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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군-1704화 (803/1,000)

1704화. 불길 속의 춤사위

대전 내부.

황제의 옥좌의 앉은 제왕 호운도는 검을 지팡이 삼아, 밖에 빽빽이 들어찬 반란군을 응시했다.

호청청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호운도의 명령에 따라, 유등을 들고 대전 주위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원래 대전 양측의 유등 수백 개는 대전을 밝히는 용도였지만, 지금은 그 유등 안의 기름 모두가 불을 지르는 화마가 되었다.

곧이어 대전 주위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불을 모두 붙인 호청청은 호운도에게 다가가 그 발치에 앉았다. 딸은 모처럼 편안하게 아버지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이내 대전 밖에 갑주를 입고 있는 호연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호청청이 갑자기 눈물을 거두며 미소를 보였다.

“부황, 저 멍청이가 오늘은 나름 그럴듯한 모습이네요.”

호운도는 가만히 호청청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생각지도 못했구나. 우리 딸과 사위가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키다니. 아비가 평소 널 예뻐한 값을 하는구나.”

그때, 호연위도 뒤돌아 대전 안쪽을 바라보았다. 대전에 불길이 치솟는 가운데 두 부녀가 보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다시 정면에 있는 적군을 바라보며,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궁수, 준비!”

돌로 만들어진 난간에 몸을 숨기고 있던 금위군의 궁수들이 즉시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방패수들도 발맞춰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반란군 측에서도 한 장수의 고함이 들려왔다.

“궁수, 준비!”

그때, 말을 타고 달려온 고원달이 반란군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도 계단 위의 호연위를 발견했다. 의외였다. 호연무한의 아들이 떠나지 않고 여기 남아있다니? 그럼 호연무한의 아들을 산 채로 잡을 수 있다면, 앞으로 호연무한의 대군과 맞설 때 패가 하나 늘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가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곤 크게 외쳤다.

“호연위! 아직 나를 기억하는가?”

호연위는 크게 웃었다.

“하하! 매년 명절이면 우리 집을 찾아오던 고 대장군 아닙니까. 제가 어찌 몰라보겠습니까? 장군님 아들이 수시로 저를 찾아와 기루로 안내하곤 했지요. 아마 그 배후에는 장군의 지시가 있었겠지요?

그렇지, 그러고 보니 장군 아들이 제게 아부를 떨기 위해 장군의 첩들도 데리고 나왔었지요.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쪽 집안의 첩들은 다 이 몸과 한 번씩 정을 통하였지요. 장군도 알고 있겠지요? 알면서도 모른 체했을 겁니다. 장군 같은 반골의 역적이 못 할 짓이 뭐 있을까요.”

이 말에, 금위군들이 떠들썩하게 비웃었다. 반란군 중에서도 상당수가 서로 눈치를 봤다. 진실 여부를 모른 채 다들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반면, 옥좌 곁에 앉아 있던 호청청은 괴로움도 잊고 눈을 크게 뜨며 호연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호운도가 딸의 손을 잡아 주며 빙그레 웃었다.

“저놈 헛소리를 믿지 마라. 기루에 간 건 모르겠다만 아래 장수들의 여인과 잠자리를 한다는 건 호연가 가풍으로 봤을 때 간이 100개라도 못 할 짓이다. 우리 사위가 적을 모욕하고 있는 것이니, 진지하게 들을 필요 없다.”

한편, 호연위의 도발에 고원달의 얼굴도 굳어졌다. 확실히 호연위는 호연가 사람 중 가장 못 믿을 사람인 건 확실했다. 호연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절대 저런 저급한 말은 입에 담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고원달은 다시 호연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호연위! 고분고분 잡힌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호연위도 큰 소리로 대꾸했다.

“개뿔! 네놈이 내 목숨을 살려준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 네놈이 무슨 생각인지 다 알겠다. 날 인질로 잡고 싶은 것이로군?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네놈도 잘 알 터, 날 인질로 삼아도 아무 쓸모 없을 것이다.

고원달,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멀쩡한 사람으로 살기도 모자란 인생에 역적질이나 하고 있다니. 지금 우리 아버지가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 네놈이 과연 도망이나 칠 수 있을 것 같더냐!”

