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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691화 (790/1,000)

1691화. 역적놈

다시 군막에 돌아온 사호는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는 호연무한을 보았다. 사호는 잠시 침묵하다 서탁 위에 찻물을 올리며 조용히 물었다.

“방금 저들이 계책을 묻지 않았습니까. 장군님 말씀처럼 황위를 미끼로 황자들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적과 싸우게 하는 그걸 실행할 수 있겠습니까?”

호연무한은 여전히 두 눈을 감고,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 어찌 한마음 한뜻이 되겠는가? 폐하께 충성하는 신하들이 목숨을 걸고, 각 황자들의 세력들이 분분히 일어나 목숨을 걸고, 조당도 안팎으로 목숨을 걸고, 제국의 모든 국민이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일심이지 않겠는가?

정말 아직도 그게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저들이 폐하를 이리 대했네. 일단 폐하께서 다시 권력을 잡으시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리 없지. 아마 가장 먼저 제 자식부터 해하실 걸세. 옥왕이 가장 먼저 죽게 될 것이야.

그러니 지금 옥왕을 지지하는 문무대신, 군중의 장수들, 그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어느 누가 폐하께서 다시 대권을 쥐는 것을 두고 보겠는가? 한마음 한뜻? 일단 호랑이가 우리에서 풀려난다면, 한마음 한뜻보다는 서로 물고 뜯는 모습부터 보게 되겠지.”

사호는 탄식했다. 확실히 그러했다. 나무는 이미 배가 되었고, 쏟아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호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장군께 그같이 좋은 계책이 있으면서 어찌 먼저 그 계책을 진상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이 됐는데, 후회되지 않으십니까?”

호연무한이 눈을 살짝 뜨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노호(老虎), 자네는 나를 참 오랫동안 따랐지.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는가. 나도 고민이 많았네! 좋은 계책? 이것이 폐하께 무슨 좋은 계책이란 말인가? 폐하의 황위를 상금으로 내걸었네, 일단 3대 문파가 그걸 공개적으로 발표한다면, 모든 일은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야!

폐하께 황위를 내놓으라는 계책을 어느 누가 감히 쉽게 진상할 수 있겠는가? 설사 진상했다 해도, 폐하께서도 절대 협조하지 않으셨을 걸세. 협조하지 않으시는데 한마음 한뜻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시기가 오기 전엔 나도 입을 열 수 없었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상황이 좀 더 악화되기를, 폐하께서 더는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시기가 무르익었을 때 이 계책을 꺼내 든다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거야.

저 3대 문파가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일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마도 천하가 변하는 그 날이 오는 걸 기다리지 못할 것 같네.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나도 참 많이 늙었지……. 이미 과거의 호연무한이 아니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노끈이 나를 묶고 있어.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으니, 끊어야 할 때 끊지 못했지. 그것이 장수 된 자의 금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가끔 난 정말 몽산명과 고품이 부럽네! 몽산명의 눈에는 전쟁의 승패만 있지. 그야말로 순수하고 날카롭기 그지없는 전쟁의 사령관이야. 그에게 전략 목표 하나만 주면, 일부 지엽적인 건 그 무엇도 그를 막지 못해. 지금 보니 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군.

반면에 고품은 태숙웅의 전폭적인 지지가 그를 만들었다 할 수 있지. 고품이 좋은 주인을 만났어! 오늘의 진국을 만든 건 아랫사람들 능력이 아니네. 진정한 공은 사실 태숙웅 본인에게 있지. 기대 돼, 몽산명과 고품이 승부를 벌일 그날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사호의 눈빛이 굳었다. 정말로 몽산명과 고품이 승부를 벌이는 날이 온다는 것은 제국과 후진국이 끝장났다는 의미였다. 그때가 되면, 그런 전투를 구경할 여지도 없을 것이었다.

지금 호연무한에게선 막다른 길에 몰린 의기소침한 자의 기운이 짙게 묻어났다. 사호는 호연무한이 군심을 흔들 수 있는 그 어떤 말도 쉽게 내뱉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었다. 사호의 충격도 배가 되었다.

곧이어 사호는 최대한 호연무한을 설득하며 나섰다.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장군이 계시면, 몽산명 그 늙은이가 등장할 기회도 없을 것입니다.”

호연무한은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조금 전까지 3대 문파의 장로들에게 분노하던 그 형형한 기세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난상(亂象)이 총생(叢生) 하는구나. 이건 나 호연무한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국의 운명이 다한 것일 수도 있지. 제국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노호야…….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사호가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최후까진 누구도 결과를 모릅니다!”

호연무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반란군이 날뛰니, 당연히 하루라도 빨리 평정해야지! 3대 문파가 기다리고 있다. 옥왕이 기다리고, 만조백관(滿朝百官)이 고개를 빼고 기다린다.

내가 따르지 않으면 이미 저쪽에 붙은 조정의 수많은 관리는 어찌한단 말이냐? 아마 그 순간 진국의 음모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제국은 그런 결과를 버텨내지 못할 거다.

지금 즉시 답장을 보내라. 아군은 3대 문파와 옥왕의 명을 따르겠다고.”

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호연무한은 의자에 푹 기대앉아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 호연무한이 역신이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구나. 내 아들이 옥왕의 누이와 혼인했으니, 내가 옥왕을 지지해 황위를 찬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된 것 아니겠는가? 역적이다, 형제들의 눈에 난 아마 이익을 좇는 소인으로 비칠 것이다. 그런 내가 이제 무슨 낯짝으로 형제들에게 피로 몸을 씻고, 목숨 걸고 싸우라고 호령할 수 있겠는가?”

