호운도는 보심의 부축을 받으며 다시 자리에 기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상장군에게 연락할 방법이 있느냐?”

보심은 난처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귓가에 조용히 답했다.

“폐하, 이미 이곳은 격리되었습니다. 한마디 말조차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만약 전하실 말씀이 있거든 소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궁중에 아직 소인의 사람이 있으니, 기회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운도가 잠시 침묵하더니, 결국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쓸모없는 일이야.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짐은 상장군을 붙잡아 두지 못할 것이다.”

보심은 깜짝 놀랐다.

“설마 상장군께서 폐하를 배신할 거란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족을 인질로 상장군을 협박할 것을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호운도가 중얼거렸다.

“상장군은 평생을 철혈의 군인으로 지냈다. 나라의 큰 기둥이었지. 그는 시산혈해를 뚫고 그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겨우 인질로 그를 어쩌진 못할 것이다. 겨우 가족 때문에 장병들을 사지로 밀어 넣을 사람도 아니고. 만약 저 역적들이 정말 그리한다면 그건 자기 발등을 찍는 멍청한 행동이 될 것이다. 호홍, 그 패륜아도, 3대 문파도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상장군이 폐하를 배신한단 말씀이십니까?”

호운도가 고개를 저었다.

“배신? 내가 전에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들과 청청을 혼인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상장군은 줄곧 황실과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어. 어떤 황자와도 가까이해 권력 분쟁에 이용당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는 결코 짐이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살인 도구가 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제국의 상장군이지, 한 개인의 상장군이 아니다. 누가 황제가 되든 그에겐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만약 지금같은 상황에 군을 일으켜 대항한다면 제국은 큰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보심도 깨달았다. 호연무한은 결국 대국을 위해 3대 문파의 결정에 따르리란 것을. 이는 즉, 호운도가 다시 황권을 장악할 길이 없다는 것과 같았다.

보심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 * *

“황후도 설득하지 못했다고?”

우문연의 물음에,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심지어 얻어맞아 다치기까지 했습니다.”

우문연은 곧 손짓으로 제자를 물렸다.

한쪽에선 한 서기가 드디어 호운도의 필적을 모방해 냈다. 입으로 살짝 불어 먹물을 말린 그는 곧 세 장문인에게 두 손으로 예를 갖춰 건넸다.

세 장문인은 돌아가면서 필적을 살펴보았다.

북현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과연 필적이 똑같군, 여기에 옥새를 찍으면 속여 넘길 수 있을 것이오.”

삼천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양위한다는 칙서는 일단 만약을 대비해 남겨 놓읍시다. 다만 전방에 있는 장로들이 호연무한을 설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우문연과 북현이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사실 양위한다는 칙서를 호운도가 직접 적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조정 대신들이 진짜라고 하면, 백성들도 당연히 진짜라고 여길 것이었다.

중요한 건 호연무한이었다. 아무리 칙서를 그럴듯하게 꾸민다고 해도, 호운도가 갑자기 양위하는 일이었다. 이런 큰일을 호연무한이 칙서 한 장에 쉽게 믿을 리는 없었다. 분명 진위를 확인하려 할 텐데,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과연 호연무한 휘하에 있는 첩보원들을 속일 수 있을까.

지금은 일단 전방에 있는 장로들이 호연무한을 설득하며 그 태도를 지켜보는 게 최선이었다. 호연무한이 정말로 호홍을 반대한다면, 이 칙서를 먼저 내리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사실 이들도 우선 호연무한의 태도를 물어보고 다시 결정 내리려 했지만, 생각은 금세 달라졌다. 물어본다면, 분명 동의하지 않을 터였다. 호연무한이 그리 쉽게 역신(逆臣)을 자처할 리가 없었다.

신중해야 했다. 일단 칙서를 내리고 나면 후회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수습하지 못해 상황이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이런 일은 절대 장난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생각으로 그려보긴 쉬워도 손을 쓰고 난 후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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