고원달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확실히 호연무한에게는 친아들을 인질로 내세운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맞은 편에 있는 호연위가 갑자기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쏴라!”

지금은 수행자의 도움이 없으니, 일단 선수를 쳐야 했다. 만약 반란군 수행자들이 공격해 온다면 금위군은 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서기 위해선 방법은 이런 식의 기습뿐이었다.

이내 시위를 놓는 소리가 분분히 울리며, 화살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반란군은 빠르게 방패를 들었고, 일단의 병사들도 즉각 방패를 들고 고원달의 앞을 막아섰다. 고원달은 굳어진 얼굴로 명을 내렸다.

“공격!”

“쏴라!”

반란군 쪽에서도 명령이 하달되고 궁수들은 반격에 나섰다.

양측에서 사상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겨우 수천만 남은 금위군과 반란군의 궁수 규모를 비교할 순 없었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시각, 대전은 하늘 높이 솟구치는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내부는 이미 사방에서 치솟는 불길에 삼켜졌다. 그 안의 두 부녀는 마치 불로 만들어진 동굴 안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호운도가 입을 열었다.

“청아, 네가 혼인한 후로 춤추는 건 한 번도 못 봤구나. 일어나 춤을 추어라! 장병들의 사기도 북돋을 수 있게.”

“네!”

호청청은 곧 천천히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는 불꽃이 날아다니는 대전 중앙에 몸을 길게 빼고 자세를 잡았다.

곧이어 호청청의 부드러운 춤사위가 펼쳐졌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 통통해진 몸으로, 하염없이 홀로 춤을 추었다.

하지만 지금 이를 누가 볼 수 있으랴.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통에 대전 내부를 볼 겨를도 없었다.

대전을 삼킨 불길은 점점 더 몸집을 크게 불려가고, 이율배반적이게도 그 화마 속 호청청은 불꽃의 춤사위와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게만 보였다.

금위군 쪽의 상황도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화살은 이제 다 바닥나 버리고 난간 뒤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보고, 반란군 장수가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돌격!”

곧 수행자들이 날아오르고 후방의 대군이 소리 지르며 달려 나갔다. 꼭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난간 뒤에 숨어 있던 금위군들은 황급히 튀어나와 그 앞을 막았지만, 결국 수행자들에게 단칼에 잘려 나가고 말았다.

검을 움켜쥔 호연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막을 수 없었다. 방법이 없었다. 그저 두 눈 뜨고 수하들이 죽어 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고통은 하늘도 다 헤아리지 못할 듯했다.

대전 밖의 절규, 그리고 대전 입구에서 방패를 밀어내며 일어나는 호연위를 눈에 담고서 호청청은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춤사위도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때, 자신을 죽이러 쏘아져 오는 수행자를 보고, 호연위는 이를 악물고 양손으로 검을 그러쥐었다. 그는 진정으로 목숨을 걸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고원달 곁에 있던 수행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 끝에 홀연 날짐승을 타고 날아든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순찰을 돌던 반란군 수행자들과 한 차례 교전을 벌인 뒤,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쾅!

처마가 터져나가고, 그 속에서 한줄기 도광이 번쩍였다. 동시에 선혈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호연위에게 쏘아져 오던 수행자는 반으로 갈렸다.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단칼에 수행자를 처단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지면 위 석판을 산산조각 내며 땅에 내려섰다.

이내 호연위는 쏟아지는 처마 조각들을 쳐낸 뒤, 제 앞을 막아선 거대한 누군가를 보았다. 곧 머리칼이 아주 짧은 사내가 호연위를 돌아보았다.

“괜찮소?”

호연위는 멈칫하다가 크게 기뻐했다.

“여긴 어찌 왔소?”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원강이었다.