사호는 이것이 호연무한이 줄곧 피하던 일임을 알고 있었다. 호운도가 골육상쟁을 벌이며 황위를 두고 싸울 때도, 호연무한은 줄곧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호는 그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형제들은 다들 장군께서 어떤 분인지 알고 있…….”

갑자기 사호의 말이 끊어졌다. 잠시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렸다. 너무도 낯선 모습의 호연무한을 발견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것이었다.

호연무한이 울고 있었다. 눈가를 타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의자에 더 깊이 기대앉은 호연무한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얀 손수건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이내 그의 양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호연무한의 얼굴 위에 있는 손수건도 서서히 젖어 들고 있었다.

“흑흑…….”

하얀 비단 아래, 늙은 장수는 더 거센 울음을 토해냈다. 불끈 주먹을 쥔 주먹도, 몸도 함께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보였지만, 울음까지는 결국 참을 수 없었다.

일생 절개를 지켰지만, 한순간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일세를 풍미한 영웅의 명성은 끝내 역적의 이름으로 뒤덮였다. 호연무한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을 당당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사호도 매우 놀라고 당황했다. 평생 전쟁터를 누비던 호연무한이 이렇게 서글피 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 군막 밖에 있는 누구도 호연무한의 지금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었다.

사호는 호연무한이 극도로 괴로워하고 있음을 알고, 더는 그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괴롭다면 모두 털어 내는 것이 좋았다.

사호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 휘장을 내리곤 밖을 지키는 호위들을 멀리 물렸다. 아직도 군막 안에선 악다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는 사호도 괴로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탄식을 내뱉었다.

* * *

호연무한의 대답이 경성에 도착했다. 조마조마하던 3대 문파도, 옥왕 호홍도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만조백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3대 문파는 기뻐하진 못했다. 특히 장문인들은 더더욱 그랬다. 그들은 호연무한 곁에 있는 세 장로가 보내온 소식을 통해 호연무한의 계책을 듣고, 자신들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그들은 자책하지 않았다. 이미 일을 처리했다. 이제 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울 리 없었다. 그저 속으로 호연무한에게 이런 계책이 있다면 왜 진작 진상하지 않았느냐며, 그랬다면 이런 일은 없었으리라 책망할 뿐이었다.

그리고 호연무한은 조건을 걸었다. 지금 호운도를 퇴위시키면 그 영향력이 너무 크니 최대한 정세를 고려해 황제의 허명을 쉽게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여전히 호운도에게 황제의 허명을 남겨달라는 의미였다.

이로써 호연무한은 자신이 가진 병권의 영향력으로 최대한 호운도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최소한 자신의 행동으로 호운도가 폐위되는 것은 막으려 했다. 이는 끝까지 군신의 정을 지키는 것이기도 했다.

호운도는 그간 단 한 번도 호연무한을 각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호연무한도 그런 주군에게 마지막 보답을 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3대 문파도 기쁘게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호연무한의 말을 다 따르진 않았다. 그의 말을 그저 따르기만 한다면, 3대 문파의 체면이 어찌 되겠는가?

이에 그들은 호연무한의 요구에 양념을 더했다. 가짜 어명을 내려, 옥왕 호홍을 태자로 책봉하고 섭정을 명해 제국의 군정 사무를 처리토록 했다.

이번 일을 통해, 3대 문파는 호연무한이 처음부터 누구를 지지해 황위에 올릴 생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호홍에게 철저히 속은 것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혼란은 감당할 수 없으니 이는 그저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제국이 줄곧 정하지 않았던 황태자가 정해졌다. 여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이었다.

호홍은 한 번에 황위에 오르지 못하게 방해한 호연무한에게 다소 불만이 있었으나 결코 호연무한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안정된 기반을 갖지도 못한 상황에 화를 낼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대세는 이미 정해졌다. 호홍은 매우 기뻤다. 조금 늦는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호연무한의 지지를 얻었다. 군에 대한 호연무한의 영향을 등에 업고, 드디어 경기병력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더는 방해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호홍이 처음으로 한 일은 호연위에게 상을 내리는 일이었다. 단번에 3단계를 뛰어넘어 금위군(禁衛軍) 통령에 명했다. 내부 방비 강화를 위해서였다.

이전의 금위군 통령은 호운도의 충신이었고,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 공석이 된 자리에 호연위가 적격이었다.

호연위가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호연가의 영향력이면 군심도 충분히 달랠 수 있었다. 호연가에서 군을 지휘할 장수 몇 명 찾는 게 어렵겠는가? 아마 집에 있는 아무 하인이나 데려가 부관으로 앉혀도 충분히 제 몫을 할 터였다.

하지만 호연위는 금위군 통령 직위를 거부했다. 호연위가 철은 없어도, 의리는 있었다. 그는 금위군이 원래 호운도의 친위군임을 알고 있었고, 금위군 통령이 호운도의 심복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떠한가. 황제의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 반역자가 황제의 사위에게 금위군 통령 자리를 내밀었으니,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호연위는 사양하며 아버지 호연무한의 의견을 물었다. 호연무한은 그에게 직위를 받아, 가장(家將)들에게 빨리 군심을 안정시키게 하라 명했다. 그제야 호연위는 눈 딱 감고 통령의 직위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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