그는 본디 후진군 지원군과 함께 경성을 지원하려 했으나 미처 그럴 새도 없이 경성 성문이 뚫렸단 소식을 들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홀로 경성에 와 봤자 큰 힘도 쓰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일단 무작정 날짐승을 타고 여기로 날아왔다. 지원군도 원강을 설득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경성에 도착한 원강은 황궁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는 것을 보고 즉각 이곳으로 왔다. 마침 또 이곳이 마지막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어 어떤 상황인지 살피려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눈에 호연위가 딱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결정적인 순간, 원강은 호연위를 구했다. 사실 호연위의 그 실력으로 방금 수행자와 손속을 겨뤘다면 분명 죽을 순간이었다.

“자네를 구하러 왔소!”

원강이 짧게 대답했다.

그때, 또다시 한 수행자가 쏘아져 왔고 원강은 도를 연신 휘둘러 날아오는 검기를 하나둘 파쇄했다. 그리고 수행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다시 폭포수 같은 일도를 휘둘렀다. 갑작스럽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컥!”

비명이 울리고, 수행자는 다시 한칼에 반으로 갈라졌다.

“저자는 누구인가?”

영허부 장문인 상임선이 대경실색했다. 그 전의 제자가 일도양단 된 건 그렇다 하더라도, 방금 쏘아져 나간 자는 금단기에 오른 영허부 제자였다. 그런 자가 상대의 한칼에 반으로 갈라졌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상임선이 더욱 놀란 건 법안으로 보았음에도 상대방은 어떠한 법력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원강의 일도가 보여준 충격이 너무 커서, 뒤따라 공격해 오려던 수행자들도 기함해서 쉽게 접근하지도 못했다.

호연위는 크게 감동했다. 원강은 자신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게다가 다가오는 수행자들 족족 깔끔히 처리하는 모습을 보니, 호연위도 잔뜩 기분이 상기되었다.

“원 형! 과연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단 말이지. 그래, 마교의 성자가 됐다는 소식은 들었소. 수행자를 몇이나 데려온 것이오?”

원강은 호연위를 보호하며, 주위를 경계했다.

“홀로 왔소. 이 일은 마교와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뭐라고?”

호연위는 어이가 없었다. 원강이 지원군을 데려와 적의 포위망이라도 뚫을 줄 알았건만, 저기 적들의 천군만마가 널려있는데 홀로 왔다니! 장난하나?

주변을 경계하던 원강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오래 머물 곳이 못 되오. 절 따라오시오. 여길 돌파할 것이오!”

호연위는 희망 가득한 얼굴로 원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내와 장인어른이 저기 계시오! 우릴 다 데리고 돌파할 수 있으시오?”

원강이 빠르게 뒤돌았다. 그제야 불길이 치솟는 대전 안에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도 뜨거운 화마 속에 춤을 추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원강 역시 당연히 호청청을 알아보았다. 불길 속의 춤사위는 더없이 처량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그는 오늘에서야 저 여인이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눈물나도록 아주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이내 원강은 호청청의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순간 머릿속엔 언젠가의 기억이 스쳐 지났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당당한 눈동자와 목소리까지.

‘원강님, 당신이 좋아요!’

호청청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같은 장면이 스쳤다. 서서히 호청청의 얼굴엔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이런 순간에 원강을 다시 만날 줄이야. 이토록 위험한 때 나서주는 사람이 있다니…….

과거 호청청은 저 사내를 많이 좋아한 듯했다. 한밤중 뒤척이며 저릿한 그리움에 잠 못 이루던 날들이 많았다.

당시 풋풋했던 소녀는 제 마음을 당당히 고백했었다. 그리고 오늘날 끝까지 이 사선으로 달려온 사내를 보고 있자니, 그날 용기를 낸 건 결코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이었다.

아이를 낳고, 지금까지 수많은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에 괴로웠었다. 하지만 호청청은 지금 이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인생이 그렇게 괴롭지만은 않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야 진정으로 깨닫게 됐다.

삶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웠다. 호청청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뜨거운 불길 속에서 더욱 낭만적인 춤사위를 펼쳤다.

누군가가 보기엔 원강의 행동이 어리석게만 보이겠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동으로 내려앉았다.

옥좌에 앉은 호운도 역시 원강을 보고 있었다. 그는 원강을 몰랐지만, 그가 호연위와 아는 사이라 자신들을 도와주러 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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